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서별관 회의’와 ‘관치 금융’ 논란
‘서별관 회의’라 불리는 비공개 거시경제정책협의체 문건이 공개되면서 뜨거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 회의 문건에는 지난해 10월 대우조선해양 정상화 지원 방안이 담겨 있었는데, 국책 금융 기관인 산업은행, 수출입은행뿐만 아니라 시중 은행에까지 지원 방안에 동원하도록 지시하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이 문건의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비공개 문건이다 보니 문건의 실체를 인정하기 곤혹스러운 금융 당국은 “확인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 여당도 10여 년 넘게 관례로 내려온 비공개 회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논란이 확산하는 걸 막고 있다. 이에 야당은 국정 조사까지 주장하면서 연일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쟁점을 목격하게 된다. 먼저 ‘관치 금융’ 논란이다. 문제가 된 이 문건에는 “시중 은행은 2015년 6월 말 회사 정상화 시점까지 한도성 운영 자금 등의 사용 허용 및 상환 유예 처리”를 해야 하고, 또 “금리 등 거래 조건은 2015년 6월 말 적용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정부는 “산은이 채권단 협조를 요청하고, 금감원이 지원”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청와대 서별관 회의 때 산업은행은 거의 린치당하는 수준”이라고 밝힌 전 산업은행 고위 간부의 증언이 나오면서 논란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애초 독립성이라는 건 없이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라는 건데, 요즘 산업은행이 대우조선 부실 사태를 키운 ‘공공의 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일종의 항변을 한 것이다.
또 다른 쟁점 하나는 왜 회의록조차 남기지 않는 은밀한 정책 협의체가 10여 년 넘게 관습처럼 내려왔는가이다. 그동안 경제 정책에 대한 수많은 공방이 있었음에도 왜 지금에서야 이것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일까? 여당 대표는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내려온 비공개 정책 협의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여야가 지금과 달랐는데, 다 같이 서로 인정하고 있었던 이 비공개 협의체가 왜 지금에서야 ‘불법’을 운운할 정도로 문제가 되고 있는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논란 속에서 일차적으로 구조조정 실패에 대한 책임 논란과 비민주적이고 투명하지 못한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 그런데 만약 구조조정에 성공했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지금처럼 문제가 됐을까? 민간 금융 기관을 압박했다는 것을 두고 ‘관치 금융’이라 비판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부실 사태를 조기에 수습했다면
시장에선 오히려 선제적 대응이라고 박수 쳤을지도 모른다. 불투명한 의사 결정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만약 구조조정이 성공적이었다면, 혹은 심각한 실패 수준을 면했다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장의 불안감을 키우지 않고 신속한 결정을 내린 조기 대응의 효과라고 자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논란의 핵심은 구조조정의 성공 여부가 아닌가? 문제의 핵심이 지금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관치 금융’과 은밀한 정책 결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조정을 집행할 당국의 능력에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관치 금융과 비민주성은 구조조정 성공 여부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찬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아주 우스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불안정한 시장과 국가의 개입
현재 구조조정 사태의 중심에 있는 조선해양 부문은 해양플랜트 사업에 대한 무리한 진출과 세계적 수준의 조선업 불황이 겹치면서 벌어진 일이라 부실 사태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부실 사태의 주요 당사자인 대우조선이 무리하게 출혈 경쟁을 감수하면서 해양플랜트 사업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지도하는 게 올바른 정공법 아닐까? 이미 물이 엎어진 상태에서 ‘관치 금융’과 비민주성을 논하는 건 뒷북이다. 오히려 국유 기업인 대우조선을 공기업에 준하는 수준으로 제대로 관리했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공적 자금 투입으로 국유 기업인 된 대우조선은 10여 년 넘게 수익 극대화와 공적 자금 환수를 위한 민간 매각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한 가지 남는 문제가 있다. 미래에 언제 벌어질지 모를 위기에 대해서 지금 어떻게 선제로 대응할 수 있는가이다. 배럴당 150달러가 넘던 고유가 시절, 해양플랜트가 앞으로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든 했을 것이다. 출혈 경쟁을 통해서라도 시장 지배력을 넓히는 게 합당한 사업 방식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3년을 내다보지 못했던 이 선택은 한국 경제를 휘청거리게 하는 주범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처럼 시장이 가지고 있는 경쟁으로 인한 불안정성은 항상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특단의 비시장적 대책이 일상적으로 요구된다. 그것을 ‘서별관 회의’라 부르든 ‘관치 금융’이라 부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난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위기의 진원지였던 미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상기해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미 의회에 상정된 부실 자산 구제 금융 프로그램 7000억 달러는 진통 끝에 겨우 통과됐다. 그러나 이렇게 매번 복잡한 의회 동의를 거치게 되면, 시장에 대한 긴급한 개입을 어렵게 만들 것으로 판단한 미국 중앙은행(연준)은 독자적으로 자신이 돈을 찍어 공급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양적 완화였다. 1차 양적 완화로 연준이 사들인 부실 채권 규모는 2조 달러가 넘는다. 이건 의회에 제출했던 7000억 달러 구제 금융 프로그램의 세 배나 되는 규모다. 그런데 이 결정에 대해 지금 누구도 이것이 과연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이뤄졌는지 시비 걸지 않는다. 그런 시장 개입으로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는 걸 막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벌어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사태에서 유럽중앙은행이 취한 조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내부 규정까지 변경하면서 자산 매입 대상을 늘렸다. 명분은 브렉시트로 인한 금융 시장의 불안정성을 미리 막기 위함이다. 그 결과 브렉시트 발생 이후 금융 시장은 심각한 동요 없이 흘러가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유럽중앙은행의 결정은 선제 대응을 한 사례로 볼 만하다.
그러나 그런 부실 자산 매입으로 누가 가장 큰 혜택을 입었는지 따져 보자. 금융 시장이 안정화됐으니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갔을 거라 말할 수 있겠으나, 누가 보더라도 가장 큰 이익을 본 집단은 부실 채권을 손에 들고 있었던 금융 투자 기관들이다. 하루아침에 부도가 날 위기에 몰린 이들이 가장 큰 이익을 봤다. 이 얼마나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정책인가? 그러나 우린 이에 대해 별다른 얘길 하지 않는다.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개입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접하는 경제학 교과서엔 시장의 자율성과 자기 조정 메커니즘을 신봉하는 얘기들이 거역할 수 없는 대전제처럼 나온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시장의 불안정성과 국가 기관의 상시적 시장 개입은 현실이 교과서와 정반대임을 보여 주고 있다. 지금 벌어지는 ‘서별관 회의’ 논란에서도 ‘관치 금융’이 주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왜 그런 비공식 정책 협의체가 20년 가까이 있어야 했는지 좀 더 깊은 성찰은 부족해 보인다. 시장 조정 때문에 만사가 잘 굴러갔다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불안정한 시장을 어떻게 개입할 것이냐는 질문이 남는다. 특히나 자본주의가 장기 불황에 빠져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국가의 시장 개입 메커니즘을 확대하고 나아가 생산의 사회화를 진척시켜 시장의 불안정성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서별관 회의처럼 이 메커니즘이 밀실에서 은밀하게 결정된다면, 언제나 성공 여부에 따른 뒷북 논란만 남을 것이다. 게다가 밀실, 비밀, 비공개, 자료를 남기지 않는 회의는 긴급한 의사 결정보다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것이라 더욱 문제가 될 것이다. 경제에 있어서 비밀주의는 결국 국민 부담으로 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