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2월 19일, ‘연희단거리패’의 이윤택 씨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겠다며 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피해 당사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제 죄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포함해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말하면서도 “성폭행은 인정할 수 없다. 만일 법적 절차가 강행된다면 성실히 수사에 임하겠다”며 이율배반적인 발언을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는 무엇을 사과한다는 것인가. 그는 뒤이어 이렇게 말한다.
“18년 가까이 진행된 관행이다. 관습적으로 생겨난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 나쁜 죄인지 모르고 저질렀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
즉, 그는 성폭행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지만 자신이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 후 같은 극단의 한 남성 배우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더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한다. #metoo 운동을 통해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에 대한 고발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연희단 거리패는 어떻게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대책회의를 열었고, 심지어 기자회견 상황까지 연습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과문과 고발 내용을 대본 삼아 대사를 수정하고 불쌍한 표정을 연습했다.
성별을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십여 년 가까이 계속돼 온 성폭력과 은폐에 공모해왔다. 그리고 이윤택은 그것을 ‘관행’이라고 표현했다. 성폭력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지만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윤택의 말은 이 잔인한 ‘관행’을 유지시켜 온 잘못된 인식이 무엇에 기인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폭력의 과정을 그저 누군가의 욕망 해소로 이해해 온 것, 때문에 설령 누군가가 억지로 그 일에 동원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극단을 위해 잠시 참고 견뎌야 할 관행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욕망을 탓한다.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폭력 사건이 드러나면 쉽게 ‘성기를 잘라버려야 한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소위 ‘화학적 거세’라고 불리는 ‘성충동 약물 치료’가 처벌의 일환으로 시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욕망은 오히려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욕망을 탓함으로써 폭력은 ‘실수’가 되고, 가해자와 그가 속한 집단 권력 구조의 문제는 쉽게 그 테두리를 빠져나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는 피해자의 욕망 또한 상호작용했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가해자는 ‘욕망을 참지 못한 실수’에 대한 자기연민과 주변의 이해를 획득하는 반면, 피해자는 자신에게는 그런 욕망이 없었음을 증명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역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핑계가 가리는 권력 구조의 문제
한편 영화 <연애담>의 감독 이현주의 사례에서는 이 욕망을 해석하는 사법체계의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실제 많은 경우 동성 간 성폭력은 성적지향에 상관없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성폭력을 성애에 따른 성적 욕망의 문제로 전제해 동성 간 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동성애자가 아니면 동성 간 성행위를 할 리가 없다’는 강한 전제는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나 피해자에게 자신의 성적지향에 대해 방어하거나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동의 없이 진행된 성관계의 폭력인데, 피해자는 자신의 성적지향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러한 인식이 이현주 감독 사건 대법원 재판부의 판결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남자친구가 있고 주변 사람들도 그를 동성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성적접촉을 했을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현주 감독의 입장문에 따르면 판사가 “혹시라도 무죄를 선고하게 되면 피해자를 동성애자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오히려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만약에 피해자에게 남자친구가 없고 주변 사람들이 피해자의 성적지향을 ‘자신의 판단에 의거해’ 증명해 줄 수 없었다면 피해자는 피해를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인가? 피해자를 동성애자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왜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되는가? 이 질문을 통해서 재판부는 오히려 동의 없는 성관계에 대한 피해 주장의 중요성을 가리고 특정한 피해자상을 요구하는 문제를 저지르고 있다. 이현주 감독은 입장문에서 그 역시 판사로부터 ‘동성애자는 무조건 벗은 여자를 보면 좋은 것이 아니냐’ ‘성관계를 할 때 어떤 포지션이냐, 어떤 성행위를 하느냐, 어떻게 만족하느냐’ ‘당신이 남자가 아니란 걸 증명하라’라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질문들 또한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군형법 92조의 6을 다룰 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른 조항을 적용해 성폭력을 충분히 다룰 수 있음에도 ‘남자 동성애자의 행위’로 간주되는 특정 행위에 대한 조항을 별도로 다룸으로써 피해자인 동성애자 군인이 오히려 가해자가 돼버리거나, 함께 처벌을 받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을 단지 성애의 문제로, 욕망의 문제로 다루는 태도들이 오히려 폭력을 폭력으로서 다룰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metoo를 통해 지금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것은, 성폭력은 가해자 개인의 성욕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폭력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권력 구조의 문제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그 구조를 성찰하지 않고 욕망의 문제로 화살의 끝을 돌리는 이상 우리는 누구라도 그 구조에 공모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욕망이 아니라 폭력의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워커스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