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다솔, 정은희 기자
“커피의 진득한 찌꺼기가 밑동에 남아있거나 녹차가 말라붙은”1) 컵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1999년 11월 서울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열린 민중대회 한 편에서 여성활동가들이 ‘컵 깨기’ 행사를 열었다. 이들은 사무실 책상이나 개수대에 쌓인 컵들을 들고 나와 광장에 내동댕이 쳤다. ‘운동사회 내 가부장성과 권위주의 철폐를 위한 여성활동가모임(actwo)’ 결성식이었다. 대학과 노동조합에서 성폭력 이슈가 막 터져 나왔던 때였다. 이어 2000년 12월 진보진영의 독립 PC통신이던 진보네트워크 참세상2)에 16건의 성폭력 사례가 가해자 실명 공개 형식으로 폭로됐다.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100인위)의 기획이었다. 이후 2차 공개까지 약 2개월간 참세상엔 무려 1300여 건의 게시물이 올라올 만큼 100인위의 반향은 컸다. ‘피해자 중심주의’나 ‘2차 가해’ 등 현재 운동사회 반성폭력 운동의 주요 골격도 이때 형성됐다.3)
20년의 터울을 두고 이제 ‘#미투’(me too)가 한국사회를 흔들고 있다. 이번엔 주류 한복판에서 서지현 검사가 미투의 촛불을 먼저 들었다. 그는 1월 29일 검찰 내부망에 “그러나,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과격한(?)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이라며 안태근 전 검사의 성폭력과 인사상 불이익을 폭로했다. 잇따라 각계 여성들이 미투를 외치며 한국 사회의 젠더 폭력과 위계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지금의 미투 운동은 100인위와 많이 닮아있다. 그런데 정작 100인위를 지나온 운동사회는 어느 때보다 잠잠하다. 이런 상황에서 《워커스》는 여성단체, 성폭력공대위, 단체 여성사업 담당자를 중심으로 이들의 고민을 들어봤다.
“100인위가 터졌을 때 놀랐던 것이 운동사회에서 이 원칙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2차 가해의 개념도 수용하고, 내부 규약을 만들었다. 이전에는 성폭력 문제를 가시적으로 덮으려 했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사실 큰 변화는 없는 것 같다.” – 100인위 참가자 장임다혜 씨
“후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권력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 100인위 참가자 전소희 씨
#1. 백래시, 음모론과 피해자 책임론
반성폭력 운동을 해온 여성활동가들은 과연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2015년 메갈리아, 2016년 강남역 여혐살인사건 뒤 페미니즘 운동이 대중적으로 파급되고 있다. 그러나 운동사회에서만큼은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그 때문에 여성주의 활동가들의 고민은 더욱 깊다. 지난해 5월 한국여성민우회가 개최한 “‘2차 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토론회에 모인 300 명이 넘는 청중 수가 이를 반증한다.
여성활동가들은 무엇보다 운동사회에서의 백래시4)에 대한 고민이 컸다. 음모론부터 역고소나 2차 가해 등 가해자 측의 백래시는 그 동안 성폭력 사건이 제소되는 곳에서 마다 어김없이 논란이 됐지만 지금도 드물지 않다. 그 중에서도 음모론은 가장 오래된 백래시이다.
“피해자가 전교조 여성조합원이었는데 사건 후 조직을 보위해야 하는 개인으로 얼마나 쉽게 도구화될 수 있는지 절감하게 됐다.” – 민주노총 김00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의 황미선 대리인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제소하기 전 사람들이 이 사건을 다른 정치적 맥락으로 읽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이 됐다.” – 성폭력 피해를 제소한 한 피해자
피해자의 성폭력 제소 동기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이 음모론은 가해 사실로부터 쟁점을 이동시키고 제소를 무력화하는 간편한 백래시이다. 제소가 가해자에 대한 것이지만 음모론은 쉽게 피해자의 문제로, 또는 다른 정치적 문제로 쟁점을 돌릴 수 있다. 이 같은 음모론은 2008년 민주노총 김00 성폭력 사건이나 2013년 코리아연대 사건 또는 2011년부터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대학문화‧노동자연대 성폭력사건에서도 논란이 되어 왔다.
“사람들이 같이 제소한 피해자들의 사례를 임의로 분류하며 ‘얘는 연애 문제고 얘는 사과로 끝날 문제로 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됐다. 가해자를 옹호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논리의 연장일 뿐이고, 이것이 다른 사안에서도 횡행한다는 걸 알게 됐다.” – J성폭력공동대책위 피해자
여성활동가들은 성폭력을 당한 이유를 피해자에게서 찾는 피해자 책임론도 여전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주류사회에서도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성격 등을 피해 원인으로 탓하며 계속 반복되는 문제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제소를 하고 싶어도 오히려 자신이 책망을 당할까봐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상담을 할 때, 자책을 덜어내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 피해자들은 ‘내가 노래방에 따라가서 그런 게 아닐가’ ‘내가 싫다는 말을 조금이라도 분명하게 했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자책을 많이 한다. 피해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몸이 느끼는 것이 무엇이고,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더 들여다봐야 한다.” – 손문숙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
#2. 백래시, 역고소
“명예훼손으로 걸면 경찰이 소환해 조사를 하는데 굉장히 위축됐었다. 주변인들에게도 경찰에 고발을 해놓고, 메시지를 보내 ‘인생 망치고 싶지 않으면 합의해라’ ‘위자료 2-300 주면 취하하겠다’ 등의 협박을 했다.” – 노동당 전 서울시당 관계자
많은 활동가들은 역고소가 늘어나고 있는 경향 그리고 이것이 반성폭력 운동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했다. 피해자나 대책위에 대한 가해자의 소송은 100인위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SNS에 연이어 데이트폭력 사건이 폭로된 후 가해자 측 모두가 소송을 택하는 등 역고소의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피해자가 민사소송을 당했던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대책위원회는 2013년 “거액의 민사소송으로 개인인 피해자를 위축시켜 공론화를 중단시키기 위해서, 피해자를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여자로 몰아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5)고 주장한 바 있다. 2016년에는 한 성폭력 공동대책위인 J성폭력공동대책위 피해자들과 위원 등 모두 5인이 가해자로부터 4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을 당했다. 역고소가 늘어나는 문제에 대응해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해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함께 성폭력 역고소 대응 매뉴얼 등을 만들고 해당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3. 백래시, 2차 가해와 무시
여성활동가들은 가해자로 지목된 개인이나 소속 단체들의 2차 가해나 무시도 반성폭력 운동을 어렵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사례는 다양하다. 코리아연대나 노동자연대도 수년째 피해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가해 논란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다른 한 성폭력사건의 경우에는 가해자가 속한 모 단체가 아예 단체 활동을 일시 중단했다는 이유로 대책위 참여를 거부하기도 했다.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민주노총 김00 사건과 관련해 2차 가해자들에 대한 징계 경감 문제로 논란을 빚어온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을 전략 비례대표로 공천한 전 통합진보당과 이후 재편된 정의당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피해자 지지모임이 제기한 의혹을 부인해온 정진후 전 의원은 최근에는 경기교육감 선거 출마의사를 밝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4. 걸림돌들, 침묵과 개별화 그리고 아웃소싱
“2차 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얘기를 했었는데, 남성 조합원이 다수인 금속노조의 경우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는 있다. 하지만 더 깊은 고민을 위해 토론을 해야 하는데 발언을 조심하다보니 스스로 묻고 싶은 것을 꽁꽁 숨겨두는 경우가 있다.” – 금속노조 김은혜 여성부장
“성평등한 문화는 사회나 인식의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 그러나 그간 반성폭력 운동은 사건 해결에 치중된 측면이 있다. 그래서 당사자가 아닐 경우 말하기도 어렵고, 토론에 참여하기 어려운 면이 존재했다. 또 그 과정이 오래되다 보니 말하기 어려운 문화가 형성돼 있다. 제소나 사건화의 방식이 아니더라도 다른 말하기와 문제제기의 방법이 필요하다.” – 사회변혁노동자당 여성사업팀 홍미희 씨
여성활동가들은 그동안 반성폭력 운동 과정에서 잘못 형성된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도 컸다. 특히 2차가해에 대한 오해나 왜곡으로 인해 침묵하는 문화가 형성되는 등 다시 적극적으로 토론 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외에도 피해 사건이 개별적으로 진행되면서 모두가 각계 전투하며 고전하고 있다는 문제의식도 있었다. 반성폭력 운동이 매뉴얼화되거나 여성만의 운동으로 고착화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성폭력 문제는 매뉴얼화되고 개별적으로 대책위나 여성위원회로 성폭력 문제를 아웃소싱해버리는 문제가 있다. 성폭력을 공동체 문제로 생각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한다.” – 반다 J성폭력공동대책위 위원장
반성폭력 운동을 위한 노력들은?
운동사회는 100인위 사건을 계기로 자체 내규와 여성 사업 등을 통해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응과 예방에 힘썼다. 대표적으로 금속노조는 2001년 민주노총 가맹조직 중 가장 먼저 ‘성폭력 예방과 근절을 위한 규정’을 도입했다. 100인위의 폭로 직후였다. 이후 민주노총과 산별 노조들은 성폭력 관련 내규를 만들어 성폭력을 정의하고,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처리 원칙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지침을 명시했다. 사회단체나 정치단체들도 이즈음 반성폭력 규약을 도입했다. 더불어 2003년 여성할당제도 신설되면서 성평등 문화 실현을 위한 운동의 앞날은 밝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반성폭력 운동의 침체가 계속되고 있다. 여성 이슈가 대중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지만, 여성사업 자체에 힘이 실리기도 쉽지 않다. 예를들어, 여성조합원이 40% 가까이 되는 공공운수노조도 이렇다 할 여성사업이 없다. 최보희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여성위원회라는 틀 속에서 형식적으로 여성사업이 진행되다보니 상당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며 “담당자 배치도 없고 예산 배정에서도 밀리는 등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시민단체에서는 대표적인 곳들도 반성폭력 관련 규정이 없는 경우가 상당했다. 한 환경단체의 관계자는 “수평적인 조직문화와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믿고 간다”고 했다. 모 시민단체의 활동가는 “반성폭력 내규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조직의 회원 구성 자체가 워낙 다양해 성평등 이슈에 보수적인 회원들도 적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모 인권단체나 모 문화단체의 경우 반성폭력 관련 내규가 있지만 5년 이상 개정되지 않았다.
더 많은 말과 더 많은 연대
반성폭력 운동 활동가들은 현재의 침체와 백래시를 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시 폭넓은 연대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회변혁노동자당 여성사업팀 홍미희 씨는 “연대 경험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100인위 이후 여성운동이 침체된 과정이 있고, 다시 미투로 제기되고 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자도생 하지 않았나. 개별사건에 대한 공동대책위는 있었는데, 100인위처럼 큰 흐름의 연대는 보기 드물다”고 지적한다. 성폭력 사건을 제소한 한 피해자는 “가해자를 옹호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 대책위만이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의 일상이 가해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일그러지는 게 두렵다”며 “더 많은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의 중요성과 실천도 강조된다.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은 “주체들의 역량 강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여성주의 교육을 그래서 강화해 왔는데 민주노총 현장 조직에 여성주의 활동가가 생기면 조직이 많이 변할 것 같다. 캐나다, 덴마크 노조나 페미니즘 교육을 일년 내내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노총은 이외에도 성평등 단협과 교섭 등의 시도를 준비하고 있다.
성평등 문화를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반다 J성폭력공대위 위원장은 “성폭력에 대한 대응이 성차별 구조를 해체하는 것의 일부이지만 운동사회 내부의 성차별 구조나 젠더 위계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정체돼 있었던 것 같다”고 지적한다. 이소희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도 “노동조합이나 정당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매뉴얼에 따라 처리하기는 하지만 공동체에서 왜 지속적으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점검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다”며 “공동체안에 공동의 감각과 문화를 점검하고 토론할 수 있는 워크북을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워커스 40호]
[각주]
1) 운동사회내 가부장성과 권위주의 철폐를 위한 여성활동가모임의 ‘컵 깨기 취지문’ 중
2) http://go.jinbo.net
3) 엄혜진, 운동사회 성폭력 의제화의 의의와 쟁점, 페미니즘연구 제9권 1호, 2009
4) 백래시(Backlash, 반격)는 사회적 진보, 변화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의미한다. 1991년 미국 여성학자 수전 팔루디가 로널드 레이건의 신보수주의 시대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적 공격을 백래시라고 부르며 사용되고 있다.
5) https://www.facebook.com/scatv567/posts/747286805370683
<언중위 서울 제2중재부 조정을갈음하는결정(직권조정안)>
가. 제목 : 『노동자연대 성폭력 사건』 관련 반론보도
나. 본문 : 본 신문은 2018년 3월 4일자 『운동사회의 미투, 들리십니까』 제목의 기사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대한 내용을 다루며 노동자연대가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 논란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에 대해 노동자연대는 “해당 성폭력 사건은 제3자가 피해자에게 휴대전화로 음란 동영상을 보여주는 자리에 노동자연대 회원이 같이 있으면서도 말리지 않아 방조한 사건으로서 해당 회원은 노동자연대로부터 징계를 받은 후 탈퇴하였고, 노동자연대가 당사자가 되어 피해자에게 거액의 민사소송을 진행하여 2차 가해를 한 사실이 없다”라는 입장을 밝혀 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