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제출한 테러방지법을 막으려 진행된 필리버스터는 제1 야당의 중단 결정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더민주당은 법안 통과를 막으려 제법 단호한 태도를 취하더니 결국 투쟁을 포기해, 국회 바깥에서 ‘장외 필리버스터’로 힘을 보탠 시민들의 실망과 분노를 샀다. 제1 야당이 모처럼 싸우러 나서자 대중은 적잖은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더민주당은 결국 ‘역시나’ 당임을 입증하고 만 셈이다. 테러방지법으로 인권이 더 악화되면, 애초에 법안을 통과시킨 여당, 계속 모호한 태도를 보인 국민의당은 물론이고, 투쟁의 칼을 꺼냈다 도로 집어넣은 더민주당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애초에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벌인 이유는 테러방지법을 악법으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제1, 제2 야당인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여당의 입법에 결국 동조하고 만 꼴이 되었다. 테러방지법은 반인권적 행태를 보인 국정원의 시민 감시 권한을 강화하는 등의 독소 조항 때문에 그동안 많은 사람이 반대해 왔다. 왜 하필 지금 집권 여당이 이런 법을 밀어붙이고, 또 주요 야당은 왜 슬그머니 법안 통과를 용인한 것인지 궁금하다.
테러방지법을 처음 선보인 나라는 9.11 테러 직후 ‘애국자법’을 통과시킨 미국이다. 이 법의 통과 이후 미국의 인권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한 예가 국가정보국(NS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밝힌 대로, NSA가 미국 시민은 물론이고 세계 시민을 대상으로 무차별한 도감청을 행한 것이다.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휴대 전화의 통화 내역과 이메일 내용이 검열된 것은 각국의 수반, 유엔 사무총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는 측은 테러 빈발을 이유로 댄다. 하지만 이 법은 별도 목적을 지녔을 공산이 크다.
일부 여당 의원의 최근 발언이 이런 심증을 굳혀 준다.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은 미국에서는 “경찰들이 총을 쏴서 시민이 죽는데 80~90%는 정당하다고 나온다”며, “이런 것이 선진국 공권력이 아닌가” 하고 말했다. 친박의 좌장격인 서청원도 “사법 당국이 기본 질서를 해치는 일부터 해결하지 못하면 IS 테러에도 이길 수 없다”면서 “이것부터 확실히 뽑아 놔야 국제 테러에도 맞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발언은 테러방지법 도입이 대중 집회 등 앞으로 예상되는 사회적 저항을 기본 질서 위해로 간주해 저지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말해 준다.
미국에서 공무 집행 중 경찰이 시민을 쏴 죽여도 정당방위로 인정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경찰 폭력을 허용하는 미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가운데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 OECD 최근 발표에 따르면 미국의 상위 10% 계층은 하위 10%보다 소득이 18.8배나 많다. 이 수치는 OECD 평균(9.6배)의 두 배로서, 경제적 불평등과 경찰 폭력 간의 상관관계를 짐작케 해 준다. 경찰 폭력의 주요 표적은 흑인, 그중에서도 젊은 층이다. 인종 차별로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는 계층이 주로 젊은 흑인이어서 생긴 현상이다. 미국 지배 세력은 테러 대비만이 아니라 불평등 심화에 따른 내부 저항을 꺾으려는 취지에서 애국자법 등을 도입한 것이다.
비슷한 법이 한국에 도입되는 취지도 같다. OECD에 의하면 한국에서 상위 10%의 소득은 하위 10%의 10.1배로 OECD 평균을 훨씬 상회한다. 2012년 말 상위 1%의 소득은 전체 소득의 12.23%로 OECD 3위 수준이고, 상위 10%는 44.87%로 2위 수준이다. 이런 불평등은 최근 들어 더 심해졌고, 추세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불평등이 심화하면 대중이 저항할 공산도 큰 법. 지배 세력으로서는 대비가 필요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자본주의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점이다. 세계 경제는 2008년에는 미국발 금융 위기, 2010년에는 유로존 위기를 맞더니, 지금은 중국을 위시한 신흥 시장 위기와 함께 공황으로 진입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그동안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기대어 버텨 왔으나, 이제는 중국 경제도 위기 조짐을 드러내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이것이 한국의 여당이 테러방지법을 시민 감시용으로 도입하고, 제1, 제2 야당이 못 이기는 체 그런 반인권 법안 통과를 용인한 이유요 배경일 것이다.
한국은 지금 OECD 국가 가운데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하다. 최근 들어 ‘금수저’와 ‘흙수저’를 말하는 ‘수저 계급론’이 나오고, 청년 세대 다수가 ‘3포’, ‘5포’, ‘7포’로 전락했다는 한탄과 함께 ‘헬조선’에 대한 저주가 난무하는 것은 그래서 우연일 수 없다. 테러방지법과 같은 악법의 도입은 이런 상황에서 생겨날 사회적 저항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하는 마당에 민중의 저항이 사그라질 리는 없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선 극심한 계급 투쟁이 진행될 것이다.
강내희
(사)참세상 이사장,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학장 등을 맡고 있으며, 문화연대 고문, 문화과학》 발행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