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 성지훈 기자
[패널 소개]
정찬 – 덕질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은데 알고 보니 <포켓몬스터> 덕후. 유년기부터 청소년 시절을 포켓몬 덕후로 보내고 이후엔 추리 소설 덕후로 전향했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 주는 오리지날 순종 덕후.
현우 – 주황색 풍선을 휘두르던 신화 팬클럽, 신화창조. 지금도 마음 한 켠 오빠들을 위한 자리를 남겨 놓았다. 눈에서 조금 멀어진다고 사랑이 식는 건 아니다. 특히 전진을 좋아한다.
지수 – ‘잡덕’, ‘라이트덕’이다. 다방면에 관심이 있고 분야가 많은 만큼 덕질이라기엔 관심의 깊이가 얕다. 대표적인 오타쿠 문화인 애니메이션과 만화도 좋아하지만 그 역시 ‘덕후’라기엔 미약한 수준.
윤희 – 드라마 덕후. 드라마 <연애시대>는 스무 번도 넘게 봤다. 잠이 안 올 때는 자장가 대신 <연애시대>를 틀어 놓고 잔다. 고교 시절 한자로 표기한 드라마 제목 맞추기가 중국어 시험 문제로 나왔을 때, 드라마 제목을 죄다 알아서 한자를 잘 몰라도 맞출 수 있었다.
윤규 – 고등학교 때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한 것 말고는 딱히 덕질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게임을 잘하지는 않는다. 대학 때 같은 방에 살던 친구가 축구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부럽다고 생각했다.
‘덕통 사고’를 당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다. 집에 가만히 누워 TV를 봤을 뿐인데 난 나도 모르는 새 ‘직캠’을 검색하고 ‘짤방’을 만들고 있었다. 소녀들이 무더기로 101명이나 나오는 프로그램이라길래 나이 어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한다느니, 자본에 포섭된 대중문화가 기형적이고 반인권적인 문화 산업 구조를 만들고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해 주려고 보기 시작한 건데. (정말이다.) 덕통 사고는 늘 그렇듯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이번 청년패널의 주제가 ‘덕질’인 건 내가 이 ‘덕후 짓’을 누군가하고든 나누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아서 그런 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정찬 – 초등학교 5학년 때 포켓몬스터 빵이 엄청나게 인기였어요. 특히 빵을 살 때마다 한 장씩 나오는 포켓몬 스티커가 있었는데 다들 그걸 모으려고 난리였죠. 그게 갖고 싶긴 했는데 용돈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스티커 모으려고 빵을 사는 친구들을 따라가서 빵도 얻어먹고 똑같은 스티커라고 버리는 걸 받아서 모았어요. 중학교 미술 시간 때는 대부분 포켓몬을 그렸던 것 같아요. 다행히 수행 평가 점수는 잘 받았어요.
지수 – 가장 최근에 해 본 덕질은 가수 이승환 씨 공연을 간 거예요. 2014년 한 해 정말 공연을 미친 듯이 따라다녔어요. 한 해 동안 공연을 열 번 넘게 갔으니까 한 달에 한 번 꼴은 간 셈이죠. 단독 콘서트는 물론이고 여러 가수가 나오는 공연에 이승환 씨가 나오기만 해도 갔어요. 후배 뮤지션들과 클럽에서 한 작은 합동 공연 같은 것도 다 따라다녔고요. 음원 순위 높이려고 음원도 밤새 스트리밍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끈기가 부족해서 그런지 1년쯤 지나니까 열기가 많이 식었어요. 지금은 돈도 없어서 따라다니려고 해도 따라다닐 수 없고요.
윤희 –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를 좋아했어요. 부모님이 보는 드라마를 같이 봤는데 부모님도 딱히 보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주 예전부터 드라마를 봤는데, 본 것 중에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드라마는 <첫사랑>, <종이학>이에요. (<첫사랑>은 20년 전, 1996년에 나온 드라마다.) 진짜 ‘덕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이 보기 시작한 건 중고등학교 때. 주말이 되면 친구들하고 노는 것보다 혼자 드라마 보는 걸 더 좋아했어요. 주말엔 하루에 6~7시간씩 드라마만 봤어요.
현우 – 전 신화창조였어요. 주황 공주. 여전히 지금도 마음 한쪽에 오빠들 자리는 남아 있어요. 특히 전진을 좋아했는데, 중학교 1학년 때쯤 만든 인터넷 사이트 아이디, 이메일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요. (지금 주로 사용하는 회사 계정의 이메일 아이디는 다르다. 정체를 숨기고 있다.)
윤규 – 남들보다 그 분야에 정통하거나 깊이가 있어서, 그러니까 어느 정도 전문성이 있어야 덕질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 계속 생각해 봐도 그만큼 열중을 한 일이 없어요. 일부러 굳이 찾자면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했고 특히 ‘마재윤’이라는 게임 선수를 좋아했어요. 대학에 와서는 스타크래프트도 그만큼 좋아하진 않았어요. 고등학교 땐 스타크래프트가 거의 유일한 휴식이었고 재미였는데 대학엔 그것보다 재미있는 게 더 많았거든요.
그렇다. 누구나 살며 한 번쯤은 운명처럼 덕통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이런 기회에 덕밍아웃도 하고. 덕밍아웃은 자고로 자기의 덕력을 자랑하면서 시작하는 법이다. 난 IOI의 짤방을 직접 제작하고 있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이런 짓 하고 있는 걸 편집국장에게 들키면 안 될 텐데.
현우 –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수능 시험을 본 날 신화 숙소에 가서 조용히 문 앞에 앉아 있었어요. 기억으로는 그 숙소가 봉은사 근처였는데 그 주변에 아빠 회사도 있었거든요. 혹시라도 아빠한테 걸리면 머리 다 깎일 수도 있다고 불안해하면서 그래도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종일 가만히 기다렸는데 신화 매니저한테 옷걸이로 맞을 뻔했어요. 집에 좀 가라고. 경비 아저씨한테는 물대포 맞을 뻔했고요. 아저씨랑 매니저 피해서 막 도망 다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저씨랑 매니저가 그러는 게 오빠들이 집에서 나온다는 신호였어요. 힘들긴 했는데 그래도 그날 김동완, 이민우, 앤디 오빠 봐서 괜찮았어요.
윤희 –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 선택을 중국어로 했는데 수행 평가 과제가 한자로 써 놓은 드라마 제목 맞추기였거든요. 솔직히 한자는 정말 잘 몰랐는데 드라마 제목을 죄다 알고 있어서 아는 글자가 한 글자만 있으면 대충 눈치껏 맞출 수 있었어요. 선생님들도 다들 깜짝 놀라셨죠.
정찬 – 여러 버전으로 나온 포켓몬 게임을 전부 다 했죠. 포켓몬 종류도 500마리 정도까지는 모두 외우고 있어요. 이름은 당연하고 모양, 타입, 기술 그런 것들 모두요.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워졌어요. 학교에선 쉬는 시간마다 공책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도 모두 포켓몬과 관련된 거였어요.
윤규 – 전 뭐가 딱히 없는데…. 스타 리그 조 추첨식을 보려고 아픈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경기장에 갔던 게 그나마 가장 열정적이었던 일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날 마재윤 선수랑 어깨가 부딪혔는데 기분이 되게 좋았어요. 지금도 그때 기분은 기억이 나요.
사실 덕후란 일본어 ‘오타쿠’의 변형이다. 지금이야 무언가에 열중하는 일 내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본래는 부정적인 어감이 더 강했다.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회 부적응자란 느낌. 지금이야 일반화된 어휘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하위문화를 즐기는 사람이란 의미가 남아 있다. 덕후와 매니아, 애호가. 뜻은 같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차이, 딱 그만큼.
지수 – MBC에서 하는 <능력자들> 같은 프로그램도 그렇고 ‘덕후’라는 말 자체는 이제 그런 뉘앙스가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하지만 말과는 별개로 서브컬쳐, 하위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경시는 여전하다고 생각해요. 그나마 소위 ‘덕밍아웃’을 하는 연예인들이 많아지면서 그런 취미를 더 이상 쉬쉬하지 않을 정도까지는 오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정찬 – 덕질은 ‘정상적인 사람’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나누는 하나의 구분 기제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굳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10~20대에서 ‘오덕’이라는 말도 있고 그것이 더 진화한 버전인 ‘십덕’도 있잖아요. 그래서 오덕 혹은 십덕들이 하는 지질한 일상이라고 희화화돼 있죠. 예를 들어 “미미짱~ 미미짱~” 하는 장난스러운 말들 속에는 사실 덕질에 대한 경멸도 포함돼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윤희 –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덕질 하는 사람들을 묘사할 때 약간 눈이 퀭하거나 지질하거나 머리가 덥수룩하거나 사회생활 잘 못하거나 얼빠진 모습으로 많이 묘사하는 거 같아요. ‘덕질’이라는 행동 자체도 그렇지만, ‘덕질’의 대상인 하위문화에 대해서도 희화화하거나 경시하는 게 있죠. 예를 들어 피아노나 클래식에 빠진 사람들은 조예가 깊다고 하지 피아노나 클래식 오타쿠라는 말을 하면서 놀리지 않으니까요.
덕질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덕후의 스테레오 타입, 땀 흘리면서 미소녀 애니메이션 보고 두꺼운 안경 쓰고 살찌고 여드름 난 남자애. 이런 건 좀 솔직히 싫지 않나? 아무리 우리가 모두 덕후라고 해도.
지수 – 나도 고등학교 때 안경 쓰고 여드름 나고 통통하고 애니메이션을 종종 보는 여학생이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런 말을 들으면 오히려 짠하네요. 일본 애니메이션도 애니메이션 나름이잖아요. 예를 들어 메카닉물을 즐겨 본다면 별 생각이 없을 것 같긴 해요. 그런데 남자애가 미소녀가 잔뜩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엄청나게 많이 보는 건 아무래도 싫을 것 같네요.
윤희 – 질문 자체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은 뚱뚱하고 땀 많이 나고 여드름이 많을 거라는 편견이 들어 있는 거 같아요. 동시에 뚱뚱하고 땀 많고 여드름 많은 사람에 대해 편견도 동시에 있는 거 같고요. 가장 친한 친구들 중에 3명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요. 그중에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애가 있는데, 중학교 때부터 집에 재봉틀을 사서 코스프레 옷을 만들곤 했거든요.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도 만화 동아리를 했고 현재까지 코믹월드에서 매번 부스를 차리고 물건을 팔아요. 저도 한 번 가 본 적 있는데 신기하고 재밌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일을 벌이고, 모임을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만들고 하는, 그런 일들을 잘 안 하잖아요.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만화를 좋아해서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서 이런 모임을 꾸민다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대학 때 만난 친한 남자 사람 친구들도 일본 애니,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거에 관해 말하면서 그 친구들이 되게 순수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게.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 그래서 거기에 열중하고 노력하는 일이 비하받을 이유는 없다. 사람의 외형이 편견을 조장해서도 안 된다. 취향은 그대로 존중받아야 하고 열광과 노력은 그 자체로 대견한 법이다. 우리는 ‘덕질’을 한다. 유치한 애니메이션을 향한 덕질이든, 아이돌을 향한 덕질이든. 덕질은 대상을 향해 쏟아 낼 수 있는 열광이고 그건 곧 내가 가진 열정의 총량이다. 덕질을 하자. 열정으로 일해서 최저임금도 못 받는 것보단 사랑하는 그 무엇에게 열광적으로 하는 덕질이 더 매력적이지 않나. 그래서 난 얼른 마감하고 IOI 움짤을 만들어야겠다.
윤규 – 전 밋밋한 사람이거든요. 딱히 열광해 본 것도 없고. 그래서 지금 전 매 순간 열광할 것을 찾고 있어요. 그것이 없는 삶만큼 밋밋하고 지루한 삶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게 없으면 자신의 삶에 만족하거나 스스로 당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기도 어렵고요. 가끔 저보다 밋밋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가 있어요. 보통 그런 사람들은 삶에어 열광하는 주제나 내용이 없으니 만나도 먼저 화제를 던지는 법이 없어요. 그렇게 지루한 하루는 힘들죠. 지금은 아직 없지만, 저도 ‘덕질’하고 싶어요.(워커스 8호 2016년 5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