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 질의응답에서 “노조의 조직률을 높이는 게 중요하고 정부도 노조 조직률을 높이기 위해 정책적 노력을 하겠다”며 “노조의 결성을 가로막는 여러 사용자 측의 부당노동행위는 강력한 의지로 단속하고 처벌할 것”이라고 답했다. 2년 전, 당시 여당 대표였던 김무성이 “강성노조 때문에 GDP가 3만 불이 되지 못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 노조를 비난했던 것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대통령이 노조조직률을 높이겠다고 선언하는 세상. ‘누구나 노조를 할 수 있는 시대’가 얼마 남지 않은 걸까.
감형을 위한 꼼수, 유시영 2심 재판
대통령의 발언이 있기 하루 전인 8월 16일, 유성기업 유시영 회장 등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있었다. 부당노동행위 기업주 엄벌에 대한 의지를 가늠할 수 있었던 판결이었다. 이미 1심 판결에서 유시영 회장은 징역 1년 6개월과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된 바 있다. 회사는 1심 판결이 “부당 판결”이라는 대자보를 현장에 붙였고, 노조에게 사과하거나 성실한 대화에 임하는 것은 가석방을 위한 “부당한 타협”이라고 밝혔다. 동요하는 관리자들에게는 회장이 조만간 석방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재판에서는 노조파괴를 회장이 지시하지 않았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최소한의 반성도 하지 않는 회사. 지속되는 탄압과 경영진들의 끊임없는 몽니,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2심 선고는 중요했다.
2심에서 재판부는 유시영에게 징역 1년 2개월과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1심보다 줄은 형량. 2심 판결문에서 법원은 창조컨설팅이 작성한 전략회의 문건(노조파괴 문건)의 증거가치를 인정했고, 유시영의 공동정범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했다. 불법직장폐쇄, 징계, 해고 등의 부당노동행위와 회사가 어용노조에 개입한 행위 역시 인정했다. 1심과 다른 판단을 한 부분은 직장폐쇄기간에 지급되지 않은 임금에 대한 부분이었다. 직장폐쇄는 회사가 노동자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수단이다. 특히 유성기업은 직장폐쇄 기간을 늘려 유성지회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약화시키고, 어용노조가 세력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재판부는 이 같은 사실을 다 판결문에 적시하고도, 임금미지급의 고의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특정한 목적(임금미지급)을 위해 저지른 행위는 불법이지만 그 목적은 고의성이 없다는 황당한 판결. 사실상 감형을 위한 꼼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헌법33조를 무력화시킨 노조파괴 시나리오
유성기업에서 노조파괴가 가능토록 한 신호탄은 2010년 도입된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였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타임오프제와 교섭창구 단일화를 골자로 한 노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마자 경주 발레오만도를 비롯한 전국의 부품사 노조를 대상으로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가동됐다. 발레오만도(2010년 2월), 구미 KEC(2010년 6월), 대구 상신브레이크(2010년 8월), 유성기업(2011년 5월), 만도와 SJM(2012년 7월)…. 대다수의 노조가 겪은 일은 비슷했다. 회사는 외주화나 단체협약을 문제 삼으면서 노조의 쟁의행위를 유발한다. 노조가 쟁의행위에 나서면 회사는 용역깡패를 투입하고 직장폐쇄를 단행한다. 노동자들이 생계에 지쳐 업무복귀를 선언하면 회사는 업무복귀 대상을 선별한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회사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을 모아 회사노조를 만든다. 이렇게 생긴 두 개의 노조에 대해 회사는 일방적으로 회사노조에 혜택을 몰아주면서 민주노조 조합원을 차별하고, 탄압한다.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가동된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다.
이는 헌법 33조(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를 무력화시킨 위헌적 행위였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주요한 힘은 정부와 국가기관의 협조에 있었다. 2011년 경찰은 유성기업 파업대응 대책으로 ‘노조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 조속한 발부’, ‘사측 대상, 손해배상 청구 유도’, ‘공장 단전·단수, 가스차단’ 등을 제시한다. ‘노조’를 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또한 노동부와 검찰은 유성기업의 불법 직장폐쇄와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를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았고, 곧바로 기소하지도 않았다.
‘노조파괴 시나리오’가 준비되고 실행됐던 과정은 한국에서 노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노조’를 적으로 규정하는 기업. 기업의 편을 자처하는 국가기관. 노조를 한다는 소문만으로도 해고되고,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일터, 부당노동행위를 저질러도 기업주는 처벌하지 않는 사법부, 기업의 횡포는 눈감으면서 노동자의 저항은 짓밟는 공권력. 이 모두가 노조 할 권리를 가로막는 뿌리 깊은 적폐들이다.
유시영 2심 판결과 대통령 발언 사이
유시영 2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부린 꼼수와 대통령의 “부당노동행위 엄벌” 발언 사이의 간극은 깊다. 이를 메우기 위해선 조금 더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그 수술 중 하나는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 폐기다. 지금은 교섭에 대한 재량권이 회사에게 있다. 그렇다보니 회사노조가 과반이상일 때는 교섭창구를 단일화해서 민주노조의 교섭권을 빼앗고, 과반이 안 될 때에는 개별교섭으로 회사노조에 혜택을 몰아준다. 민주노조를 괴롭히기 위해 악용되는 교섭창구단일화는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또한 비정규직 법제도를 없애야 한다.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는 비정규노동자를 ‘해고’시키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는 너무도 쉽다. 계약직의 경우는 계약을 해지하면 되고, 파견직의 경우는 하청업체를 폐업하면 된다. 노동자를 손쉽게 쓰다 버릴 수 있게 만든 비정규직 법제도들은 노조 할 권리를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도구다.
마지막으로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른 기업주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이 필요하다. 갑질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기업주는 불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을 괴롭혀도 부당노동행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중범죄가 될 수 있다는 본보기가 필요하다. 노조할 권리는 보편적인 권리이며 이를 침해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워커스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