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퇴진을 위해 1,500개 넘는 시민사회 단체가 ‘박근혜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11월 2일 ‘비상시국회의’로 모인 단체들이 적극적인 행동을 결의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기조를 명확히 했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민주노총 등 민중진영이 한 축이고 참여연대,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등 시민단체가 또 한 축을 맡았다. 종교계와 문화예술인, 원외 정당도 가세했다. 가장 큰 목표는 ‘박근혜 퇴진’이다.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의 열망을 실현해내겠다는 게 ‘퇴진행동’이 발족한 이유다. 많은 단체가 모인 만큼 기세는 세졌지만, 사공이 많은 배처럼 산으로 갈 수도 있는 상황. 그렇다면 구체적인 행동 전술이 있어야 한다. 이에 더해 대통령 하야나 퇴진 이후의 사회에 대해서 그들이 가진 대안은 무엇일까? 대안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박근혜 퇴진’은 정치적 수사,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대안 사회가 시민들의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질 때, 퇴진 요구도 절박해지고 힘을 얻는다. 매년 총궐기 즈음 모였던 많은 단체는 이후로 독자 세력을 구축하며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새 판을 짤 수 있을까?
민주당의 헛발질, 야당에 기대할 것 남았나
지난 14일, 난데없이 제1야당 대표와 대통령이 만나는 영수회담이 이뤄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먼저 제안한 것으로 청와대는 뜻밖의 대화 제의를 곧장 수락했고 날짜까지 박았다. 같은 당 소속 의원들이나 국민이나 황당하긴 마찬가지. 퇴진행동도 곧바로 영수회담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으로 찾아가 “지금 더민주는 ‘박근혜 퇴진’이라는 국민의 요구와 명령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진행되는 양자 회담은 국민을 대표하는 회담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결국 추 대표는 긴급 최고위를 거쳐 의견 수렴 뒤 말을 거뒀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는 과연 야당을 파트너로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다. 김태연 퇴진행동 상황실장은 “민주당 등은 최근에서야 퇴진 입장을 밝히고 대중 투쟁을 하겠다고 선회했다. ‘즉각 퇴진’이라 했지만 ‘질서 있는 퇴진’이라는 점을 함께 밝혔다. 퇴진행동 내에서 야당과의 관계에 대한 입장은 저마다 다르지만, 나의 경우 그동안 신자유주의적 노선을 함께 해온 정당을 신뢰할 수 없고 박근혜 퇴진 이후에도 그들이 주도하는 정국이 되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야당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기도 하다.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야당과의 연석회의를 제안했다. 안 사무처장은 “야당이 (박근혜) 퇴진으로 입장을 정리했으니 수시로 만나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연석회의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퇴진 행동에 직접 들어올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박근혜-최순실 특검, 독립 특검과 거리 멀어
여야가 14일 합의한 ‘박근혜-최순실 특검’ 역시 여당의 발목잡기로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16일 법제사법위원회에 야당이 낸 특검 안이 상정됐으나 새누리당 의원들은 야당이 추천하도록 한 법안이 정치적 중립성과 수사의 독립성을 침해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18일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애초 특별검사의 자격을 너무 제한했다는 비판에서부터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퇴진행동의 참여단체이기도 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15일 이번 특검을 반대한다는 논평을 냈다. 민변은 수사 대상인 박근혜 대통령이 특검 임명을 하게 되는 문제와 수사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문제점을 보완한 새로운 법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 박자 느린 퇴진행동의 시계
퇴진행동은 16일 운영위원회를 열고 향후 사업을 확정했다. 5차 박근혜 퇴진 범국민대회가 예정돼있는 11월 26일을 전후로 노동자 총파업, 농민 파업, 빈민 철시, 학생동맹휴업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고발도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이 박근혜 대통령,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등 7명을 뇌물죄로 고발했고, 국민연금 논란이 불거지자 최근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 등을 추가 고발했다.
하지만 퇴진행동의 대응이 국민 요구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일각의 주장과 즉각 퇴진 이후 대안 제시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대중에겐 ‘민중총궐기’의 이름을 알려냈지만 존재감은 미미하다. 하지만 대중의 분노를 모으는 기구로, 운동 사회가 한목소리를 내며 공동 행동을 하는 구심점으로도 퇴진행동에 거는 기대는 크다. 이미 100만 넘는 촛불이 모였지만 꿈쩍도 않는 정권에 무엇을 보여줄 것이며, 분노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퇴진행동에 묻고 있다. 퇴진행동은 우선 전국과 지역을 아우르는 촛불 집회, 서명운동, 문화제, 정치총파업, 농성 등을 기획 중이다.
많은 단체가 모이다 보니 의견 수렴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팀별 회의, 상임위원, 운영위원들의 회의가 수시로 있지만 당장 촛불집회를 기획하는 데 힘을 쏟아 다른 논의는 부차적으로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 대응은 19일 워크숍을 통해 토론하겠지만 민감한 주제라 쉽게 결론이 도출되기 어려워 보인다. 퇴진 이후의 비전 제시도 늦어지고 있다. 각 단체의 입장이 공유될 뿐 퇴진 행동이 그리는 새로운 사회의 그림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 활동가는 퇴진 이후의 비전은 퇴진 행동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닌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얼마나 잘 모으느냐에 있다고 말했다. 김 상임 활동가는 “확정된 사업은 아니지만 매주 시민 토론회를 개최해 광장의 목소리를 모으고 내용을 정리해서, 일관된 하나의 방향을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겠나”라며 “누구 하나가 만들어서 따르는 게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민의 의견을 듣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라고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시민의 의견이 모이더라도 그 의견을 수렴, 반영하는 일은 결국 퇴진행동의 몫이기 때문에 어떤 의견을 수렴할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릴 것으로 전망했다.
시민의 분노가 촛불로 나타나 100만 이상의 촛불이 모였어도 청와대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검찰 수사 회피, 엘시티 수사 지시 등으로 미루어보면 오히려 장기전으로 갈 공산이 커 보인다. 대통령이 ‘길라임’으로 병원 진료를 받은 기록,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깨알 같은 수첩 메모 등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대중적 반향(?)은 멈출 기세를 모르지만 2008년 촛불집회를 떠올렸을 때, 국민적 피로감이 쌓인다는 문제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총파업은 촛불 집회 다음의 강력한 퇴진 동력이 될 거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혜진 상임 활동가는 “민주노총의 총파업, 상공인의 철시 같은 저항권이 위력적으로 전개돼야 한다. 세금도 안 내고 군대도 안 가겠다고 하는 노골적인 저항권 행사도 필요하다. 저항권의 양상이 진전되는 게 중요하다. 집회를 어떻게 수위 높은 저항권으로 연결할 것인지 고민과 제안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운동사회의 한 관계자는 퇴진행동이 ‘국회 점거’ 등의 충격요법을 전술적으로 써야 할 시기라고 말한다. 대규모 촛불집회를 기획하는 것 이상의 실력을 보여줘야 정치권도 바짝 긴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제도 안에서 운신의 폭을 결정할 경우, 보수 개편 작업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그 프레임에 먹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퇴진행동의 고민
퇴진행동은 중요 사항을 결정할 때마다 이견이 발생할 여지가 높다. 두 달 전까진 총궐기 투쟁본부 내부에서도 ‘퇴진’ 목소리를 내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지금은 ‘퇴진’으로 정립됐지만 조율해야 할 안건은 쌓여있다.
새로운 전술을 짜야 하는 상황에서 야당과의 관계 설정은 이견이 발생하는 가장 큰 지점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추미애 대표와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 15일 정치권, 시민사회가 결합하는 비상 기구를 제안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오래전부터 야당과 시민사회가 결합해야 함을 주장한다. 퇴진행동 내부에서도 야권을 견인하거나 추동해야 할 필요를 공감하지만 어떤 형태로 퇴진 운동을 함께할 것인지 이견이 있는 상황이다. 상임위, 운영위를 거쳐 안건에는 부쳐졌지만 아직 정확한 입장은 나오기 전이다. 민중 운동을 해왔던 단체들은 퇴진에 대해서 불신하고 언제든지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야당이 주도할까 걱정하고 있다. 한편, 정의당은 원내 야당에선 처음으로 퇴진행동에 결합하는 것이 16일 운영위 회의에서 결정됐다.
퇴진 이후까지 한목소리를 낼 수 있겠냐는 우려도 나온다. 결국 대선으로 이어지는 레이스에서 민중 진영은 독자 세력화를 꾀하겠지만, 시민단체는 야권 통합 후보에 힘을 실을 가능성이 높다. 세력화 자체를 검토하지 않는 단체들도 있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우선 박근혜, 새누리당 심판에 집중하는 게 필요하고, 그 이후의 일정에 대해선 논의된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반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넘어서 사회 전반의 구조적 모순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사무처장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폐해를 돌아보고, 재벌과 정치권력이 독점하는 체제 문제까지 논의를 확장할 필요가 있지만 (퇴진행동 내부에서) 관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단체가 지향하는 게 다르고,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인데 퇴진행동엔 ‘박근혜 퇴진’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는 의미 정도가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논의된 바는 아니지만, 새누리당을 어떻게 청산할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 청산도 퇴진행동의 요구안 중 하나지만 친박-비박을 분리해 봐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두 세력을 떼어 퇴진 요구 세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명분 때문이다.
의견 조율, 결론 도출에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럼에도 ‘퇴진’이란 강력한 목표가 있기에 퇴진행동은 나름의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안진걸 처장은 “약간의 어려움도 있고 이견도 있는 게 사실이지만 퇴진 전까진 똘똘 뭉쳐 하는 분위기고 더 많은 개인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단체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패배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각성도 나온다. 퇴진행동에 결합하는 한 관계자는 “조선일보-신보수 연합에 대한 경계 역시 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민중총궐기투쟁본부의 목소리도 2008년 촛불집회 때보다 커진 측면이 있어 상황과 조건들은 진전할 만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과 함께 선 넘기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 나온 한 농민은 87년 항쟁과 분위기가 유사하다고 평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서울에 모인 시민이 100만 명 이상 훌쩍 넘어가자 언론은 87년 항쟁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87년 6월의 그때와 전혀 다르다. 대통령 퇴진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시민들은 차분하다. 집회에선 평화시위를 말하고, 쓰레기까지 치우고 가는 놀랄만한 자기 제어도 보여준다.
이에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발행인은 “퇴진 요구는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따로 과격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사회문제는 세력이 작거나, 갈등이 첨예할 때 과격해지는데 대다수가 동의하는 문제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는 아주 일반적인 모습을 띤다”고 설명했다.
퇴진행동이 선도 집단이 되기 위해서 거리의 시민과 함께 임계점을 넘기 위한 고민 역시 필요해 보인다. 새로운 사회로 발을 내딛는 작업은 더디기만 하다. 하지만 이 시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온갖 적폐가 해소되길 시민은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