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최건병
최건병(61) 씨는 경남에 있는 한 자동차 부품 도색업체에서 촉탁직(원청이 직접 고용한 단기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재작년 같은 공장에 일당직으로 들어간 뒤, 정규직을 거쳐 촉탁직 신분이 됐다. 안정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큰 불만도 없다. 그가 갈 수 있는 일자리는 항상 열악했고 고만고만했다. 지난 세월 겪은 고통과 좌절만 다시 떠올리지 않는다면 그래도 견딜 만했다.
외환위기가 닥친 98년, 최 씨는 S중공업에 다니고 있었다. 방위산업에 필요한 대포를 만들고, 현대, 쌍용 등 완성차 회사에 부품도 대는 납품사였다. 외환위기 당시 회사는 아비규환이었다. 임금은 10개월 치가 밀렸고, 지급 불능의 위기 속에 회사는 퇴직을 종용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최 씨는 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긴 싸움에 나섰다.
정부는 지급보증을 해준다고 달랬지만 연대 보증인이 필요했다. 서류 심사를 통과할 수 있는 노동자는 한 명도 없었다. 상황 판단이 결여된 황당한 정책은 노조를 자극했고, 노동부와 국회, 청와대 앞은 시위대로 들끓었다. 얼마나 사람들이 성이 났는지, 중대 병력들은 겁을 먹고 다 흩어져 버렸다. 격한 시위를 벌이며 돌아다닌 지 한 달. 정부로부터 ‘그럼 직원들이 서로 보증을 서라’는 답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막상 현장으로 돌아오니 일이 없었다. 직원들은 한 달 씩 쉬며 순환근무를 했다. 최 씨는 공장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인력사무소를 찾았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다. 인력사무소는 해고된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그 사이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0년에는 민간업자에게 인수됐다. 새로 부임한 사장은 ‘흡혈귀가 되겠다’며 취임일성을 밝혔다. 하청을 쪽쪽 빨아 살아남겠다는, 살벌한 말이었다.
경기 회복과는 별개로 회사의 위기는 계속됐고 순환휴직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구조조정 1순위는 노조조합원들이었다. 다른 부서로 발령을 내고, 복직한 조합원들을 괴롭혔다. 복직을 못한 11명의 동료들이 매번 눈에 밟혔다.
버티는 게 힘들다고 느껴질 무렵, 최 씨는 무너져 내렸다. 심한 두통을 앓던 그는 어느 날 공장에서 일을 하다 쓰러졌다. 최 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내 울었다. 회사를 생각하면 절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견디기 어려웠다. 담당 의사는 그에게 정신 병동으로 옮기길 권유했다. 의사는 소견서에 ‘스트레스로 인한 적응 장애’라고 적었다. 그리고 최 씨는 3년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가족 외에는 면회도 안 되는 곳에서 밤마다 주사를 맞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해고 무효 소송에 패소한 최 씨는 산재 신청도 못한 채, 가까스로 치료비 1천만 원을 손에 쥐었다.
퇴원 후 생계를 위해 건설 현장에 나갔지만 전동 드라이버조차 들기 어려웠다. 손을 심하게 떠는 통에 나사 하나 박기도 힘들었다. 2007년에는 아파트 경비로 취직했다. 들뜬 마음으로 출근한 그 곳이 악몽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아파트에 살던 S중공업 관리직이 그를 알아봤다. 그리고는 최 씨가 ‘빨갱이’라는 소문을 냈다. 아파트 경비 반장은 경찰 출신 이었다. 반장은 최 씨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결국 그는 일주일 만에 아파트 경비실을 뛰쳐나왔다.
이후 냉장고 부품 조립공장, 공장 야간 경비 등을 전전했지만 상할 대로 상한 몸은 버티질 못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전전긍긍 했다. 그 와중에 군대 간 아들이 열외 취급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 최 씨의 신상에 ‘사회적 반항아’라고 적혀 있었던 탓이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했다. 다시 인력사무소를 드나들었다.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건설현장에 수해가 나면 흙포대를 쌓고, 터널에 들어가 전기설비를 돕고, 도로 공사에선 땅을 닦았다. 몸과 기억이 무뎌질 일을 했다. 하지만 세월도 그의 고통을 지울 수 없었다. 늘어가는 것은 자책뿐이다. 내 아들에게, 그리고 젊은 세대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분명 세상은 변했지만, 현실은 변한 것이 없었다.
작가 지망생 김광석
김광석(35) 씨의 꿈은 작가다. 지금은 수원의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김 씨는 매대를 정리하고, 계산을 하고, 정리를 하는 틈틈이 글을 쓴다. 그래서 김 씨는 야간 근무가 좋았다. 낮엔 도통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말 야간 근무 중이던 편의점 알바 노동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 뒤론 불안감에 글을 쓸 수가 없다. 당장 그런 일을 당한다 한들, 속수무책인 건 여전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가를 꿈꾸다보니 말도 안 되는 삶의 조건이 만들어졌다. 그가 버는 월 100만 원은 그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었다. 부모님께 전세금을 빌리지 못했다면 어떤 것을 더 포기해야 했을까. 마지막 연애는 5년 전. 하루 데이트 비용으로 몇 만 원은 기본이다. 더 높은 수입의 직업을 찾기 전까지 연애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는 작가 라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마저도 포기한다면 이 사회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만 같았다. 글을 쓰는 일이 사회에 저항하는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기까지, 그는 꽤 오래 가슴앓이를 했다.
작가가 되는 것은 취직보다 어려웠다. IMF 사태를 겪고 본격적으로 비정규직이 양산되던 때 대학에 입학한 동기들은 정규직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소위 말하는 명문대 졸업장을 갖고 있으니, 준비만 잘하면 곧잘 취업은 됐다. 동기들이 하나둘 직장을 갖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평정심이 깨졌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커지는 고립감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졸업 후 2~3년간 공황장애를 앓았다. 약물치료까지 받았던 그는 자취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살기로 했다. 그리고 삶의 ‘정상 궤도’에 오르기 위해 안정적인 직업을 찾았다. 노량진에서 2년 정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미디어에서만 접했던, 암울한 노량진의 풍경을 매일 마주했다. 모두가 발버둥 쳤지만 꿈을 이뤄 노량진을 떠나는 이들은 소수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앞서나간 것처럼 보였던 동기들도 어느 순간 부럽지 않아졌다. 누군가는 ‘정신 승리’라고도 웃었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취업전선에 뛰어든 친구들도 죽기 직전인 건 마찬가지였다. 다들 삶의 만족 없이 어디론가 탈출을 꿈꿨다.
평범한 직장을 갖길 원하는 부모와 마찰이 잦아졌다. 부모님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들이었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않는 이상 일체 도움도 불가하다고 못을 박았다. 홀로서기를 위한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그의 임금은 최저임금을 넘기 힘들었다. 방과 후 교사, 입시 학원 강사, 과외 등을 전전했지만 수입은 적었다. 같은 처지의 명문대 출신 학원 강사는 지천에 널려있었다.
똑같이 불안정하지만, 틈틈이 글이라도 쓸 수 있는 편의점 알바를 택한 건 지난해 8월부터다. 김 씨의 부모님은 IMF 외환위기 이후 오히려 살림이 늘었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평탄한 직장생활을 했고, 어머니는 재테크로 돈을 벌었다. 고등학생이었던 김 씨는 이상하다고 느꼈다. 김 씨의 가계 사정이 좋아질수록, 친구들의 집은 계속 휘청거렸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김 씨의 친구들은 자주 울었다. 무너지는 가정에 절망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자책했다. 명문대와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싹텄다. 생존과 낙오의 갈림길이 분명해졌다.
그 길 위에서 김 씨는 궤도를 이탈하기로 마음먹었다. 선택지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여전히 누군가 손가락질 했던 그의 선택이, 언젠간 새로운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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