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고통을 분담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강조했다.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이 도래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은 허리띠를 졸라맸다. 박세리 선수의 맨발 투혼을 보며 애국심을 다잡았고, 나라 빚을 갚겠노라며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했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그리고 20년, 한 세대가 흘렀다. 그 때 고통을 짊어져야 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고통을 강요했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물지 않은 상처에 자꾸 고름이 찬다. 애써 잊으려 할수록, 세상이 온건해 질수록 더욱 그렇다. 내 손에만 있는 줄 알았던 고통이 이제 세대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진부하고 비관적인 이야기들을 포기할 수가 없다.
1997년 11월 21일은 한국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이다. 그럼 이만 안녕, 우리는 과연 지난했던 97년 체제에 작별의 인사를 건넬 수 있을까.
중소기업 노동자 심이은
8월의 뙤약볕 아래서 자기소개 영상을 반복해 찍는다. 두껍게 칠한 화장이 무더위에 녹아내린다. 심이은(28, 가명) 씨는 하반기 공채에선 무조건 성과를 남겨야 했다. 지겨운 서류 탈락을 넘어 면접관 얼굴을 구경해보는 게 이번 공채의 목표다.
심 씨는 바늘구멍이라고 소문난 마케팅 분야에 지원했다. 그동안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기소개서를 썼고, 고문을 견디듯 프로그램 제안서를 작성했다. 해가 지날수록 공채 난이도는 점점 높아졌다. 올해는 자기 PR을 할 수 있는 영상을 찍어 오라고 했다. 1분 이내의 짧은 영상으로 어떻게 나의 매력과 신선함을 어필할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 마감일이 닥쳐왔다.같은 처지의 취준생 친구에게 촬영을 맡겼다. 자꾸 NG가 나 촬영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원고를 더듬어서, 매미 소리가 너무 커서, 표정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몇 번을 다시 찍었다.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어렵게 편집한 영상을 첨부해 이력서를 보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피 마르는 시간을 견뎠다. 하지만 심사 결과는 탈락. 취업준비 카페에 가보니 지원자들의 스펙과 준비한 영상에 대한 설명이 줄줄이 올라온다. 어느 지점에서 탈락했는지를 묻고, 또 대답한다. 위로가 되는 건 심 씨보다 더 열심히 준비한 사람들도 고배를 마셨다는 것 정도다.
이듬해 심 씨는 지옥 같던 취준생의 세계를 간신히 탈출했다. 눈을 한껏 낮춰 중소기업에 지원한 결과다. 중소기업의 채용 절차는 훨씬 단순했다. 압박 면접에 대비해서인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면접도 무난히 통과했다. 그래도 취업 준비 기간 받았던 상처와 고통은 고스란히 후유증으로 남았다. 지원했던 회사명을 보거나 들으면 가슴이 덜컥했다. 일부러 회사명을 피해 다녔고, 취업 준비 과정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자괴감이 들었다.
심 씨의 친구 한 명은 취업을 준비하며 웃음을 잃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도 크게 웃지 못했고,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무리에 섞이지도 못했다. 증상은 오래 갔다. 취업을 하고도 오랫동안 우울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취업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던 친구들의 걱정도 커졌다.
처음엔 회사에 적응하느라 피곤해서 그렇다던 친구는, 결국 모든 것에 무기력해진 것 같다고 털어놨다. 심 씨는 친구를 이해하고도 남았다. 심 씨만 해도 돈과 시간, 에너지를 온통 쏟아 붓고도, 언제나 발을 동동 굴렀다. 토익 학원을 다니고, 토익스피킹, 한국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했다. 매일 카페에 모여 같은 처지의 취준생끼리 스터디를 했다. 교육 봉사도 꾸준히 했고, 3~4곳의 회사에서 인턴 경험도 쌓았다. 그것도 모자라 대기업에서 실시하는 인적성 시험 문제를 공부하기도 했다. 면접이라도 잡히면 온 가족이 심 씨의 눈치를 봤다. 면접용 헤어와 메이크업을 장착한 채 불편한 정장을 걸쳤다. 갈아 신을 힐과 자료 등을 한 짐 가득 챙겼다. 면접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마스카라가 달라붙은 뻑뻑한 눈으로 자료를 열심히 훑었다.
취업 준비를 하며 심 씨의 체력은 동이 났다. 처음에는 취업만 하면 뭐든 게 다 완벽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취업은 또 다른 ‘털림’의 시작이었다. 4년차 직장인이 된 심 씨는 점점 더 회사 일이 버거워진다. 걸핏하면 야근에, 퇴근 후까지 이어지는 회사 단톡방, 주말에도 업무 준비 때문에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다. 회사 사정 때문에 대리 진급이 늦어진 것뿐인데, 사수는 아직 심 씨를 신입사원 취급한다. 업무가 많은 것도 배움의 일환이라며 꼰대짓을 한다. 나의 일상을 포기하며 사는 것만 같아 한숨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일상은 언제나 미래에 저당 잡혀 있었다. 대학을 가면, 취업을 하면, 이라는 전제를 붙여놓고 포기하기만 했다. 당연한 듯 포기한 것들은 영영 심 씨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어느새 청춘이 저물고 있다.
심이은의 아버지
심 씨는 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 시절을 꽤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그는 초등학생이었다. 학교 글짓기 시간에 경제위기로 어려워진 부모님의 사연을 적었다. 꽤나 절절했는지 교내에서 상까지 받았다. 심 씨는 그 시절, 생전 처음으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의 모습을 목격했다. 가방까지 잃어버린 채 휘청거리는 아빠의 모습,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새 가방을 사 오신 어머니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심 씨의 아버지는 수시로 구조조정 칼날이 몰아치는 회사에서 정년 가까이 버텼다. 회사생활 30년은 늘 위태롭고 불안했다.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고 경계했다. 잔인한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처신했다. 문학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처세술 및 각종 자기계발서를 탐독했다. 명절마다 상사의 집에 선물을 보내고 안부 인사를 챙겼다. 피곤으로 늘어진 몸을 질질 끌고 회식자리에 참여했고, 술자리에서 지갑을 열었다. ‘할당’을 채우기 위해 비굴해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악착같이 살아도 결국 평범한 삶을 쫓고 있을 뿐이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를 벗어나면 벼랑 끝이었다. 먼저 나간 동료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 입사 동기는 회사를 나간 뒤,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보험모집인을 하며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었다.
아버지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악명 높은 보험회사에 다녔다. 구조조정은 수시로 닥쳐왔다. 숨을 죽이며 사는 것이 일상이 됐다. 진급은 고사하고 회사에 붙어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구조조정을 앞둔 회사는 직원들을 불러 자신이 왜 회사에 남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라고 했다. 폭풍 전야 같은 긴장감 속에서 구구절절한 면접이 치러지곤 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왜 회사에 남아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본인과 본인이 속한 팀이 이룬 성과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같은 부서의 누구를, 어떻게 자를지에 대한 계획도 제시했다. 면접은 언제나 한여름 땡볕처럼 사람의 진을 뺐다. 어떤 직원들은 엉뚱한 부서로 발령을 보냈다. 당당하게도 말해보고, 우는 소리도 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조용히 짐을 싸 나갔다. 살아남은 아버지는 부서를 살뜰히 챙기던 여직원에게 퇴직을 권했다. 구조조정 광풍이 지나고 나면, 아버지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경제위기가 닥칠 때마다 집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족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마음처럼 잘 안됐다. 결국 정년을 몇 년 앞두고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어머니는 아쉬워했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만하면 끝까지 버틴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퇴직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잦은 다툼을 했다. 아버지는 30년을 밖에서 고생했으니 이제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30년 간 집안일에 매여 있었으니, 이제 가사분담을 하자고 아버지에게 요구했다. 심 씨를 키우며 대형마트 캐셔, 행사 단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가사노동까지 도맡았던 어머니의 요구도 당연했다.
어느덧 어머니와 아버지는 인생의 2막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분명 이전과는 다른 삶이지만, 어쩌면 이전보다 더 고달픈 삶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요즘 경매를 배우거나 부동산 투자처를 알아보거나, 건물 관리인 자리를 찾아다닌다. 새로운 삶의 문턱 앞에서, 벌써부터 호흡이 가빠진다.
[34호 이슈 보기] 1997.1121.20000.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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