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립온(slip-on) 발을 쑥 넣어 신을 수 있는 신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인물인 최순실 씨가 한국에 도착한 지난달 30일. TV 조선은 뉴스 보도 중 ‘슬립온’에 대한 자막을 넣었다. 기자는 “패딩의 깃과 스카프로 얼굴을 가렸으며 검정색 바지로 ‘올블랙’에 가까운 패션”이라며 “신발만은 ‘블랙앤 화이트’로 최신 유행인 ‘슬립온’을 착용했다”고 설명했다. 이 보도의 제목은 <‘올 블랙’ 공항패션…왜?>였다.
최순실 씨가 검찰에 출석하던 날의 언론보도도 비슷하다. 중앙일보는 최 씨가 검찰에 출두하며 떨어트린 신발 한 짝 사진을 1면에 실었다. ‘신제품 아닌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국내에선 70만 원대에 판매된다’며 신발의 브랜드와 디자인, 가격을 안내했다. 한국일보도 친절했다. 2면에 ‘실세의 명품 패션’이라는 제목으로 최 씨의 가방과 신발 사진을 실었다. 그 밖에도 최 씨의 코트, 스카프, 가방이 어디 제품인지 보도한 언론사는 많았다. 이 때문인지 그가 쓴 모자의 제조사로 추정되는 한 명품 브랜드 홈페이지는 한때 접속자가 몰려 서버가 다운됐다.
최 씨의 신발, 가방, 모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본질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청와대 비선실세가 착용한 소지품에 대한 깨알 같은 보도는 이 게이트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었을까. 1면을 장식한 사진과 설명은 어떤 의도가 있을까. 최 씨에 대한 보도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본질을 가린 가십 보도의 역사를 들여다봤다.
가십으로 가린 진실의 연대기…‘유혹하는 여성’의 탄생
낯설지 않다. 최 씨가 무엇을 입고 신으며 어떤 가방을 들었는지 가십을 중요하게 보도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가까이는 세월호 참사 당시 유병언에 대한 보도부터 멀리는 린다 김, 신정아 보도까지. 본질을 가십으로 덮으려는 흔적은 무수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은 현상금 5억 원이 걸린 인물이었다. 그의 행방을 쫓는데 검사 15명, 수사관 110명에, 38일 동안 누적해서 경찰 145만 명이 동원됐다. 언론은 유병언만 체포하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해결되는 것처럼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이러한 집중 보도 속에서 유병언 일가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얼마나 제공했는지 다루는 곳은 거의 없었다. 변사체 시신으로 발견된 유 전 회장이 입고 있던 옷과 유 씨의 아들 유대균 씨와 그의 ‘호위무사’로 불리던 박수경 씨의 검거가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2년 전, 유 전 회장이 변사체로 발견되었지만 그의 죽음으로 밝혀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밝혀진 진실이 없기 때문이다.
큐레이터 신정아 씨에 대한 보도는 어떠했나. 이른바 ‘신정아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동국대의 검찰 고발 때문이었다. 그가 교수로 있던 동국대 진상조사위원회는 신 씨의 학위가 가짜라며 신 씨를 파면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학력위조 사건’이었던 신 씨 사건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등장하며 ‘권력형 비호 사건’으로 변했다. ‘신정아 게이트’의 탄생이다. 당시 언론은 권력형 비리의 본질을 보도하듯 신정아 사건에 대해 수십 개의 보도를 이어갔다. 그 보도의 대부분은 신 씨가 얼마나 사치스런 생활을 했는지에 맞춰졌다. 그가 외제 승용차를 타고 미국으로 출국할 때 비행기 푯값을 현금으로 계산했으며, 명절 때마다 미술계 원로들에게 선물을 보냈다는 것이다. 신 씨가 입었던 재킷이 한 벌에 100만 원을 호가하며 핸드백이 이탈리아 브랜드라는 점도 강조했다. 당시 기사는 빚이 1억 원이 넘는데도, 신 씨가 사치스런 생활을 이어갔다며 변 실장 외에 또 다른 정치권 실세와 연관된 것은 아닌지 의혹을 담아냈다. 어떤 정치권 실세와 어떻게 연결고리가 닿아서 무슨 특혜를 받았는지 의혹에 대한 정황은 없다. 신 씨의 씀씀이로 이를 추측할 뿐이다. 이렇게 권력형 비호 사건은 그의 소비 행태를 부각한 채 마무리됐다.
‘린다 김 선글라스 쓰고싶다-30만 원대 문의 쇄도’, ‘강남 저택 사는 린다 김’ 로비스트 린다 김은 ‘백두 사업’ 이라는 국방 사업 비리에 연루된 로비스트다. 이 사건의 핵심은 국방부의 무기 도입에서 린다 김의 로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다. 하지만 언론에 주로 다뤄진 내용은 린다 김의 선글라스나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과 린다 김 사이의 성관계 여부였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로 행각이 알려졌고 천문학적 액수의 무기 로비라는 본질은 저물어갔다. ‘몸 로비’라는 말이 유행했다.
언론의 보도는 사안의 핵심을 비껴갔고 본질은 희석됐다. 이후 핵심을 비켜난 언론보도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린다 김에서 최순실까지 진실을 가린 언론의 가십 보도는 그 맥락을 꾸준히 유지해왔다. 단순히 언론의 철학이 부재했기 때문일까. 기사의 초점이 된 대상을 살펴보면 이 사안의 특징이 단순히 ‘가십 보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게이트의 주요 인물이 ‘여성’일 때, 유독 본질 대신 선정성과 가십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유혹하는 여성’의 탄생이다. 유대균을 검거할 당시 언론은 경호원이었던 박수경 씨의 외모와 둘의 관계에 대해 집중했다. 당시 MBN은 ‘유대균 검거, 미모의 호위무사 박수경 누구길래…연인관계 의혹’이라는 주제로 “박수경 씨는 현재 이혼 소송 중임에도 유대균 씨의 3개월 도피 생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보도했다. TV 조선은 “호위무사로까지 불렸던 박 씨는 의외로 겁 많은 34살 보통 여성이었다”고 전했다. 신정아, 린다 김과 관련된 보도는 이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당시 경향신문은 ‘다채로운 남성편력…잠 못 드는 유력 인사 많을 것’이란 제목으로 한 중견 문화인의 ‘2년 전에 데이트하며 손을 잡았더니 스킨십을 나눈 두 번째 남자라면서 첫 번째 남자는 아버지라고 하더라’는 말을 기사화했다. 이에 대해 2007년 ‘문화일보 신정아 언론보도사건 규탄 및 대안마련을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당시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모니터 부장은 “저급한 남성의 발언을 중앙 종합일간지가 그대로 기사화해 한 여성을 비난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같은 토론회에서 이윤상 당시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남성공화국, 그들의 마녀사냥’ 이라는 주제로 신정아 씨 보도가 ‘여성혐오를 권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스캔들 도마 위에 올랐던 변 전 실장은 ‘지인들이 말하는 변양균’ 등의 기사로 자기 소신을 정확하게 밝히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고 다뤘지만, 신정아 씨는 사치 호화 생활, 미국에서의 카드 사용 실태, 주식투자 규모, 남성들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암시하는 추측성 기사가 주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부소장은 “신 씨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면 그의 학력위조 의혹이 성 스캔들이나 성 로비, 핑크빛 이메일 같은 기사로 이어지기 힘들었을 것” 이라고 강조했다.
린다 김의 사건도 다르지 않다. 중앙일보는 린다 김과 국내 인사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입수해 특종으로 터트렸다. 이 사안은 린다 김이라는 한 여성이 중심 인물이 되어 벌어진 불륜 드라마로 성격이 변했다. 최순실의 측근으로 알려진 고영태 씨가 호스트바 출신이고 최 씨는 이곳에서 고 씨를 만났을 것이라는 보도와 전 동료의 증언을 언급하며, 둘 사이는 애인 사이가 의심된다는 보도는 신정아, 린다 김과 관련된 보도와 얼마나 다를까. 고 씨의 전직과 둘의 만남, 애인 관계의 여부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본질과 가까운 보도였을까.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돈 많은 강남 아줌마의 이미지를 덧씌운 최순실과 관련된 보도는 언론이 여성을 언급할 때 흔히 드러나는 보도형태”라며 “정치나 국방 등 여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 부분에서 여성과 관련된 비리가 발생하면, 초점은 ‘여성’에 맞춰진다”고 말했다. 정치를 정사로 덮으려는 보도의 한가운데에 ‘여성’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