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 성지훈 기자
어쩌면 실패했는지도 모르겠다. 온 매체들이 나서 ‘청년’을 말하는데 정작 아직 청년인 나는 그 말들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가난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만큼 삶에 절망하지는 않았다. 3포 세대라고 이야기하는데 난 살며 다이어트 말고는 딱히 포기한 것이 없다. 더 큰 포부와 이상을 가지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난 소소하게 꿈꾸고 소박하게 이룩하고 싶었다. 청년을 규정하고 수식하는 넘치는 말들 중에 어느 것도 온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청년 패널’은 그래서 기획됐다. 다른 사람들이 멋대로 떠들고 규정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청년의 ‘삶’을 톺아보자는 조금 거창한 기획. 모두 열 번의 대담이 이뤄졌고 고작 열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만큼 솔직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거기 담긴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잘 전달하면 다른 매체들의 말뿐인 청년 담론과는 또 다른 무엇을 건져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실패했는지도 모르겠다. 아홉 번의 대화가 지났고 이제 청년 패널의 마지막 기사를 앞두고도 ‘청년’이 무엇인지 ‘청춘’은 또 뭔지 모르겠다.
정찬 몸은 청년이지만 마음은 노인으로 살아가는 젊은 친구들과 몸은 노인이지만 마음은 젊은 청년 못지않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어르신이 있다면 저는 단연코 후자의 경우가 우리가 추구하는 청년의 상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몸도 젊고 마음도 함께 젊으면 좋겠지만요.
건영 나이를 불문하고 자기 자신과 삶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이 청년의 삶일 거예요. 삶의 방향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청년이겠죠.
현우 청년은 꿈꿀 수 있는 시기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이든 도전하며 실패하기도 하고 때론 아프기도 하면서 각자의 인생에서 빛나는 시기요. 그런데 지금은 꿈꿀 수 없고 때로는 꿈꿀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좀 힘들어요. 실패하면 그대로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사회 구조가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지수 청년은 자기 길을 찾아가는 나이가 아닐까요? 부딪치고 실수하는 것이 용납되는 나이요. 제가 들어 온 ‘청년’은 그런 의미였던 것 같은데 실제로 지금 사회에서 20~30대의 사람들에게 시행착오가 용납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또 한편으로는 청년의 ‘청’ 자가 부담스러워요. 청년이든 청춘이든 푸르고 아름답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잖아요. 그런데 내 청년은 그렇게 푸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청년이나 청춘이란 말보다는 그냥 20대, 30대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아요. 그건 그냥 객관적인 사실이고 어떤 의미가 담기지 않은 말이니까요.
윤희 정신이나 육체가 멈추지 않고 변하는 젊은 사람들을 청년이라 부를 수 있겠죠. 새로운 걸 꿈꾸거나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요. 여러 모로 불안정한 상황이지만 그걸 견딜 수 있고 가끔은 오히려 즐기기도 하는 사람들. 그냥 그런 단편적인 이미지만 떠오르네요. 뭐라 명확한 문장으로 규정하기 어려워요.
지원 꽤 오래 생각해 봤는데 아직도 모르겠어요. 다만 나날이 힘들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죠. 그건 수치가 너무 명확해서 이견의 여지가 없을 거예요.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게 청년일까요?
지우 요즘 저도 이게 가장 궁금해요. 그냥 나이가 어린 사람이 청년일까요?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청년이 ‘힘듦’의 아이콘이 된 것 같아요. 직장이 없고 그래서 돈도 없는, 사고는 깨어 있지만 그것을 실현시키기에 모든 부분에서 부족한 사람들이 청년인 것 같아요. 청년을 막 돋아난 새싹이나 창창한 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이제 그냥 옛날 이야기예요. 청년이란 말 뒤에 오는 말은 항상 부정적인 단어들이거든요. 청년이 아닌 사람들이 청년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부러움의 눈길보다는 애잔하고 안타까운 눈길인 것 같아요.
무엇이 청년인지는 아마 10회가 아니라 100회를 얘기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모양이다. 하지만 입을 모아 하는 말은 하나 있었다. “힘들다.” 무엇이 도대체 그렇게 힘들어서.
지수 내 삶이나 이 사회나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어요. 저는 지금 취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취업만 하면 내 삶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단 취업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그냥 내 삶 전체에 대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살긴 살아야겠지만 앞으로 제 삶은 점점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회에 대해서도 큰 기대감이 없어요. 시민 단체를 후원하든 집회에 나가든 투표를 하든 뭔가 변화가 있을 거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아요. 그냥 내가 시민이고 성인이고 해서 정치적 사회적 책임이 있으니까,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2012년 대선 이후에 이런 체념적인 태도가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이번 총선이 끝나고 희망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전 크게 기대 안 하려고 해요.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그 타격이 클 테니.
정찬 단순히 사회적 편의성의 증가로만 봤을 때는 현재 저희 청년들이 겪는 문제를 의지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부당함, 예를 들어 열정 페이, 결혼 포기, 꿈 포기 같은 말은 이제 더 이상 남의 말이 아니게 됐죠. 물론 어른들은 자신들이 청년이었을 시기에도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느라 꿈 꾸는 일 따위는 못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전후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때 상황에 현재 청년들을 대입하기는 힘들어요. 그런데 힘들다는 말을 그냥 의지 문제로 치부하는 일이 싫어요.
윤희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힘겹죠. 근데 청년뿐 아니라 더 나이 어린 사람들부터 나이먹은 사람들까지 다 힘들지 않나요? 청년이라고 특별히 더 많이 힘든 건지는 모르겠고 그럼에도 청년이 가진 힘듦의 특수성을 생각해 보면 의식을 갖고 자기 인생에서 스스로 선택을 시작하게 되니까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하는 게 힘들죠.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노력, 직업을 갖고 하루하루 버티는 노력 같은. 노력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직업,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데서 오는 좌절이 가장 힘들 거예요.
청년을 규정하고 그들의 힘든 삶을 분석하는 일에 목을 매는 건 그들을 개별의 개체가 아니라 이해하고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그건 꼰대들의 시선이 아니라 청년인 내가 청년인 당신을 보면서 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청년이라는 규정에 얽매일 필요도 없었고 청년 세대는 왜 힘든지 분석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당신의 안부를 물으면 될 일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건영 내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자주 만나면 행복할 거예요. 어쨌든 제가 청년일 동안엔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나와 세상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도출해 보고, 나 이후 세대의 청년들과 만날 준비를 할 거예요.
지우 저의 가치를 찾는다면요. 저는 자존감이 높은 편인데, 요즘 들어 주변의 말에 많이 흔들려요. 저만이 가지고 있는 저의 가치가 지금 이 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해요. 제가 청년일 동안 저의 가치를 찾아내고 싶네요.
윤희 세상에 작은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미래의 행복한 삶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패스! 그래도 이루고 싶은 건 분명히 있어요. 진짜입니다.
정찬 얼마 전에 읽은 신문 기사에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가장 크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어요. 저도 그 연구 결과에 매우 동의해요. 그리고 더불어 제가 원하고자 하는 목표들을 단계별로 성취할 때 정말 짜릿함과 커다란 행복감을 느껴요. 저는 그래서 현재 행복해요.
지수 행복해지고 싶다고 하면 좀 무리고, 일단은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은 종종 죽고 싶다고 생각해요. 내 자신을 버티는 것도 힘겹다 보니 다른 사람과의 관계 유지도 힘들고요. 지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또 신체적으로도 튼튼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주위 사람들을 지치지 않게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겠죠.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싶어요. 내가 뭘 잘하고 뭘 좋아하고 뭘 할 때 행복한지 정확히 알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게 보일 만큼이요.
열 번의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뒷풀이를 약속했다. 세대 담론이니 청년의 고통이니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모였지만 우리는 사실 그런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연애 이야기에 환호했고 자기의 덕력을 과시하느라 신났다. 우울한 돈 얘기를 하다가 막막한 취업 얘기를 했다. 찌질한 연애를 고백했고 속상했던 가족 얘기도 했다. 그렇게 돌이켜 보니 청년 패널은 ‘대담’보다는 ‘수다’에 가까웠다. ‘청년으로서 앞으로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던 마지막 대화에서도 우리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다만 우리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 이런 이야기들을 하자고 했고 그땐 밋밋하게 말고 술을 마시면서 하자고 했다.
청년의 삶이 뭔지 우리 몇몇이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나. 그래서 그냥 우리는 살아 보기로 했다. 10주나 지지고 볶았던 ‘청년 패널’의 결론은 그렇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살아 볼래요”
워커스10호 (201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