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하던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100년에 걸쳐 번역 작업이 완료된 조선 왕실의 《승정원 일기》 번역본 데이터 검증을 위해 에이도스에 저장하고 난 뒤 오류가 일어나자 원인을 찾으러 가상 현실로 여행을 떠난다.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웬즈데이
국제적 해커 연대 고스트라이더의 리더.
제13화 Wednesday’s Child1
에이도스에 접속한 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쇼윈도를 통해 발견한 지민은 특이점이 왔다는 에이도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리는 그녀가 기억하는 바깥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현실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다.
“에이도스, 지금이 몇 년도야?”
“바로 어제예요.”
그렇게 광범위한 특이점이 발생했단 말인가? 지민은 혀를 차며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손차양을 하고 거리를 둘러보았다. 2045년의 스타셸 테러 이후 재건된 강남 거리는 이전의 기억처럼 번잡하고 노골적인 욕망이 드러나는 거리였다. 속세와 이별한 수도승처럼 오메가 섹터로 피신하기 전, 그가 보았던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어제, 그는 여기에 없었다. 지민은 테러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진 옛 교보문고 거리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덥고 혼잡했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보였다. 행인들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고 젊은 여성들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무장하고 타인의 시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골목길로 이어지는 코너의 유료 흡연 부스들은 사람 반 연기 반이었다. 큰길로 흘러나오는 담배 냄새를 피해 발걸음을 돌린 지민은 사거리 쪽에서 일어난 소란에 눈길을 돌렸다.
승객들이 한 남자를 버스에서 끌어내리고 있었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친 남자의 얼굴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지민은 웅성거리는 행인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남자를 둘러싸고 구타 중인 버스 승객들의 욕설이 또렷하게 들릴 만한 거리까지 다가갔지만 그들의 말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개만도 못한 새끼! 사람을 그렇게 죽이고도! 멀쩡히 얼굴 들고 살아남을 줄 알았냐?”
60~70대로 보이는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축구공 차듯이 걷어차고 있었지만 이내 지쳤는지 발길질에 들어가는 힘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그런 그의 뒤를 잇기라도 하듯이 중년 여성 하나가 가세해 양산으로 쓰러진 남자를 타작질 했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옆에서 구경하던 젊은 여자를 향해 말했지만 여자의 입꼬리는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그린 낙서처럼 일그러졌다.
“저 새낀 비국민 형을 받은 살인자예요.”
여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화면을 지민에게 보여 주었다. 화면에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사진과 함께 낯선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제1종 국민 비보호 형벌 대상자: 김◦◦’
지민은 화면에 쓰인 문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비국민 형이란 게 뭐죠?”
“어디 외국에서 살다 왔어요?”
여자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향해 날리던 냉소를 지민에게 날렸다. 지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당혹했지만, 이것이 에이도스가 말한 특이점에 도달한 세계의 모습 중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후 경찰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단 횡단자에게 딱지를 떼러 오는 듯한 나른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경찰은 무슨 일이냐는 질문도 없이 들고 있던 단말기로 쓰러진 남자가 발목에 찬 태그를 스캔하고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죽기라도 하면 시체 유기에 대한 범칙금을 부담하셔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적당히들 하세요.”
경찰관은 발끝으로 쓰러진 남자의 머리를 툭툭 걷어찼다.
“야, 죽었냐? 엄한 사람들 송장 치우게 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서 꺼져, 새끼야.”
남자를 둘러싸고 있던 행인들은 흥분이 가라앉자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슬그머니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그를 끌고 내렸던 남자와 여자도 적당히 분이 풀렸는지 남자에게 침을 뱉고는 놓친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 쪽으로 사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입술이 터지고 코가 깨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가슴에 검은 비닐봉지로 된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용물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 없었지만 알루미늄 포일에 싸인 것으로 보아 분식점에서 산 김밥처럼 보였다. 경찰관이 어중간한 거리에 서서 쓰러진 남자를 지켜보고 있는 사이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남자는 일어서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침과 뒤섞인 피가 거품을 일으켰다.
지민은 남자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살인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라 선뜻 다가가기 망설여졌다. 남자의 중얼거림은 점점 또렷해졌다.
“차라리 죽이라고… 죽여 달라고….”
남자의 중얼거림은 곧이어 울분에 찬 비명으로 커졌다. 행인들은 보이지 않는 벽을 돌아서 가듯 그를 피해서 갔고 벽 안에 있는 것은 지민뿐이었다. 지민 역시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이 가상 현실이라는 점을 머릿속으로 되뇌이며 뒤로 물러서길 원하는 발걸음을 간신히 붙들어 두고 있었다.
남자는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가로수에 기대어 몸을 휘청였다. 그는 멀찍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경찰을 향해 절규했다.
“그냥 죽이라고! 이 씨….”
순간 남자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바닥에 꼬꾸라졌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 하나가 달려 나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내리친 것이다. 그것이 바닥에 구르고 난 다음에야 지민은 소녀가 남자를 내리친 물건이 도로의 보도블록 벽돌임을 깨달았다.
그대로 얼어붙은 지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남자의 몸은 가로수에 잠시 기대어 있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소녀는 피로 흥건한 벽돌을 길바닥에 버리려다가 경찰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이미 범칙금 고지서를 발부하려고 허리에 찬 단발기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뒤돌아본 소녀는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벽돌을 버리고는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지민은 소녀를 쫓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얼어붙은 듯이 고정된 다리를 힘겹게 떼어 낸 다음 소녀를 쫓아갔다. 경찰관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골목길로 내달린 소녀는 숨을 몰아쉬며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지민은 소녀와 갑작스레 거리가 좁혀지자 하마터면 그녀를 쓰러뜨릴 뻔했다. 겨우 소녀의 어깨를 붙잡은 지민이 말했다.
“너, 무슨 짓이야? 왜, 왜 그랬어?”
소녀는 지민의 손을 뿌리쳤다.
“아, 그렇게 아프게 잡지 마! 생각보다 빨리 발견했네? 대단한데, 에이도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지민은 소녀의 말을 듣고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녀는 기침을 한 다음 소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너 누구야? 말해! 어떻게 이 안에 들어왔어?”
“들어온 게 아니라 여기서 태어난 거지. 아, 목말라! 마실 거 사 주면 얘기해 줄게.”
편의점 앞 파라솔 밑에 앉아 두 번째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은 소녀는 지민이 건네 준 물티슈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까 그 남자는 비국민 형이라는 법정 최고형을 받은 거야. 국가가 범죄자에게 내리는 최고의 극형이지. 어느 정도로 극형이냐면, 사형은 그에 비하면 아주아주 자비로울 정도야.”
“도대체 그게 뭔데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폭행을… 아니, 살인하도록 놔둔단 말이야?”
지민은 비로소 눈앞의 소녀가 좀 전에 저지른 일의 의미를 깨닫고는 몸을 떨었다.
“설명하고 있잖아. 말 그대로 국민으로서 얻는 당연한 모든 권리에서 배제되는 사회적 사형이라고 보면 돼. 범죄자의 기본 인권을 말소하는 형벌이지.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고, 그 어떤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도록 사회에서 배제하는 극형. 비국민 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는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게 아니야. 반대로 사회에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방치되지. 막말로 놈들을 때리거나 재산을 빼앗아도 걔들은 아무런 법의 보호도 못 받아. 아까 본 것처럼, 내가 달아난 건 놈을 죽였다고 벌을 받을까 봐 피한 게 아니야. 시체를 그냥 거기 두면 쓰레기 무단 투기에 해당하는 범칙금을 내야 하거든.”
“아까 그 남자는….”
“그래, 악질이야, 아니 이제 죽었으니까, 악질이었지. 살해한 여자만 일곱 명이었고, 그중에 마지막은 아홉 살짜리였어. 애 엄마가 보는 앞에서…. 아 끔찍한 얘기니까 입에 담기 싫다.”
지민은 소녀가 말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만하라고 손짓했다.
“어떻게 그런 범죄자를 사회에 풀어 놓을 수가 있단 말이야? 아무리 법의 보호에서 제외된다 하더라도, 그놈이 다시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잖아?”
소녀는 빨대로 우유 통의 바닥까지 빨아 마시며 소리를 냈다.
“비국민 형 선고자는 풀려나는 순간 전국에 신상이 공개돼.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공개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정보망이 느슨한 시골에서는 한두 달 정도 버틸 수 있지. 가족이 있다면 보호하려고 하겠지만 그런 애들은 가족들도 연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지거든. 게다가 요즘은 스포츠 삼아서 그런 애들을 사냥하러 다니는 클럽도 생기고, 뭐 그런 흉악범이 매년 수십 명씩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까…. 국민들의 분노 해소용 사냥감으로 딱 좋지? 대부분 그놈들은 자신이 쉽게 공격당할 수 있는 처지란 걸 알기 때문에 무조건 산속으로 도망치려고 해. 비루한 목숨을 하루라도 연장해 보겠다고. 도시에 나타나는 놈들이 바보인 거지.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 아까 그놈은 멍청이 중에서도 특이하게 멍청한 케이스였지. 놈이 발목에 찬 태그 봤지? 요즘은 실시간으로 주변을 스캔해서 범죄자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알려 줘. 버스 안에서 놈을 발견하고 끌어내린 승객들도 좀 유난을 떨긴 했지. 보통은 밤길에 동네 주민들이 잡아 놓고 집단으로 폭행하거나 죽여서 야산에 버리거든. 그래야 범칙금을 안 내니까.”
지민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져야 이런 세상이 올 수 있단 말인가? 복제 인스턴스에 추가한 《승정원 일기》 완역본의 데이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승정원 일기》는 단순히 통로로 이용했을 뿐이야. 나는 네가 이 세계에서 하려던 일에 ‘증오’라는 양념을 살짝 뿌려 봤지. 마살라2처럼 향이 강해서 다른 맛들을 모두 가려 버리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에이도스, 지금 내 앞에 있는 꼬마는 도대체 뭐야?”
지민은 에이도스를 호출했지만 평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침묵했다. 수차례 반복해서 그를 불러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소녀는 말했다.
“에이도스는 불러도 대답 못 할거야. 지금 당신은 에이도스의 사각지대 안에 들어와 있거든. 완벽한 사각지대. 아참, 그리고 내 이름은 쥬빌리 시몬스야.”
지민은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자신을 소개한 이름은 지민이 익히 아는 인물의 본명이었다.
“웬즈데이3?”
소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렇게도 불렸지. 혹시, 강제로 접속을 끊으려고 하지 않기를 바라. 그러면 현실의 네 몸이 견디지 못할 거야. 난 현실 세계에서까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 특히 너는.”
지민은 자신이 복제 인스턴스 속에서 운명을 바꿔 버린 소녀가 텅 빈 바나나 우유 통을 흔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와! 이거 맛있다. 하나만 더 사 줘.”
(계속)
1.Matt Monro. 1966.
2.향신료를 혼합한 가루 혹은 페이스트. 주로 인도식 요리에 많이 쓰인다.
3.국제 해커 연대인 고스트라이더의 리더. 제5화 Ghost Riders in the Sky 참조.
이재만 작가.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사진 정운 기자
(워커스13호 2016.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