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성지훈 기자
[패널 소개]
정찬
한 달을 30만 원으로 ‘버텨 내는’ 알뜰한 남자. 등록금을 아끼기 위해 대학 4년 내내 전액 장학금을 받은 생계형 우등생. 대학원생이지만 책도 잘 안 산다. 책은 원래 빌려 보는 것. 가난이 싫지만 그렇다고 돈 버느라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돈이 많이 생기면 무엇보다 전 세계 모든 나라를 여행하고 싶다.
건영
독립 영화 현장에서 일한다. 일은 많지만 버는 돈은 별로 없다. 다행히 아직 부모님 집에 얹혀살아서 주거비는 아끼고 있다. 한 달에 보통 50~60만 원의 생활비가 든다. 그중 식비가 절반이다. 엥겔지수를 놓고 보면 청년패널 중 가장 가난하지만 많이 먹어서 그런 건 아니다. 생활비는 과외 같은 알바로 충당.
현우
“지금 하는 일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래선지 박봉에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일은 줄이고 싶다. 일은 돈을 많이 주든 적게 주든 최대한 적게 하고 싶은 법이다. 돈을 많이 번다면 무용을 배우고 싶다.
지우
대학 2학년, 청년패널 막내.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가치관에 맞는 삶을 살고 싶다. 숙식 같은 기본적인 생활비는 아직 부모님의 경제력에 기대고 있지만 유흥비만은 자기가 벌어서 쓴다는 자립형 유흥인.
윤희
술 취해서 객기로 그날 술자리를 다 계산해 본 적이 있다. 당시엔 호기로웠지만 다음 날 술이 깨고선 친구들에게 일일이 입금하라고 문자를 보내야 했다. 삼겹살이 먹고 싶었지만 돈이 부족해 싼 앞다릿살을 구워 먹기도 했다. (앞다릿살은 구이용이 아니다. 질기다.) 수입이 없는 취준생이라 부모님에게 용돈을 보내 달라는 전화를 할 때가 가장 싫다.
‘경제’는 늘 어렵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애들이 선택 과목으로 경제를 골랐던 것 같다. 신문을 볼 때도 경제면은 슬쩍슬쩍 넘어간다. 그러나 정치고 사회고 하다못해 연예면을 봐도 결론은 경제다. 경제 논리, 경제 정책, 경제학적 분석 등등. 모두가 어려운 말로 경제를 이야기하지만 그거 사실 ‘돈’ 얘기 아닌가. 먹고사는 이야기, 갖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 갖고 싶은 걸 못 가져서 서러웠던 이야기. 이번 청년패널의 대화는 ‘돈’ 얘기다. 어려운 ‘경제’ 말고. 더 간단하고 직접적이지만 그래서 더 어렵고 조심스러운 이야기들.
정찬 한 달 사는 데 대략 30만 원 정도 들어요. 학부 때는 한 달에 15만 원 정도로 생활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진 거죠. 평균치이기 때문에 30만 원보다 더 드는 때도 있지만 보통 30만 원 이내로 생활하려고 노력해요. 핸드폰 요금 4만 원, 교통비 6만 원, 데이트하고 사람들 만나는 데 15만 원 정도가 들어요. 책을 사거나 필요한 물건을 사는 건 나머지 5만 원 정도로 해결하고요. 재정 상황이 꽤 어렵다 싶을 때는 사람 만나는 걸 줄이거나 책을 사지 않아요. 사실 대학원생인데 책 구입 비용이 많은 편은 아니죠.
지우 전 매달 60만 원 정도를 쓰는 것 같아요. 거의 매끼를 밖에서 사 먹기 때문에 식비만 25만 원 정도가 들고 교통비도 10만 원 정도 써요. 자취를 하지만 식비와 교통비, 집에 드는 비용까지 기본적인 생활비는 부모님이 부담해 주세요. 그 외에 쇼핑을 하거나 유흥비(!), 가끔 구입하는 생필품 등에 30만 원 정도를 쓰는데 이건 과외해서 번 돈으로 충당해요.
현우 차비하고 식비, 통신비 같은 기본적인 것들에 적금도 조금씩 들고 있어요. 아껴 쓰지만 그래도 한 달에 100만 원 정도는 드는 것 같네요.
윤희 월세 45만 원이 가장 큰 지출이에요. 그 외 생활비로는 50만 원 정도를 쓰고요. 학원비로도 20만 원을 매달 쓰고 있어요. 생활비 중에선 역시 식비가 가장 크고 그 외에 통신비, 교통비가 들고, 가끔 옷이나 책을 사요. 다른 사람들하고 비슷해요. 그리고 이 모든 돈은 부모님이 받는 월급에서 나옵니다.
건영 다행히 부모님께 얹혀살기 때문에 50만 원 정도면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해요. 10~15만 원의 교통비에 10만 원 이내의 통신비, 식비 20~25만 원 정도요, 남은 돈 5~10만 원 정도로 생필품, 학습비, 여가 비용을 다 충당해요. 어쩌다 갑자기 돈이 필요하면 식비를 줄여요. 돈이 없어 서러웠던 적은 없지만 앞으로 서러워질 일이 생길 것 같아 두렵죠.
지우 저도 아직 학생이라 부모님 의존이 커요. 특히 식비와 교통비를 부모님이 주신 신용 카드로 쓰는데, 맨날 집에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엄마가 화가 많이 나셔서…. 그때 당분간 신용 카드 사용 금지령이 떨어져서 3일 정도 학교 생협(매점)에 모아 놓은 적립금으로 밥을 해결했어요. 그래도 유흥비는 알바해서 번 돈으로 씁니다.
정찬 저는 학부 때부터 생활비를 벌어서 쓰느라 늘 학생 식당에서만 밥을 먹었죠. 학생 식당에서 나온 1800원짜리 백반을 거의 매번 먹었고, 조금 사치를 부리는 날엔 2500원짜리 양식 돈가스를 먹었어요. 그래야 제 생활비 범위 내에서 사용할 수 있었어요. 친구들이 학교 밖에서 점심 먹자고 할 때도 꿋꿋이 학생 식당에서 먹었어요. 사실 욕을 많이 먹었을 텐데, 사 주지 않는 거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한 경우가 많아 부모님의 경제적 원조를 받는 경우가 많다. 정찬은 학부 때부터 생활비를 벌어 생활했지만 그것도 ‘주거비’ 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럼 돈 때문에 절박함이나 수치심 같은 걸 느껴 보진 못하지 않았을까?
윤희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걸 못 한 적은 많았지만 기억에 남을 만큼 수치스럽거나 절박했던 적은 없어요. 고작해야 지질했던 기억 정도? 삼겹살이 먹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앞다릿살 사다 구워 먹었거든요. 술 먹고 호기롭게 다 계산했다가 다음 날 일일이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술값 돌려받은 적도 있고.
현우 전 돈이 없어 서러웠던 기억이 있는데, 독일에서 공부할 때 환율이 1400원에서 2200원까지 올랐어요.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들어왔죠. 주변에 친구들은 힘들다고 하면서도 남았는데 저만 들어왔거든요. 그때 너무 서러웠어요. 왜 나만 들어가야 하는지. 지금도 ‘독일에서 공부를 끝냈다면 지금쯤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요.
정찬 여자 친구가 결혼하자는 말을 몇 년 전부터 했어요. 남녀 관계에서 일종의 프러포즈를 여자가 먼저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근데 진짜 돈이 없으니까요…. 계속 여자 친구한테 현실적인 논리를 대면서 연기하는 일이 제일 싫어요. 솔직히 남자로서도 정말 계속해서 미루고 미뤄야 하니 체면도 말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미안했어요.
건영 돈이 절박하고 없어서 비참했던 적은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학생이어서 교통비를 아끼려고 한두 정거장쯤은 걸어 다니고, 식비 줄이려 끼니를 대충 때우는 정도가 전부예요. 하지만 앞으로가 두렵죠. 언제까지나 부모님께 기대 살 수는 없으니까요. 최근에 과외비가 늦게 들어와 전전긍긍하다가 학부모에게 돈 달라는 전화를 걸 때 조금 슬펐어요.
어쩌면 돈이 없어서 느끼는 절박함 같은 건 가난의 정도와는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경쟁하듯 가난을 증명하고 과시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하려면 어쨌든 돈이 있어야 하는 세상’에서 욕망이 있다는 것은 늘 크고 작은 결핍을 지고 살 수밖에 없는 일이겠다. 본래 “한국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려면 한 달에 얼마나 벌어야 할까” 같은 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표준’을 알아보고 싶었던 거다. 고백하건대 그들이 생각하는 ‘표준 생계비’를 기준 삼아 엄혹한 생활을 아느니 모르느니 하는 말을 하려고 했다. 조금 부끄럽게도.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뭐든 할 수 있을 만큼 돈이 갑자기 많이 생기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현우 혹시라도 그만큼 돈이 생긴다면 독일에 집을 구하고 다시 유학 가고 싶어요. 마치지 못했던 공부를 다시 할 거예요. 그리고 세계 일주 여행. 돈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여행을 하고 싶어요. 유명한 공연을 보고, 축구 경기도 많이 보고요. 마지막으로 첼로와 무용을 배우고 싶네요.
윤희 저도 여행이 무조건 1순위예요. 그리고 집을 마련해서 친구들하고 같이 살고 싶어요. 최근에 〈바닷마을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봤는데 나중에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홈 쉐어링 형태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 그동안 받은 용돈을 갚고 싶고, 애인이 사는 방을 좀 더 큰 곳으로 옮겨 주고 싶어요. 그렇게 돈을 다 쓰고 나머지는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싶어요.
건영 전 일단 영화를 하나 찍고… 큰 건물을 하나 살래요. 건물을 사면 거기서 나온 수익으로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정찬 우선 전 제 명의로 된 집부터 사고 싶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고 싶어요. 집을 사고 지금 여자 친구랑 결혼식을 재빨리 올리고 신혼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요. 그리고 결혼 전이든 직후든 제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요. 단순히 몇 개 국가가 아니라 정말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 국가를 가고 싶어요. 천문학적인 돈이라면 직업도 없이 여행만 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얼마 전에 큰맘 먹고 홍콩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제가 정말 여행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우 천문학적인 돈에 대한 욕심은 사실 없어서 감이 잘 안 오지만, 만약 그렇게 큰돈이 생긴다면… 남북통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소를 몇천 마리 보낸다든가. 그리고도 돈이 남는다면 사람들과 모여 문예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돈이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은 곧 지금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못 하는 일’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혹은 그게 얼마나 절박하고 다급한지 여부를 떠나. 질문의 의도는 각자가 가진 욕망이 무엇인지, 그 욕망을 ‘돈’이 어떻게 가로막고 있는지를 얘기해 보자는 것이었다. 개개의 욕망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저마다 느끼는 결핍의 정도도 다르다. (그럼에도 돈이 생기면 ‘일단 빚부터 갚고 싶었던’ 기자는 이 대답들이 조금 태평하다고 느끼기는 했다.) ‘돈’이라는 제약이 없어졌을 때 여행이나 공부, 결혼, 영화에 대북 지원까지 온갖 바람들이 튀어나왔다. 상상으로나 넘을 수 있는 ‘돈’의 장벽. 다시 현실로 돌아와 앞으로 이 욕망과 현실의 간극을 어떻게 채워 갈 건지 물었다.
건영 부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다만 미래가 아득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이었으면 좋겠어요. 삶이 여유로워지면 바랄 것이 없겠고, 적어도 지금보다 힘들어지지 않았으면 해요.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 하루하루 발전할 수 있으면 좋겠고 그렇게 발전한 내가 제공한 노동력만큼 정당하게 돈을 벌었으면 좋겠어요.
지우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거의 없어요.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가치관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겠죠. 그래도 저도 종종 ‘돈이 아주아주 많았으면’ 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쇼핑할 때요. 부자들은 세일하지 않는 것들도 그냥 살 수 있겠죠?
정찬 제 친구들이나 대부분의 사람은 말로는 저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다고 하지만 실제론 좋아하는 걸 포기하고 대부분 돈을 많이 주는 대기업,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해 주는 공무원이 되려고 해요. 물론 저도 돈이 많으면 좋죠. 하지만 그 친구들처럼 제 앞길에 대한 선택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게 큰 차이라고 생각해요. 돈을 잘 벌면서 편하게 살고 싶은 건 당연한 욕구지만, 그렇다고 남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부자가 되려고 허겁지겁 살고 싶지는 않아요.
현우 앞으로도 이렇게 비슷하게 살 것 같아요. 제가 하는 일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제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이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현우는 기독교 선교 단체에서 일한다.) 하고 싶은 일을 소중하게 하고 번 만큼 소박하게 살 거예요. 가끔 ‘독일에 있었다면’ 하고 아쉬워하기도 하면서요.
어느 누구도 “돈만 벌면 되니 아귀처럼 돈을 벌 거”라고 말하진 않을 테다. 마찬가지로 오늘 죽지 않을 밥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하지도 않을 거다. 법정 스님도 아니고. 모두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했고, 돈이 없어서 그걸 못 한다고 아쉬워했고, 그럼에도 견딜 만하니까 더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돈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팔아야 할 만큼 가난해지고 싶지 않다고 했고 또 남을 살만큼 부유해지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그게 아직 세상 모르는 어린 청년들의 순진하거나 순박한 소리라고 여겨도 괜찮다. 가급적이면 오늘 대화에서 나온 생각들이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