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긴축재정?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은 특유의 어정쩡함이 있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만큼 아리송한 것이 J노믹스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처럼 대놓고 시장친화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동친화적인 것도, 국가주도형 경제정책도 아니다.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 공정성장 등 3대 기치를 말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진행되는 것이 없다. 소득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것도 아니고 최저임금 인상을 두고도 허둥대고, 규제완화를 하면서도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재벌개혁도 하는 둥 마는 둥 공정성장도 말뿐이다. 이런 여러 애매함 가운데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정부의 재정정책을 들 수 있다. 2017년 촛불혁명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재정지출을 매년 경상 GDP 성장률보다 높은 7%씩 늘리고, 공공부문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추경도 했다.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과 혁신 성장을 위해 확장적 재정정책을 구사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재정쟁책은 확장이 아니라 긴축이다. 정부 재정 지출이 수입보다 더 적은 상태를 ‘긴축’이라고 한다면 지금 현재 정확하게 긴축이다. 2017년에 이어 2018년에도 그랬으며, 2019년도에도 긴축정책을 유지할 모양새로 정부 예산을 짰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후 2018년도 정부예산을 7.1% 인상했다. 2019년도 예산은 전년 대비 9% 가량 증가했다. 예산을 다소 크게 편성했지만 세입도 늘였다. 정부는 2019년도 예산안을 총수입 481.3조 원 으로, 총지출은 470.5조 원으로 짰다. 그마저도 국회에서 9300억 원의 예산이 깎였다.
이처럼 예산 자체를 세수가 남도록(흑자 예산) 편성했는데, 여기에 초과세수 문제까지 겹쳐서 나오고 있다. 애초 예상 했던 국세 자연증가분보다 더 많은 세금이 걷혔는데 2017년도에 23.4조 원이 초과로 걷혔고, 2018년 말에는 30조 원이 넘게 초과세수로 걷힐 전망이다. 2년 동안 50조 원이 초과세수로 더 걷힌 것이다. 흑자예산을 짰는데 실제 걷힌 돈이 예상보다 많아 훨씬 더 많이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세금은 어떻게 되는가? 이는 국가재정법 90조에 규정돼 있는데 지방자치단체 지원, 공적자금과 정부 발행 국고채의 원금 상환, 그리고 추경편성 등에 활용된다. 남은 세수로 국채를 상환하는, 즉 국가 빚을 갚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 정책이 바로 긴축이다. 문재인 정부는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현재 긴축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2018년 1/4분기까지 측정한 재정충격지수(재정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를 분석한 결과를 봐도 정부 재정이 긴축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17년 전반적으로 긴축상태에 있다가 2018년 들어서 정부의 이전지출이 급격히 늘면서 다소 호전됐다. 하지만 정부의 예산집행이 상반기에 집중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확장으로 돌아섰다고 보기 어렵다. 미국 연준의 금리정책에 목을 매고 있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도 연준의 금리인상에 따라 마지못해 올리고 있다. 통화도 긴축 상태에 있다.
예산, 쓸 데가 없어서 또 토목공사
정부의 2019년도 예산안은 복지 예산의 최대 규모 증액, 산업 부문 최고 증가율 등을 자랑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다른 시기 평균적인 예산과 큰 대차가 없다. 정부 정책기조가 달라지면 돈의 씀씀이도 달라져야 한다. 박근혜, 이명박 정부 때와 예산 편성에서 두드러진 차이가 없다는 것은 그때와 정부 정책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J노믹스와 초이노믹스가 거의 다르지 않고, 혁신성장이나 창조경제가 사실 다르지 않다.
재정과 관련해 정부는 공급 측의 기술혁신과 규제완화를 통한 생산성 증가를 도모하고(이를 혁신성장이라 부르고 있다), 수요 측의 총수요 진작 (이를 소득주도 성장이라 부른다)과 이를 위한 내수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새 고전학파와 새 케인스주의 경제이론을 모두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뜻대로 되면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기술혁신과 규제완화 같은 혁신을 통한 생산성 증가는 현재까지 없다. 아니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4차 산업혁명 관련 산업의 시장형성 부진으로 (상대적) 과잉투자가 우려돼 이 부문의 구조조정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특히 서비스업의 부진한 생산성을 끌어 올려야 하는데, 끊임없는 자영업 구조조정에도 서비스업 생산성은 오르지 않고 있고 이윤 압박이 심해져 오히려 실업이 확대되고 있다.
수요부분은 더 황망하다. 총수요 진작을 위해 이전 지출을 확대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올려 소비수요를 확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는 언감생심이다. 이 수요 진작이야말로 통화정책에서의 유동성 함정과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다.
정부 지출을 늘려도 가계에서 소비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거나 저축을 확대하고 있다. 가령 매월 아동수당 10만 원 씩 지급해도 대박이 나는 곳은 은행이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10만 원의 아동수당을 장기저축 상품으로 유도해 흡수하고 있다. 특히 금리인상과 더불어 이자비용을 포함한 비소비지출이 증가하고 있다. (저축률은 최근 다소 떨어지고 있지만 연간 평균으로는 여전히 높다.)
그래서 내수로 눈을 돌리라는 케인지언들의 충고를 받아 정부는 내수 확대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런데 내수라는 것이 짜장면 한 그릇 먹던 것을 두 그릇 먹는다고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 대 타던 자동차를 두 대로 늘릴 수도 없다. 돈이 없기 때문 이다. 그래서 가장 대표적이고 손쉬운 내수 진작이 건설이다. 주택, 특히 아파트를 더 짓든가 주택가격을 올리든가 해야 하는데, 부동산 시장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4대강댐, 도로, 철도, 교량과 같은 대형 토목, SOC 사업이다. (사실 이 부분 예산은 지난해에 비해 약간 줄었는데, 국회에서 지역별 SOC 사업을 추가해서 예산이 더 늘어났다.)
정부주도의 대형 토목사업은 불황기 단기 대책으로 소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특히 불황 속 건설경기가 후퇴하고 주요 건설사들의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주도 건설투자 확대는 말려야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조차 아무 곳이나 삽질한다고 경제적인 것은 아니다. 그럴 것이면 그냥 돈을 뿌리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현재 정부 주도의 토목사업(계획)의 문제는 4대강 댐과 같이 사용가치를 확인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사전 영향평가나 운영심사가 필요한 토지개발사업에 사업성 검토도 생략한 채 각종 규제도 면제해 주고 일단 삽질부터 시작하라고 부추긴다. 김천과 진주를 잇는 남부내륙고속철도에는 대통령이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하겠다고 나섰다. 현재 각 지자체에서는 남부내륙철도를 비롯해, 수도권광역급행철(GTX) B노선 등 70조 원 규모의 33개 SOC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요청하고 있다. 정부는 2019년 1월 중에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사업을 확정할 예정이다. 문제는 용인경전철처럼 매년 300~400억 씩 적자가 발생하거나, 평창 올림픽 시설처럼 쓸모없어지는 것들이다. 아무튼, 정부의 이런 판단은 결국 내수 진작이 토지개발, 토목공사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재정, 뿌리부터 바꿔라
통화정책이든 재정정책이든, 새 고전학파든 새 케인스주의든, 장기성장이론은 붕괴했다. 케인스주의적인 재정정책이 단기 대책은 될지언정(지금 현실은 그조차도 어렵다), 불황을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되지 못한다. 줄어든 소비는 불황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충분한 자기파괴를 통해 자본의 이윤율이 개선되고 투자가 확대될 때까지 불황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장주도, 이윤주도 경제체제 아래에서 정부 정책은 지극히 제한적이며, 임금주도 경제라 하더라도 단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런 조건에서도 단기 대책으로나마 국가 재정이 국민의 삶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예산정책이 필요하다. 가령, 지난 2016년 미국 대선 예비후보로 나섰던 버니 샌더스는 사회간접자본 투자, 무상의료, 무상교육, 사회복지, 고용확대 등에 필요한 정부 예산을 10년 동안 16.9조 달러(1경 9천조 원)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고, 이를 법인세, 부자증세, 이자 및 배당세 등 19.8조 달러(2경2천조 원)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엄청난 예산지출과 동시에 더 엄청난 세수 확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샌더스의 이 같은 제안 이후, 미국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도, 이론적으로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이 계획이 실제 일어나면 한편에선, GDP성장률이 증가하고 가계소득 증대와 실업률 저하, 소득불평등이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약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근거가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정부 재정지출의 목표는 소비수요 증가와 같은 소박한 것이 아니라, (특히 현재와 같은 장기 불황기에) 국민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고용안정과 성장을 위해 산업과 생산의 계획과 증대, 사회적 생산을 달성하는 데 둬야 한다. 이윤과 잉여를 사회화하는 조세체계, 즉 사적으로 독점화된 이윤 주도가 아닌 국가와 사회주도 산업체계 및 복지제도와 결합해야 한다. 정부의 재정정책은 이 체계들을 유지 확장하기 위한 역할로 자리매김 돼야 한다.
우리나라는 조세와 사회보장기금 등을 포함한 국민부담률이 27% 수준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 어찌됐든 더 내고 더 써야 하지만 현재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세금을 제대로 쓸 데도 별로 없다. 기껏해야 토건사업 뿐이고 아무리 예산을 짜내도 더 쓸 곳이 없어서 세금을 남겨야 하는 실정이다. 세금인상이 아니라 오히려 세금을 낮춰 돌려줘야 할 판이다.
촛불혁명을 계승했다고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의 재정정책이 박근혜와 이명박 정부의 그것을 답습한다면 소득주도는커녕 세금주도 성장도 안 된다. 최저임금 문제에서 패배한 정부는 이제 경제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재벌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자리매김하는 ‘정치 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아니, 겁을 먹고 재벌의 요구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국민이 요구하는, 노동자와 서민이 희망하는 정부의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재정의 근본과 뿌리부터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투쟁해야 한다. 겁 많은 자여 여기로, 싹 다 불태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