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인권영화제, ‘핑크 워싱’ 하는 이스라엘 다큐 보이콧
중동 언론에도 회자…국내 영화제 동참 잇따를 듯
정은희 기자
서울인권영화제가 국내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에 반대하며 해당 다큐멘터리 상영을 전격 취소했다. 한국퀴어영화제도 연대하기로 하면서 보이콧 움직임이 커질 조짐이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제3의 성(Third Person)>(2015)을 21회 상영작으로 내정했으나 최근 취소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차별 반대에 문화 창작물도 공모한다고 보고 이에 반대하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서 3월 31일 영화제는 배급사 고투필름(Go 2 Films)에 “서울인권영화제는 영화제일 뿐 아니라 인권운동 단체로 우리는 BDS 운동(Boycott, Divestment and Sanctions Movement, 보이콧, 투자 철회, 제재)에 동참하기로 했다”고 상영 취소 의견을 전달했다.
<제3의 성>은 성소수자인 인터섹스(intersex)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작품이다. 소수자 인권 영화/다큐멘터리 중 인터섹슈얼 정체성을 다루는 작품이 드물어 애초 인권 영화 운동계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작 지원처가 이스라엘 정부의 점령 정책에 관련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초청 대상에서 제외됐다.
영화제에 따르면, 실제 이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처는 이스라엘 내셔널 로터리, 코프로 재단, 게셔 재단으로 이스라엘 정부의 외교, 문화, 군사 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내셔널 로터리는 이스라엘 정부가 관할하는 복권 사업 기관이며, 코프로 재단은 이스라엘 외교부의 지원을 받아 자국 영화 제작과 해외 진출을 지원한다. 게셔 재단은 영화 제작 지원 사업을 운영하는 기관으로 ‘유대주의 비전’ 아래 이스라엘을 ‘유대인 국가이자 민주 국가’로 홍보한다는 사업 목표를 홈페이지에 명시할 정도로 차별 노선을 당당히 밝혔다. 현재 비유대계는 이스라엘 인구의 20%가 넘는다. 이 기관은 이스라엘 군(IDF)에 장교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BDS가 아파르트헤이트보다 심한 범죄”
서울인권영화제가 <제3의 성> 상영 취소 결정을 내리자 영화 배급사와 제작사는 BDS 운동에 대한 비난과 함께 이 결정이 잘못됐다고 수차례 항의했다. 영화제에 따르면, 배급사 담당자는 “팔레스타인이 여성, 퀴어,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루는지 아는가?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것은 퀴어나 여성 인권에 반하는 행위”라고 밝혔다. 영화제에 따르면, 심지어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도 영화제에 전화해 재차 결정 재고를 요구했고 공관 차석과의 회의도 제안했다. 4월 11일에는 영화제에 이메일로 “BDS는 아파르트헤이트보다 더 심한 범죄 행위”라고 명시된 영문 기사를 첨부하기도 했다.
이 같은 입장에 대해 서울인권영화제는 “우리의 BDS 운동은 창작자 개인의 정체성(시민권, 인종, 젠더, 종교 등)에 근거한 보이콧이 아니라 그 창작물이 생산되고 지원, 지지를 받는 권력 구조에 주목한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인권영화제의 이 같은 행동은 히브리어 이스라엘 신문이 보도하면서 이스라엘 내에도 알려졌다. 또 아랍어권 언론 <아랍 48>도 보도하면서 세계 BDS 운동 내에 공유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점령 문제 흐리는 핑크 워싱
서울인권영화제의 <제3의 성> 상영 취소 결정은 이스라엘이 국제법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본권을 존중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조직된 BDS 운동에 대한 연대 행동이다. BDS 운동은 2005년 팔레스타인 시민 사회가 ‘팔레스타인 BDS 민족위원회’를 발족하여 현재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특히 이번 결정은 BDS 중에서도 학술, 문화 분야 보이콧의 일환이자, 이스라엘 정부의 소위 ‘핑크 워싱’에 반대하는 행동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핑크(분홍)’와 ‘화이트 워싱(백색 칠)’이 혼합된 이 말은 마케팅이나 정치 전략의 목적으로 성소수자에 친화적인 언사를 동원해 이 이미지를 빌리려는 기법이다. 그동안 이스라엘 정부는 ‘문화 다양성을 장려하는 민주 국가’라는 이미지를 유포하기 위해 각국 대사관을 동원해 중동에서 유일하게 성소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라고 선전해 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자국 문화 창작품 제작, 배급 과정에 매우 구체적으로 개입해 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영화제에 따르면, 일례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은 그동안 한국의 몇몇 영화제에 이스라엘 영화 추천 목록을 보내고 행사 진행비 부담까지 약속해 왔다. 또 이스라엘 예술인이 자국 외교부 지원을 받으려면 “이스라엘 정책상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계약서에 서명해야 지원 받을 수 있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이 같은 핑크 워싱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점령하고 차별하는 문제를 흐리며 점령국의 불법적, 비인도적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이스라엘의 허울이자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정작 이스라엘 사회 내 성소수자 정책도 선진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말뿐인 핑크 워싱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스라엘 관광부는 자국 LGBTQ* 커뮤니티에 지원하는 금액의 10배에 달하는 290만 달러를 ‘핑크 워싱’을 위한 대외 홍보비로 지출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회 성소수자들이 자국 정부의 핑크 워싱을 비판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뿐 아니라 서구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여성, LGBTQ에 중요하다며 이스라엘의 핑크 워싱에 동조해 왔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일체 받지 않는다는 활동 방침을 고수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길을 걸어와 더욱 BDS 운동에 적극적이라고 한다. 영화제는 자체 보이콧 선언뿐 아니라 한국과 해외 모든 영화제에 BDS 운동 동참을 요청해 한국 퀴어영화제의 동참도 이끌어 냈다.
레고 서울인권영화제 상임 활동가는 “다양한 인권 영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권 영화는 제작 구조의 문제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특히 특정 구조 속에서 생산된 작품이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가린다면 이 작품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위, 아래 이미지 : 미국 다큐멘터리 <핑크워싱> 스틸컷. 서울인권영화제 상영작(출처: 서울인권영화제)
“팔레스타인 평화운동에 힘 되는 사건”
이번 서울인권영화제 이스라엘 ‘핑크워싱’ 보이콧은 국내 평화운동 단체 팔레스타인평화연대도 함께하고 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는 2년 전 BDS 운동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특별전 논란이 된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EIDF)에 대해 국내 영화인들의 보이콧 운동을 이끌어 내 이를 취소시킨 바 있다. 현대중공업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이 점령지 파괴에 쓰는 굴착기 수출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새라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는 “서울인권영화제의 이번 결정은 팔레스타인 운동에 큰 힘이 되는 사건이다. 역사가 깊은 인권영화제가 먼저 채택해 파급력이 클 것이라고 본다. 특히 이스라엘 정부가 문화, 학술, 영상 산업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이 선언이 영감이 돼 다른 운동 진영도 같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서울인권영화제는 오는 26일부터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나는 오류입니까’를 슬로건으로 21회 상영회를 진행한다. 모두 35편이 상영 예정된 가운데 이스라엘 정부의 성소수자 마케팅을 비판하는 다큐멘터리 <핑크 워싱>도 선보일 예정이다. 영화제의 이번 상영 거부 배경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작품인 셈이다. 작품 상영 뒤에는 1시간 동안 인권, 팔레스타인 평화, LGBTQ 등 각 부문 활동가와 함께 하는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된다.
서울인권영화제의 이번 결정은 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일시적인 입장이 아니라 보다 원칙적 계획에 속한다. 영화제는 ▵이스라엘의 모든 아랍 땅에 대한 점령과 식민화 중단 및 ‘분리 장벽’해체 ▵이스라엘 시민권자인 팔레스타인인의 기본권 존중 ▵UN 결의안에 따라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과 재산권 존중, 보호, 촉진 등이 지켜질 때까지 BDS 운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LGBTQ는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성전환자(Transgender)와 자신의 성정체성, 성적 지향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Questioner)을 함께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