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언론 영업하기
윤지연 기자
민중 언론 <참세상>의 새로운 도전, 주간 《워커스》 창간. 마감하니 마감이라고, 눈 깜짝할 사이에 10호가 발행됐고 두 달이 흘렀다. 밖에서는 새로운 도전이니 뭐니 하며 큰소리를 치고 다니지만 내부 구성원들은 점점 쪼글쪼글해지고 있다. 얼굴도, 그리고 생활도.
사람들에게 민중 언론 <참세상> 시절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분명 달라졌다. 빚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늘었고, 노동 강도는 세졌다. 그래도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기풍이 남아 있는지라, 구성원들은 당당한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기업 광고 따위 받지 않고, 자본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가 쓰고 싶은 기사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언론이니까.
그래서 정말이지 징징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가난하지 않은 적 없고 일에 허덕이지 않은 적도 없다. 새삼스럽게 유난 떨지 말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행 호수가 늘어 갈수록 굉장히 무거운 바윗덩어리가 어깨 위에 내려앉는 기분이다. 단순히 기분만은 아니다. 진짜로 아프기 시작했다, 양쪽 어깨와 뒷목이.
얼마 전 개한테 물리는 악몽을 꾼 뒤 더 이상 앉아서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분노가 차올랐다. 진짜 우리 사회에서 독립 언론이나 민중 언론 따위가 살아남는 건 불가능한 걸까. 그래서 시작한 위클리매드코리아. 민중 언론 구독을 독려하는 영업 사원 되기.
‘이러려고 연락했구나’라는 벽
모든 영업의 첫걸음은 ‘지인’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접근이 용이한 대상은 가족. 하지만 오빠는 꼴보수였고, 아빠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빠는 1년 정기 구독을 빌미로 나에게 각서를 요구했다. 그것도 아빠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갈등하다 펜을 들었다. 각서 내용은 올해 안에 무조건 결혼을 할 것, 위반 시 1년 구독료의 다섯 배를 변상할 것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면 좋았을 것을. 아빠는 그 각서를 결혼하기 전까지 내 방 책상에 붙여 놓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결국 소리를 꽥 질렀고, 그 쓰레기 안을 내팽개쳐 버렸다.
가족 아닌 지인을 타깃으로 해 볼까. 하지만 나와 가까운 베프들은 이미 구독을 하고 있는 상황. 가까운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지인들에게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내 나는 깨닫고야 말았다. 그와 나 사이에 미처 감지하지 못한 벽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주간지 이야기를 꺼내 여차여차 내용을 설명한 뒤 구독을 권했을 때, 수화기 저편의 표정과 공기까지도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나 말투는 두말할 것도 없고. ‘상황이 어렵다’, ‘고민해 보겠다’, ‘주간지에 관심이 없다’ 등의 이야기가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그건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니까. 견디기 힘들었던 건 ‘네가 이러려고 전화했구나’ 혹은 ‘나를 그냥 영업 대상으로 생각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전해졌 을 때다.
대학 시절,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의아해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나에게 보험 가입서를 내밀었다. 나는 그때 그녀를 어떻게 대했었나.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과거가 문득 떠올랐다.
며칠 전, 같이 구독 모집에 뛰어든 동료 기자가 눈이 팅팅 부은 채 출근했다. 부모님과 싸웠다고 했다. 주말에 집에서 전화를 돌리며 구독을 요청하는 모습이 부모님 눈에 띄었나보다. “쟤 또 저러고 있다”는 쿠사리를 듣고 부모님과 한판 전쟁을 치렀다고 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불안정하고도 힘든 직장으로 보일 수밖에. “그래도 울고 나니 시원하다”는 그의 말이 무척이나 슬펐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웃고 말았다.
독립 언론이 필요한 민주 노조들은 가난했다
아픔을 잊고 텔레마케팅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아예 날을 잡고 동료 기자와 마주 앉아 전화를 돌렸다. 그래도 명색이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잡지 《워커스》인 만큼, 노조 사무실에 무작위로 전화를 걸었다.
휴대 전화에 발신 번호가 늘어날수록 쓴 웃음이 나왔다. 종종 앞자리에 앉은 기자와 헛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내용은 비슷비슷했다. 이미 1년 예산이 책정돼 있어 당장 구독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몇몇 노조는 지금 내부가 너무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야 얘기를 꺼내 볼 수 있다고 답했다. 담당자가 아니라는 답변과, 회의를 해 봐야 한다는 얘기도 다수였다. 가장 마음 아픈 대답은 ‘재정이 너무 어렵다’는 것. “저희가 재정 상황이 어려워서 매체 구독을 전면 중단하고 있습니다”, “법률 비용도 못 내고 있어요”, “소수 노조여서 개인 돈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신생 노조라 재정이 거의 없습니다. 죄송해요” 등.
일등 영업 사원이 되려면 그런 사람들에게도 마케팅을 해야 했다. 하지만 차마 더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노조 재정 상황은 규모와 직종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려운 곳은 정말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 잡지를 구독할 리는 만무한 상황. 그래서 가끔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왜 기사를 쓰면 쓸수록 재정 안정화와는 멀어지는 걸까, 하는.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있자니 골이 지끈거렸다. 그렇다 해도 텔레마케터의 노동과는 비교할 것이 못 됐다. 전화를 툭툭 끊어 버리거나 욕을 하거나 짜증을 내는 경우는 없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민중 언론이 필요한 민중도 가난했다
안 되겠다 싶어 취재원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 보기로 했다. 사실 웬만큼 허물없는 취재원이 아니면 구독을 요청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런 기사를 썼으니 당신도 구독해 줘’ 라는 일종의 거래로 읽힐까 봐. 그래도 다른 주류 언론이 관심 갖지 않는 사안들을 취재하고 살피는 민중 언론의 가치와 필요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기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게 수화기를 들었다.
역시나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쉽지 않은 건, 민중 언론 <참세상> 시절 관계를 맺은 취재원들이 대부분 쥐꼬리만 한 생활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서로 사정 빤히 다 아는데 지갑을 열게 하는 게 민망하고 미안하다. “사정이 어렵다” 혹은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하겠다”는 거절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계속 거절만 당했다면 울어 버렸을 거다. 하지만 거절한 사람보다 응원을 보내 주는 사람이 더 많았다. 누구보다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한 A 씨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정기 구독자로 가입했다. 오히려 나에게 미안하다면서. 그에게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내자 “진작에 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라는 문자가 돌아왔다.
산업 재해로 요양 중인 B 씨에게도 전화를 했다. “영업하려고 전화드렸다”고 말을 꺼내자 “얼마든지 편하게 하시라”고 말했다. 그 역시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간 경황이 없어 구독 신청을 못 했다며. 전화를 끊고 난 뒤 그에게 문자가 왔다. 힘내라는 문자였다.
C 씨는 내내 ‘의리’를 강조했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글이라고는 질색을 했고 지금도 책은커녕 인터넷도 안 보는 사람이지만 ‘의리’가 있어 당연히 구독 신청을 하겠다는 거였다. 영업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되레 사람들에게 위로받았다.
또 다시 길거리로
잡지와 책상을 이고 지고 택시를 불렀다. 다시 길바닥이다. 이미 강남 대로에서 노점을 해 본 경험도 있다(박다솔 기자, <용역을 만나는 곳 백 미터 전>, 《워커스》 8호). 역시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수월했다. 상수동의 핫 플레이스라는 ‘이리카페’ 앞에 좌판을 깔았다. 분명 ‘핫 플레이스’였지만 비가 그친 뒤라 당최 사람 구경 하기가 힘들었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오늘은 글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간이 손님이 와 “창간호를 봤다”며 아는 척을 하기도 했지만 정기 구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떤 외국인이 잡지를 이리저리 들춰 보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어도 더듬거리는 우리가 영어라고 잘할까. 결국 서로 눈치만 보다 그를 방치하고 말았다. 쓸쓸히 떠나는 그를 보며 우리는 좌판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그렇다고 아주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가판대를 외로이 지키고 있는 사진을 찍어 사람들에게 전송했다. 주요 타깃은 초창기부터 구독을 거부하고 있는 취재원. 그는 나름 자신의 확고한 고집을 가지고 주야장천 구독을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빨리 주간지가 망하길 바라며 굿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의 요구는 간단했다. 주간지를 접고 인터넷으로 돌아가라는 것. 많은 기사를 신속하게 올리는 언론, SNS에 빠르고 쉽게 퍼지는 기사를 원하는 듯했다. 민중 언론 <참세상>에 누구보다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사진을 전송하며, 요즘 이렇게 길바닥에서 영업하며 산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그제서야 그는 “일단 후원인으로 1년 계약하자”는 메시지를 보내 왔다. 영업 3개월 만의 성과였다.
우리는 가능할까
여전히 긴가민가하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독립 언론, 민중 언론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무려 7년째 긴가민가한 채 살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 정답을 안다면 나는 신일 거다. 세상 천지에 확신 있는 길만 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참세상>에 처음 들어왔을 때, “거기 아직 안 망했어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그렇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서도 절대 안 망하는 곳이다. 그만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다. 창간 초기 구독자들이 기반을 마련해 준 덕에 아직 주간지가 나오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뭐 하나 받는 것 없이 매달 <참세상>을 후원해 준 회원들도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주류의 목소리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얘기해 달라는 것. 그리고 노동자와 소수자,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 달라는 것이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안 망할 것 같으냐’는 질문이 여전히 따라다닌다. 아마도 이 물음은 독립 언론의 숙명인 듯하다. 사람들이 우려하는 길을 굳이 가 보는 것도 독립 언론의 숙명일 테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에 틀어박혀 집만 지키다가는 집에 깔려 죽을 수 있다. 보수 공사도 하고 벽지도 새로 발라야 집도 살고 나도 산다.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와중에 모 지역의 독립 언론 대표한테 전화가 왔다. 조만간 언론사 문을 닫을 예정이라고 했다.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같이 열심히 버티자’라는 허망한 얘기만 더듬거리다 말았다. 독립 언론, 민중 언론의 생존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이 땅에서, 우리는 가능할까?
사진
‘폐기된 사진의 귀환:
FSA 펀치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진 아카이브인 1930년대 미국 농업안정국(Farm Security Administration, 이하 FSA)의 사진 중에서 펀치(구멍 뚫은 도구)로 구멍을 뚫은 사진을 보여 준다. 이 사진 아카이브의 책임자인 로이 스트라이커(Roy Stryker)는 FSA의 이념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된 모든 사진 원본(필름)에 펀치로 구멍을 뚫어 다시는 그 사진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워커 에번스, 아더 로드스타인, 벤 샨, 칼 마이더슨, 러셀 리 등 당대 내로라하는 FSA 사진가들은 자신들의 사진이 스트라이커라는 권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사진에서 선택 행위는 단지 FSA 사진이 속한 다큐멘터리 사진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도 사진, 예술 사진, 광고 사진, 일상 사진 등 사진의 모든 분야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바로 이 같은 필연성 때문에 ‘선택’이라는 개념은 사진의 선택적인 속성이 아니라 근본적인 속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FSA의 펀치 사진을 통해 기존의 사진 철학에서 망각된 ‘선택’이라는 행위와 ‘선택하는 자’라는 새로운 사진 주체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 선택, 선택자라는 개념은 미술과 문학과는 다른, 사진만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 박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