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쫓아내는 사회
3월 하순에 접어들 무렵, 제목 칸에는 ‘우태의 눈물’, 지은이라고 적힌 칸에는 ‘전이수’라고 적힌 세 페이지 분량의 글이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됐다. 네 번째 페이지에는 울고 있는 동생이 그려져 있었다. 이 글은 그림동화를 쓰는 11세 작가가 쓴 것으로, 동생의 생일을 맞아 가족과 외식을 갔다가 ‘노키즈존’이 된 식당에 들어가지 못한 날의 일기다. 마지막 줄에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인용한 문장이 적혀 있다. “아빠! 왜 개와 유대인들은 가게에 들어갈 수 없나요?”
식당 이용을 제지당한 어린이 당사자가 쓴 이 글은 많은 지지와 공감을 얻었지만, 어떤 이들은 어린이 배제를 정당화하는 수사들을 반복했다. 아이들은 시끄러우니 어쩔 수 없다거나 아이들을 통제하지 못한 부모 잘못이라거나, 혹은 아이들이 식당에 갈 권리만 있는 게 아니라 식당 주인이 자기 식당을 마음대로 운영할 권리도 있다거나 하는 식의 말들 말이다. 앞서 지지와 공감을 (그리고 ‘어른’으로서의 ‘반성’을) 표했던 이들이 여기에 반박하는 말들도 보인다. 어린이들이 식당이나 카페 같은 데에 가볼 수 없다면 이런 곳에서의 예절을 어디서 배울 수 있겠느냐는 말들이나 어린이들이 갈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지 않은데 무턱대고 못 오게 하면 안 된다는 말들, 혹은 어린이들을 (종종 인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의 의무라는 말들.
이런 모습을 보며 이 어린이들의 미래를 상상해 본다. 이들이 드디어 어린이가 아니게 되었을 때, 이들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상상해 본다. 청소년이, 혹은 성인이 된 이들의 능력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어디에 가도 좋고 무엇을 해도 좋다고 허락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이다. 어떤 불편함을 누군가를 쫓아낼 수 있는 정당한 이유로 여기는 사회, 혹은 한시적으로는 참아 줄만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그들이―혹은 내가―받아낼 수 있는 허락 말이다.
소수자를 쫓아내는 사회
이 일기보다 조금 앞서 숭실대학교의 소식이 언론 지면에 올랐다. 한 동아리에서 교정에 신입생 환영 플래카드를 걸려고 했다가 학교 측에 제지를 당한 사건이었다. 성소수자 모임에서 제작한 이 플래카드에 ‘성소수자 신입생’을 언급하는 말이 적혀 있다는 이유였다. 학교 측 인사는 불허 이유를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숭실대학교는 지난 2015년에는 성소수자를 주제로 한 영화 상영을 문제 삼아 학생들이 준비한 인권영화제에 강의실 대관을 거부하기도 했다.)
성소수자의 삶을 다루는 행사나 홍보물 게시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성소수자의 입학 금지까지도 서슴지 않는 기독교 대학들을 ‘노퀴어존(No Queer Zone)’이라 불러도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대학만의 문제도, 성소수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동성 연인이 거리에서 손만 잡아도 비난하고 공공연히 무슬림이나 난민을 축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 갖가지 형태를 한 여성혐오가 판치는 사회,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회, 노동자의 일은 노동이므로 쟁의를 통해 경영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지금의 한국이니 말이다.
이런 일들이 노키즈존을 만들고 옹호하는 것과 과연 다른 일일까? 내가 믿는―그리고 사회적으로 주류인―질서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사회에서 제거해도 좋다는, 아니,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들은 모두 조금씩 다른 외양을 가졌을 뿐 태도는 서로 다를 바 없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에게 선택지는 둘 뿐이다. 쫓겨나거나, 스스로를 뜯어고치거나. 당장 ‘어른’이나 ‘정상인’, 혹은 ‘한민족’이 될 수 없다면 쫓겨나는 수밖에 없다. 평등권이나 노동권, 혹은 종교의 자유 같은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2순위나 3순위쯤 되는 입장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역시 자신의 (커다란) 일부를 쫓아내는 일일 뿐이므로, 실은 쫓겨나는 선택지밖에 없는 셈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장이다. 이어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한다. 즉, 권력은 권력자 개인의 것이 아니므로 주권자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위임하고 때로는 회수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절차의 문제가 아니다. 저 국민이라는 것이 뜻이 통일될 수 있는 단일한 집단이라면, 모두가 변치 않는 하나의 질서만을 따라 살 수 있다면, 애초에 민주주의는 필요하지 않다. 개개인이 모두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형태로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이 민주주의이며 그 모두를 억압하는 대신 서로 평등하게 대우하고 토론하고 대화하겠다는 약속이 공화제다. 다시 말해 공공 영역에 누군가가 입장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말하는 일을 차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민주사회의 원리를 부정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발화를 금한다는 말은 그곳이 평등한 학문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기성의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백이다. 어린이들은 아직 공공장소에서의 예의를 알지 못하므로 식당이나 카페에 올 자격이 안 된다는 말은(반대로―‘때로는’보다는 ‘종종’에 가까운 빈도로―어른들이 사회의 질서를 알려 주어야 한다는 말도), 한국에 살고 싶으면 출신지의 문화를 포기하고 한국의 문화를 따라야 한다는 말도, 음란한 말일랑 그만하고 건전한 성 풍속을 지키라는 말도, 괜히 휠체어 타고 길에 나와서 행인들에게 불편을 주지 말라는 말도, 성평등이니 노동존중이니 하는 말로 사회갈등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도, 모두가 같은 고백일 뿐이다. 서로 다른 이들이 토론과 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그저 학문공동체의 일이 아니라 모든 민주적 공동체의 일이므로, 저 모든 말들은 그저 자신이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는 것 같은 고백일 뿐이다.
노키즈존, 노퀴어존, 가부장주의적 집단, 난민반대시위, 농성장 강제철거, 이런 곳들에서 쫓겨나는 것은 단지 몇몇 사람들이 아니다. 이런 곳에서 금지되는 것은 단지 특정한 행위들이 아니다. 여기서 쫓겨나는 것, 여기서 금지되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 평등한 삶 자체,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다. 쫓겨난 우리가 다시 돌아간다면, 그것은 단순히 자리 하나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그곳의 원리와 질서를, 그 공간 자체를 새로이 만들어 내는 일이다.(워커스 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