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숙(인권활동가)
‘왜 대구에는 퀴어문화축제가 없지?’ 이 단순한 질문에서 대구퀴어문화축제(이하 퀴어축제)가 태어났다. 질문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사람은 배진교 퀴어축제 조직위원장이다. 대구의 독립영화전용관인 오오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오오극장 건물에는 퀴어 축제의 성과(?)로 2015년 만들어진 대구지역 최초의 성소수자인권단체인 ‘무지개인권연대’ 사무실이 있다. 퀴어축제에 도움을 줬던 문화예술인들이 이번에도 선뜻 사무실 한켠을 내준 덕이다.
그에게 성소수자인권단체도 없는 보수의 아성인 대구에서 어떻게 퀴어축제가 탄생했는지 물었다. 그는 진보신당에서 첫 활동을 시작하면서 회의를 하러 서울에 종종 가곤 했단다. 거기서 퀴어문화축제를 알게 된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대구에는 퀴어축제가 없지? 대구에 성소수자 친구들은 분명히 있는데 퀴어축제가 없다는 게 이상했다. 자신이 속한 진보정당과 단체에 퀴어축제를 제안했다. 10개 단체들이 모여 축제조직위를 꾸렸다. 혐오세력이 걱정된다며 퀴어영화제만 하자는 주변의 조언은 신참내기 활동가인 그의 욕망과 퀴어들의 존재와 삶을 축제로 드러내고 싶은 갈망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2009년 6월 20일, 드디어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최초의 지역 퀴어축제가 개최됐다. 그때부터 퀴어축제가 열린 동성로 CGV 앞까지 우리는 함께 걸어 갔다. CGV영화관은 일제 강점기 지어진 한일극장을 인수해 이름을 바꾸었지만 대구에서는 여전히 ‘한일극장’으로 불린다. 우리가 도착한 때는 평일 저녁인데도 번화가답게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무대 위치와 행진코스를 설명했다. 퀴어축제 첫 회 때는 무대 없이 현수막을 바닥에 깔고 축제를 했단다. 성소수자들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에 있는 퀴어 풍물패 ‘바람소리’에 길놀이도 부탁했다. 그 덕에 지나던 시민들은 흥겨운 축제에 합류했다.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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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니까 축제를 즐긴 시민들이 퀴어축제가 뭔지 모르더라구요. 그저 흥겨운 풍악이 흘러나오니 같이 즐겼던 거예요. 퀴어축제라고 현수막을 붙이고 행진을 했는데도 몰랐던 거지요. 집회신고를 할 때도 경찰이 퀴어라는 말을 처음 듣는 듯, 겨우 받아 적었을 정도니까요.”
축제 분위기가 바뀐 건 2015년 시설관리공단이 퀴어축제 장소 사용을 불허하면서부터다. 이슈가 되자 기독교근본주의자들과 반동성애 혐오세력들이 달려 들었다. 퀴어는 자연과 신의 원리에 반하는 죄악이라고 했다. 혐오세력은 10회째인 올해에도 행진로를 막았다. 하지만 축제참가자들은 비웃듯 빠져나가 거리에 무지개 깃발을 흔들던 장면을, 현장에 있던 나는 잊을 수 없다. 퍼레이드는 대구시청 앞 장애인농성장까지 이어졌다.
소수자들의 연대
우리는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활동가와 함께 무지개 깃발이 연대의 함성을 지르던 대구 시청 앞 농성장에 갔다. 농성 79일째라는데 천막은 깨끗한 새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태풍 덕에 큰돈을 들여 튼튼한 천막으로 바꿨다고 한다. 마침 농성장에는 장애인지역공동체에서 일하는 김정환 활동가가 있었다, 그는 장애인들이 농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권영진 대구시장 때문이라고 했다. 권 시장은 지방선거 때부터 장애인정책을 거부했다. 무엇보다 2017년 합의한 대구시립희망원 문제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대구시는 인권을 유린한 장애인시설의 폐쇄와 탈시설을 위한 예산과 지원체계를 마련하지 않았다. 권 시장이 처음 대구시장이 된 2014년 내세운 장애인정책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 싸움이 길어질 것 같다고 했다. 출근 첫날 농성장을 방문한 권 시장은 대화가 소용없을 거라며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긴 농성을 할 만큼 장애인 운동이 세냐고 물었다. 입을 맞춘 듯 두 활동가는 고개를 저었다. 장애인단체 혼자서는 못한다며 여러 단체들이 농성장을 번갈아가며 지킨다고 했다. 서 활동가는 “대구지역 운동이 소수자운동과 연대하는 풍토”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 활동가는 “보수가 너무 득세하니까 어떻게든 연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절박함 때문”이라며 웃었다.
저항의 뿌리, 10월 항쟁
우리는 농성장을 빠져나와 저항의 뿌리를 더듬어갔다. 보수의 아성에도 기가 눌리지 않는 건 분명 뿌리가 있진 않을까라는 물음 때문이었다. 먼저 복원되지 않은 역사인 대구 10월 항쟁의 장소를 더듬어 갔다. 10월 항쟁은 정부 수립 전인 1946년,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유지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자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굶주린 민중들의 저항이다. 해방 후 쌀 생산량이 늘었음에도 매점매석을 부추긴 미군정의 식량정책을 참을 수 없었다. 변화가 없자, 당시 노동조합의 전국 조직인 ‘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9월 총파업을 결정했다.
10월 1일 대구역 근처 사무실에 ‘남조선총파업대구시 투쟁위원회’ 현판을 떼 내던 경찰에 항의하던 시민 2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대구역으로 나와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하게 싸웠다. 학생들은 대구경찰서에 쫓아가 발포명령 중지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서를 포위했다. 젊은 경찰들이 총을 버리고 시위대에 합류할 정도로 기세도 명분도 높았다. 10월 항쟁은 대구지역 인구 4분의 1이나 참여할 정도의 대규모 항쟁이었다. 미군정의 계엄령 선포로 대구지역의 투쟁은 잠잠해지는 듯 했으나 항쟁은 경북지역 전체로 확산됐다. 미군정의 탄압과 반공주의에 민간인 60명이 희생됐다. 일종의 백래시(backlash, 반발)다. 항쟁은 제주 4.3항쟁으로 이어지고 학살은 확대됐다. 저항이 컸다고 국가폭력이 용서될 수는 없다. 2010년 3월이 돼서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조사위’는 10월 항쟁에 대한 국가책임을 인정했다.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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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경찰이 처음으로 시민을 향해 발포했던 대구역을 지나 민중들이 습격한 대구경찰서(현 대구 중부경찰서)에 도착했다. 대구중부경찰서인 입구엔 표지간판이 있었으나 10월 항쟁에 대한 단 한 줄의 설명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맞은편 ‘대구근대역사관’에 들어갔다. 역사관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이었는데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원형이 잘 보존된 덕에 2003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대구의 근대사를 사진으로 정리한 역사관은 흡사 박정희 기념관 같았다. 당연히 10월 항쟁과 관련된 기록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있는 저항의 기록은 1960년 이승만 정권에 맞선 2.28민주화운동이 전부였다. 정부가 민주당 장면 후보의 강연 참석을 막기 위해 일요일 등교 명령을 내리자 이에 반발한 대구 고교생 1천2백여 명이 벌인 대규모 시위였다.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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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끝판, 재벌
진짜 우리를 더 놀라게 한 건 역사관 구석에 <삼성, 대구에서 성장하다>라는 제목의 전시였다. 1938년 이병철 전 삼성회장이 서문시장에 세운 삼성상회의 역사가 상세히 설명돼 있는 게 아닌가. 시립역사관에 재벌의 역사라니!
이재용과 맞잡은 박근혜의 손, 이재용 구속을 앞두고 삼성반도체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농성장을 부수려 했던 엄마부대 등 친박 세력의 만행이 떠올랐다. 그리고 대구를 보수의 터로 유지시키는 힘이 자본임을 새삼 깨닫는다.
서 활동가는 더 놀라운 걸 보여주겠다며 우리를 삼성 상회 터가 있는 인교동으로 데려갔다. 거의 실물크기에 가까운 삼성상회의 건물모형에 비친 조명은 화려했다. 한국재계 1위다웠고, 화려한 도시의 밤과 잘 어울렸다. 잠깐 들린 칠곡 현대공원 열사묘역과는 너무나 대비됐다. 열사묘역은 대구가 고향이거나 근거지인 여러 민중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현대공원은 숲속에 안치된 듯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의 희생자들인 고 도예종, 고 하재완, 고 여정남, 고 송상진은 볼 때마다 매번 푸르렀다. 젊은 나이에 사형돼서만은 아니겠지. 푸르른 꿈! 그들의 꿈을 생각해본다. 10월 항쟁이후 주춤했던 저항의 뿌리를 이어가려한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더는 반동에 날개를 주지 않도록….[워커스 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