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비라] 이번에는 ‘기본소득’이다. 반값등록금, 기초노령연금에 이어 새롭게 발굴된 대선용 복지 이슈다. 만인에게 평등한 기본소득이라니. 왠지 지금의 궁핍한 생활과 불평등 구조를 일시에 해소할 만능키 같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힘의 기울기부터가 불평등한데, 저들이 순순히 돈과 불평등의 권력을 내어놓으려고 할까. 뭔가 또 다른 속내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참세상X워커스>는 궁금해졌다. 기본소득이 시행된 미래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평등할까. 그리고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총 5회에 걸친 기획 연재기사를 싣기로 했다.
[연재순서]
1) 나는 기본소득 받고 싶은데, 너는 어때?(링크)
2) 네가 가라, 기본소득 사회(링크)
3) 기본소득 184조원 is뭔들
4) 기본소득, 1라운드 시작한 실리콘 벨리 사장님과 노동자들(링크)
5) 절박한 내 인생, 기본소득 반대론자들이 밉다(링크)
기본소득 재원 184조 원은 사회보장제도를 손보지 않고선 마련할 수 없는 걸까. <참세상>은 진보진영, 자유주의 진영의 기본소득 재정 모형을 수집해, 기본소득이 시행될 경우 기존 사회보장제도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예측해봤다. 동시에 기본소득 재원 184조 원으로 사회보장 수준을 얼마만큼 끌어올릴 수 있을지를 분석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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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장제도가 없어진 사회, 국가가 사라진 사회
한국에선 진보진영인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기본소득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홈페이지를 통해 “기본소득은 사회서비스형 복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며 “기본소득 운동은 기존에 주장해왔던 무상교육, 무상의료, 주거 공공성, 무상보육, 노후보장 등의 보편 복지와 함께한다”고 규정했다. 또 기존 복지제도를 기본소득에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부자들의 세금 부담을 덜기 위한 사고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설명과는 달랐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대체, 수용하는 기본소득 재정 모델을 살펴봤다. 강남훈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한신대 경제학과 교수)이 제시한 2018년 기본소득 재정 모형은 기존 사회보장제도 일부를 대체한다. 65세 이상, 하위 70% 노인에게 지급하는 기초연금 9.1조 원, 기초생활보장 대상자 135만 명에게 지급하는 생계급여 5.4조 원을 기본소득 재원으로 전환한다. 2017년 3월까지 노인에게 지급되는 기준연금액은 약 20만 원, 기초생활수급 1인 가구의 월평균 생계급여는 49만 5천 원이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은 물론, 국민연금도 기본소득 지지자가 주목하는 대체 자금이다.
뿐만 아니라 소득세 인상, 기본소득세 도입 등 보편 증세로 일반 서민도 세금을 더 내게 된다. 물론 이것만으로 기본소득 재원 마련은 역부족이다. 따라서 토지세, 생태세, 부동산세, 증권양도소득세, 이자배당소득세 등 부자 증세를 원칙으로 한 조세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이 정도 보편증세, 사회보장 축소, 조세 개혁으로 배당할 수 있는 월 기본소득은 30-40만 원 선이다. 당장 기초연금을 받는 노인, 생계급여를 받는 기초생활보장 대상자는 지금보다 현금 지원이 줄어들 수 있다. 진보진영에서 내건 모델이 이럴 진데, 자유주의자들의 기본소득 모델은 또 어떠할까.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보수, 자유주의 진영에선 통 크게 사회보장제도를 없앤다. 정치학자 찰스 머레이는 미국이 빈곤 감소, 보건 의료, 연금 등 복지제도에 쓰는 2조 달러(한화 2,229조 원)를 통합해 연 13,000달러(한화 1,490만 원)를 기본소득으로 지급하자고 말한다. 독일 기업가 베르너 또한 연금, 실업급여, 주택수당 등을 없애고 행정비용을 줄이면 더 많은 기본소득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 보수 진영도 종종 기본소득을 언급한다. 지난해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기본소득’이 4차 산업의 대안이자, 내수 촉진을 위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바른정당 김세연 의원은 “기본소득은 작은 정부를 시도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며 “복지제도를 통폐합해 기본소득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심지어 자유경제원은 “기본소득제 시행은 모든 복지제도 폐지, 단일화가 전제조건”이라고 말했다.
사회보장제도, 무엇이 먼저 사라질까?
▲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어떤 사회보장제도가 먼저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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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장제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이 어려워진 시민들이 싸워 얻어낸 결과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2016년 정부 재정은 386.4조 원이다. 이 중 복지 재정은 123.3조 원으로 31.9%에 달한다.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은 2014년 10.4%로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2017년 현행 공공사회지출을 기준으로 조금 더 세세하게 살펴보면, 2017년 기초생활보장 정부 예산은 10.3조 원이다. 현금으로 지급되는 생계급여는 3.6조 원, 1인 가구가 평균 49만 5천 원의 기초생활급여를 받는다. 이외에 주거급여, 교육급여, 의료급여도 있다.
긴급복지제도는 일시적으로 생활이 어려운 경우 국가가 신속하게 지원하는 제도다. 2014년 ‘송파 세모녀 자살 사건’으로 특별한 관심이 쏠린 제도이기도 하다. 2017년 긴급복지 예산은 1,013억 원이다.
공적연금도 기본소득 대체 재원 중 하나다. 강남훈 교수는 기본소득 재원을 빠르고 확실하게 마련할 수 있는 수단으로 ‘국민연금’을 꼽았다. 국민연금은 2015년 2,157만여 명이 가입했고, 405만 명이 연금을 받고 있다.
국가가 실업자를 지원하는 실업급여(2017년 예산 5.8조 원), 고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고용유지지원 제도(2017년 예산 2.6조 원)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의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은 OECD 꼴찌 수준이다. 반면 GDP 대비 국가부채는 40%로, OECD 평균 114%에 비해 재정이 탄탄하다. 늘려도 한참을 늘려야 한다는 얘기다.
기본소득 예산 184조, 내 멋대로 사회보장제도 강화하기
▲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수용하는 기본소득 재정 모형의 1년 예산은 184조 원. 내 멋대로 184조 원으로 복지 예산을 편성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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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훈 교수의 2018년 기본소득 재정모형은 1년 예산 184조 원으로 월 3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 재원으로 사회보장제도를 얼마나 강화할 수 있을까? 내 멋대로 184조 원으로 복지 예산을 편성해봤다.
가장 먼저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보자. 지난해 8월 정부 통계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664만 명이다. 비정규직 평균 임금은 149만 원이고, 정규직 평균 임금은 236만 원이다.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 임금 수준으로 올리는데 1년에 68.4조 원 정도가 필요하다.
기본소득 184조 원으로 뭔들 못하리. ‘등골 브레이커’를 없앨 무상교육도 해본다. 현재 고등학교 대도시 수업료는 연평균 약 150만 원, 2016년 평균 대학 등록금은 667만 원에 달한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고등학교 의무교육 무상화에 1조 원이 든다고 말했고,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대학 무상교육 실현에 12조 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돈이면 무상의료도 어렵지 않다. 현재 건강보험공단은 20조 원의 흑자를 내고 있다. 이 흑자를 국민에게 돌려만 줘도 국민 부담은 많이 낮아질 것이다. 그래도 저소득층의 의료비 부담 해결엔 무상의료가 답이다. 더불어민주당은 현행 건강보험 보장률 60%를 실질적 무상의료에 가까운 90%까지 올리는 데 8.1조 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보장성 강화와 빈곤층 무상의료, 본인부담금 축소, 현금급여까지 포함하는 무상의료 모델에 16조 원 정도가 들 것으로 예측했다.
보육 대란도 해결할 수 있다. 2017년 영유아보육료, 가정양육수당 예산은 5.7조 원이다. 만 84개월 미만 영유아 1인당 약 150만 원의 양육수당 및 보육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이를 200만 원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1.4조 원의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
말로만 ‘청년, 청년’하지 말고, 모든 1인 청년 가구에 임대주택을 공급해 보자. 2017년 20-39세 청년 1인 가구는 17만 6천 명이다. 서울시는 2017년 청년주택 공급을 위해 예산 1.1조 원을 편성했다. 이 예산으로 임대주택 8만 가구를 공급할 계획이다. 1.2조 원의 추가 재원만 있으면 1인 청년가구 전체에 임대주택을 공급할 수 있다.
월평균 49만 5천 원을 받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 월 30만 원 기본소득은 별 실효성이 없다. 현재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는 약 127만 명으로, 1인 가구 평균 생계급여액은 49만 5천 원이다. 이를 두 배 수준인 94만 원으로 올리는 데 추가 재원 약 4조 원이 든다.
OECD 회원국 대다수는 실업부조 제도가 있지만, 한국에선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고용보험 미가입 노동자는 실업급여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2017년 13만 명을 넘은 장기실업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 최저임금 80% 수준의 실업부조를 제공해도 1.6조 원밖에 들지 않는다.
기초연금을 받는 소득분위 하위 70% 노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현재 약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받고 있다. 이를 두 배로 올리면 추가 재원 약 7.8조 원(2016년 기초연금 예산)이 든다.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크지만 일정한 소득이 없는 직업군의 지원도 필요하다. 특히 문화예술인이 그렇다. 2010년 문화예술 관련 종사자는 43만 명이다. 이들의 월 평균 수입은 100만 원이 안 된다. 문화예술인의 50%는 전업이 아닌 겸업을 하고 있다. 4.1조 원의 예산으로 최저임금 60% 수준의 문화예술인 수당을 지급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117.5조 원이다. 내 멋대로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했지만, 그래도 기본소득 재원 184조 원에서 67조 원이 남는다. <참세상> 설문 결과가 보여주듯, 국민은 주거, 의료, 교육 등에 많은 부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일반 서민들이 원하는 것은 주거, 의료, 교육 등 사회 공공 서비스다. 지금의 사회보장제도에 문제가 있으니 고쳐 달라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요구나 복지 사각지대에 대한 고려 없이 대선 주자나 일부 진보진영은 사회보장 수요를 기본소득으로 치환하며 기존 사회보장제도 마저 위협한다. 과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