문재인 정부의 노동계 포섭 전략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전략이 좋았다기보다는 상황이 좋았다. 정권 비판 세력으로 찍히면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노동조합은 개혁의 대상이 됐다. 동시에 문재인 대통령은 ‘공공부문 정규직화’를 내걸고 강력한 노동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노동계를 향해서는 대화를 하자며 손짓을 했다. 민주노총의 선택은 대중적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대 9.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문재인 정부의 포섭 전략에 응하기로 했다. 그렇게 민주노총은 지난 8일,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참여를 결정했다.
문재인 식 ‘일자리 정책’의 서막
국정지지도는 80% 안팎. 여전히 분위기가 좋다. 정부로서는 이 기간 동안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 그 중 정부가 가장 힘을 쏟고 있는 의제는 대통령의 1호 공약. 바로 일자리 창출이다. 인천공항을 방문해 ‘공공부문 정규직화’를 약속한 문재인 정부는 곧바로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장관급이 위원장을 맡았던 노사정위보다 위상이 높은 기구다. 일자리위원회의 역할은 노사민정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다.
6월 1일에는 ‘일자리 100일 계획’을 발표했다. 취임 후 100일 안에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자리 정책들이다. 여기에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로 대표되는 ‘노사상생형 일자리 모델’ 확산 계획이 포함 돼 있다. 이와 함께 정부는 공공부문 성과연봉제를 폐기하는 대신 직무급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이미 한국노동연구원에 직무급제 도입 연구 용역을 맡긴 상태다. 그 사이, 인천공항을 시작으로 한 공공부문 정규직화 바람은 민간 부문으로 옮겨 붙었다. 인천공항과 미래창조과학부 출연연구기관,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등 공공기관을 비롯해 SK브로드밴드, 롯데그룹 등이 정규직화 계획을 발표했다. 직접고용 정규직이 아닌 자회사 설립을 통한 우회적 정규직화 방안이었다.
메스가 향한 곳은 ‘재벌’이 아닌 노동자 ‘임금’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 시도가 한창이던 지난 2015년 8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는 ‘노동시장 개혁, 어떻게 해야 하나’ 특별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710조 원의 어마어마한 기업 사내유보금을 풀어 청년고용에 투자해야 한다. 노동자만 고통을 분담할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현재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재벌 대기업을 수술대에 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메스가 향하고 있는 쪽은 노동자 임금이다. 정부가 확대코자 하는 ‘광주형 일자리’는 대기업 정규직 임금을 삭감해 하청 노동자들과 나누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모델이다. 직무급제는 하나의 직무을 묶어 임금을 책정하는 임금체계다. 그 직무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한 영원히 같은 처우가 지속될 수밖에 없어 ‘영원한 차별을 고착화 하는 제도’로 알려져 있다. 자회사 정규직 전환 역시 기존의 ‘총액인건비’를 유지하면서 고용안정을 꾀하는 방식이다.
지난 5월 29일, 희망제작소 사다리포럼이 주최한 ‘새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정책’에서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직무급제 도입, 자회사 설립을 통한 정규직화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공공부문 정규직 임금을 억제해 비정규직 처우개선에 활용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배규식 연구위원은 발제문을 통해 “공공부문 고임금(가령 7,000만 원 이상) 억제를 통해 공공부문 인건비를 통제하고, 여기에서 절약한 임금분으로 공공부문의 추가고용,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자회사 정규직화, 처우개선에 필요한 비용의 일부를 충당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선 민주노총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네덜란드의 노사정 대타협 모델을 벤치마킹 하고 있다. 정규직 임금 삭감과 일자리 창출을 맞바꾼 사회적 대타협 모델이다. 앞으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와 정부, 재계, 시민사회가 ‘사회적 대타협’을 위해 논의할 의제이기도 하다. 지난 13일, 노동운동진영 좌파 그룹들이 주최한 ‘문재인 정부의 노동전략, 노동운동의 과제’ 토론회에서 김하영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은 “네덜란드 노사정 대타협의 결과는 시간제 일자리 폭증과 저임금 노동자 증가, 그리고 여성 빈곤 확대로 귀결됐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문재인 정부의 정규직 양보론의 실제 목적은 경제 불황에 직면한 기업들의 비용을 줄여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노동계의 비판적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자회사 설립을 통한 정규직 전환, 직무급 도입 등에 대한 민주노총의 입장도 명확하지 않다. 6.30 사회적 총파업도 ‘비정규직 사업장 파업’으로 축소됐다. 현재 명확한 것은 민주노총이 저임금-비정규직 일자리를 없애고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일자리위원회에 참여하겠다는 방침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민주노총의 의지가 반영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30명으로 구성될 일자리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의 자리는 한 석 뿐이다. 정부 측 인사만 15명, 정부가 추천한 민간전문가는 9명에 달한다. 의결 구조는 재적위원 과반수 출석, 출석위원 과반수 찬성이다. 이쯤 되면 분명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물론 민주노총은 일자리위원회 참여를 조건으로 노사현안을 논의하는 ‘노정교섭 정례화’를 내걸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고용노동부 장관이 임명되면, 노사정위의 간판만 바꾼 또 다른 사회적 대화기구가 신설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어떤 기구가 들어서든, 결국 민주노총의 계급대표성 해체와 노동자 분리전략으로 귀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상당하다.
정진우 노동당 노동위원장은 “노사정위 또는 노정교섭의 틀이 운영되더라도 그것은 정무적인 대화 라인을 유지할 필요에 따른 수순이 될 것”이라며 “메인테이블은 ‘노정’이 마주보는 겸상이 아닌, ‘만인’이 둘러앉은 원탁이다. 중요한 것은 정부의 핵심 노동전략이 노동운동의 계급대표성 해체를 정면으로 겨누고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워커스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