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이 인재와 천재로 초토(焦土)가 됐다. 울산과 거제에서 조선업 구조조정으로 수만 명의 비정규직이 잘려나가고, 경북 성주와 김천은 사드 기지 배치문제로 사람과 땅이 들고 일어났다. 여기에 경주에서는 사상 최대의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도 지진이지만 문제는 핵발전소가 밀집된 월성과 고리 지역까지 파급이 미쳐 북한 핵 개발보다도 더한 공포에 싸였다는 것이다.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물류대란과 대량해고 사태가 일어난 부산과 경남,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거제에서는 콜레라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재난 발생보다 더 큰 문제는 누구 하나 이를 책임
지려는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구조조정 책임을 놓고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재계는 정부가 구조조정에 개입하면 관치라더니 이제 와서 정부가 너무 역할을 안 한다며 정부의 개입을 촉구하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을 처리해 놓고 구조조정을 민간자율에 맡긴다며 기업에 책임을 넘기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과 같은 국책은행과 시중은행의 자본 건전성이 악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금융자본이 털끝 하나라도 다치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또한, 공급과잉이라는 (제로섬도 아닌) 마이너스섬 게임에서 버티면 이긴다고 생각하는 산업자본가들은,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망할 때까지 싸우는 치킨게임에 돌입했다.
정부가 기업을 믿지 않고, 기업은 정부를 믿지 못한다. 망해가는 기업끼리도 서로 믿지 않아 결국 해당 업종의 평가를 죄다 외국 컨설팅사에 의뢰했다. 조선은 맥킨지, 철강은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석유화학은 베인앤드컴퍼니에 연구용역을 맡겼다. 연구 보고서가 나와도
자기 처지에 따라 비판하고 온갖 음모론을 제기한다. 국가는 없어졌고 법과 제도는 불신을 받는다. 홉스가 얘기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돌입한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부는 돈 안 들이고 코 푸는데, 금융자본은 자기 돈 잃지 않고 본전 뽑는 것에, 산업자본은 자기가 진 부채를 국민에게 떠넘기는 데 급급하다. 그런데, 결국 이 과정에서 죽어 나가는 것은 노동자 (주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상공인들이다. 누구도 이에 대한 대책은 세우려 하지 않고 있다.
구조조정뿐 아니라 지진 대응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늑장 대응은 물론이고, 메르스 사태에서 보여준 정보의 왜곡과 통제, 세월호 참사에서 야기된 ‘가만히 있으면 결국 죽게 된다’는 경험학습으로 정부 정책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안전하다고 앵무새처럼 떠드는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의 말대로 핵발전소가 과연 안전할까? 내 집과 직장은, 아이들이 놀고 공부하는 학교는…. 온갖 불안이 지진의 흔들림 속에 이리저리 퍼지고 있다. 결국, 국가를 제쳐놓고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나선다.
배가 고작 12척이 남을 때까지, 이순신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때를 놓치기 십상이다. 연대는 신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맹은 청와대나 백악관에서만 떠드는 이야기가 아니다. 11월 12일은 민중총궐기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