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역사연구자)
힙합 역사상 최고의 작사가 중 한 명인 나스는 2015년 래퍼로서는 처음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W.E.B. 두보이스 메달’을 받았다. 이 메달은 하버드 대학에서 흑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윌리엄 두보이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문화, 인권, 아프리카인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에 대한 예술적 기여’를 근거로 복서 무하마드 알리 등과 더불어 나스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힙합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앨범인 ‘일매틱’으로 데뷔한 뒤 20년 이상 꾸준히 활동해 온 나스는 힙합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는 메달을 처음으로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중학교를 중퇴한 랩 스타와 미국 최고의 지성 사이에는 좀 더 깊은 관계가 있었다. 나스는 이미 오래 전 자신의 곡에서 영양가 없는 ‘지방 낀 랩’을 듣지 말고 두보이스와 제임스 볼드윈 같은 흑인 저자들의 책을 읽으라고 권한 바 있었다. 나아가 복서 슈거 레이 로빈슨, 흑인 지도자 부커 워싱턴과 두보이스처럼 오늘날에는 자신이 흑인을 대표해 정치인들에게 소리치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항상 교육의 중요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나스는 분명 두보이스를 닮았다. 2013년 그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두보이스 연구소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제도를 개설하고 감격한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1868년 태어난 두보이스는 당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는 피스크 대학과 베를린 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했고, 오랫동안 아틀란타 대학 교수로 역사학과 사회학, 경제학을 가르치면서 미국의 인종 문제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를 여럿 남겼다. 또한 유럽을 넘나들며 범아프리카주의 운동을 조직하는 데 깊이 관여했고, 오늘날까지 미국의 대표적인 시민운동 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를 설립했다. 차별적 현실을 당분간 인정하고 실용적 기술 교육을 통해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20세기 초 흑인 운동의 주도적인 관념과 달리 두보이스는 완전한 시민권과 더 많은 기회를 요구해야 하며 인문학과 고등교육을 통해 흑인 사회를 이끌 ‘재능있는 10퍼센트’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다수의 흑인 인구가 차별과 폭력이 일상적이었던 남부에서 가난한 농민으로 살아가던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나간 주장이었다.
동시대의 많은 흑인 엘리트들이 정부에 협조적인 미국인으로 길들여진 반면 두보이스는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 더욱 날카로워졌다. 1차 세계대전 때 그는 식민주의의 종식과 권리 증진을 위해 흑인이 백인과 ‘좁은 대열’로 서서 미국의 전쟁 수행에 협력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흑인의 처지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한 그는 크게 좌절했고, 이후 미국의 한반도 개입과 핵무기에 반대하는 평화 활동가로 거듭났다. 사회당원이면서도 민주당의 윌슨을 지지하던 온건한 입장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는 일찍부터 일본을 비서구 국가의 모범적 발전 사례로 주목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성을 확인하고는 기대를 접었고, 대신 새롭게 태어난 중화인민공화국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희망을 걸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피부색이나 아프리카라는 땅이 아니라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모욕’에서 태어나 ‘황인종 아시아와 남태평양 사람들까지 하나로 묶어주는’ 유대감이었다.
시대를 풍미한 흑인 지도자
매카시즘의 열풍 속에서 두보이스는 소련 스파이로 지목돼 기소되었고, 흑인 지식인들과 자신이 관여한 단체들마저 그를 외면했다. 아인슈타인 등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기소가 취하되었으나 그와 함께 고군분투하던 폴 로브슨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여권 발급을 받지 못했다. 1961년 그는 매카시즘의 상징이었던 공산주의자 등록 제도를 합헌 으로 판결한 대법원에 항의해 미국 공산당에 가입했고, 얼마 후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아프리카 대백과 편찬을 맡아 달라는 은크루마 대통령의 초청에 응해 신생 공화국 가나로 이주했다. 미국 정부는 여권을 더 이상 연장해 주지 않았고, 그는 가나 국적을 취득했다. 힙합계에서 두보이스는 시대를 풍미한 흑인 지도자로 자주 언급된다. 대표적으로 늘 깨어있는 래퍼인 루페 피아스코는 차별과 억압이 없는 미국의 역사를 상상한 ‘올 블랙 에브리씽’에서 헌법 작성자로 두보이스를 꼽으며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 그를 추앙했다. 크리스천 힙합 뮤지션인 쇼 버라카는 두보이스의 영향력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재능있는 10퍼센트’라는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많은 래퍼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두보이스의 유산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소울’이나 ‘컬러 라인’처럼 그가 의미를 입힌 단어들은 힙합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그가 평생 헌신한 범아프리카주의의 가치는 줄루 네이션과 네이티브 텅스처럼 힙합계에서 가장 재능있는 음악인들의 긍정적인 가사로 표현되었다.
두보이스는 1963년 95세의 나이로 가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다음날 일자리와 자유를 요구하며 미국 워싱턴에 모인 2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그를 위해 묵념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통합과 평등을 외쳤다. 두보이스가 못다 한 아프리카 대백과 사업은 1999년에야 완성되었다. 대백과의 책임 편집자인 하버드 대학 두보이스 연구소의 교수 헨리 게이츠는 2009년 자신의 집 현관에서 고장난 문을 열다 체포되어 전국적인 논란을 일으켰는데, 체포 당시 그는 백인 경관에게 “왜, 내가 미국에 사는 흑인 남자라서?”라고 쏘아붙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항상 미국인이자 흑인이라는 ‘이중 의식’을 느낀다는 한 세기 전 두보이스의 통찰이 여전히 유효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