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아(가명)
결혼한 지 8개월쯤 되었을 때, 시어머니가 시동생 대학등록금을 보태달라고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가족이니까 너희도 고통을 분담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간 뒤, 우리가 정말 가족인지 되짚었다. 결혼식 두어 달 전, 추석을 앞두고 잠깐 인사만 할 생각으로 시어머니댁에 갔다. 그녀는 괜찮은지 형식적으로라도 묻지 않고, 내 손에 프라이팬을 쥐여 줬다. 얼결에 배추전 30여 장을 부치며, 그녀가 앞으로 날 보조로 부리면 어쩌나 불안에 떨었다. 결혼하고 맞이한 첫 설에 그 많은 전을 부치며 ‘난 도대체 이 집안에서 뭐지?’ 했다. E와 결혼했다는 이유 하나로, 낯선 곳에서 얼굴도 본 적 없는 조상의 차례상을 준비하는 내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이상하게 느끼는 건 나뿐이었다. 시댁 사람들은 내 노동을 당연하게 여겼다. 나를 가족으로 여겨서일까? 차례를 마치고 같이 밥을 먹은 뒤, 부엌에는 성(姓)이 다른 세 여자가 있었다. 큰 시어머니, 시어머니, 나였다. E 씨들은 둘러앉아 과일을 먹었다. 나와 또래인 큰집 둘째 딸은 밥을 먹자마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큰아버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지시만 했다. 커다란 대야에 가득 쌓인 설거지는 시어머니와 내 몫이었다. 너무나 상투적인 풍경에 실소가 나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가부장제에서 며느리는 하녀구나. 돌이켜보면 시어머니는 처음부터 나의 임무와 책임을 정해 놓았고, 그대로 따라주길 요구했다.
결혼을 코앞에 두고 그녀는 나와 E에게 시동생의 양복을 골라 주라고 했다. 황당했지만, 결혼식 전 마지막 주말에 도련님과 쇼핑했다. 결혼식 하루 전, 그녀는 전화해서 시동생이 친구를 너무 많이 불러 하객이 예상보다 넘치는데 어떻게 하냐고 안절부절 했다. 기가 막혔지만, 결국 나는 친구가 좀 덜 오도록 조율하고, 만약 넘치면 근처 식당에서 따로 대접하면 어떠냐고 도련님을 달랬다. 전화인데도 도련님이 서운해 하는 게 느껴졌다. 대체 왜 내가 안 좋은 역할을 자처했을까 후회되고 분통이 터졌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를 앉혀 놓고 시어머니는 시동생에게 잘 해주라고 강조했다. 그녀가 정한 나의 임무 중 하나였다. 아버지 없이 이제 막 성인이 된 시동생을 돌보는 것.
그녀가 내게 처음 준 생일 선물은 앞치마다. ‘우린 맞벌이지만, 부엌일은 네 몫이라고 확인시켜주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에이, 설마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하실 리가. 내 피해의식이겠지.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설마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결혼 초기에 회사와 시댁이 가까워 그녀는 종종 E의 편에 음식을 챙겨 주었는데, 요리방법은 전화로 꼭 나에게 알려 주었다. 명절 전날에는 음식을 하러 자기 아들 E는 말고 ‘나만’ 오라고 했다. (그러나 같이 갔다.) 두통이 잦은 E를 위해 마련한 솔잎 효소를 나한테 주며, E가 아플 때마다 타주라고 했다.
아침마다 출근 전에 E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었던 그녀는, 나도 그렇게 하길 바랐다. 그녀가 정한 나의 또 다른 임무는 자기 아들이 건강하고 무사히 잘 지내도록 챙기는 것. 결혼하고 3개월 지났을 무렵 시어머니는 손자에 대한 욕구를 드러냈다. 처음에는 누가 손자를 봤다더라, 사촌의 아기가 어떻더라는 식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그래도 내가 반응이 없자 설날에 큰어머니와 사촌 누나의 입을 빌려 출산 계획을 물었다. E와 나는 결혼 전부터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지만, 시댁에서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당장은 돈이 없어 못 낳는다고 답했다. 얼마 뒤 시어머니는 급기야 자궁에 좋다는 익모초 환을 먹으라고 주었다. 예상 못 한 바는 아니지만 너무나 빨리 찾아온 그녀의 요구, 나의 임무는 손자 낳아주기. 난 시댁에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토록 많을까? 게다가 요구받는 내 입장에선 매 순간이 억압이고 차별이다. 이 모든 임무는 시어머니가 시동생 등록금을 보태달라고 했을 때처럼 가족이라는 이유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가족일까? 나는 시댁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언제부터, 왜 가족인가? 나는 시댁의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호감도 관심도 없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노력 없이 역할만 강요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의 결혼이다. 시댁에서 나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존재가 아니라 며느리 역할을 다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 노동은 당연했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말은 너무나 그럴싸한 포장이다. 결혼식 날짜를 잡은 뒤에 시어머니는 나에게, 이제 한 가족이니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편하게 지내자고 했다. 바보같이 그 말을 믿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혼인성사(천주교식 결혼예식)를 결혼식보다 먼저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일정상 어려운데도 막무가내였다.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신앙에 관한 어머니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다’고 의견을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며 역정을 냈다. 그녀가 말한 ‘솔직하고 편하게’에 나는 해당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에 한과 억울함이 쌓였다. 솔직하면 화를 내니 시어머니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시댁과 사이좋게는 아니어도 형식적 관계는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힘들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가부장제 귀신에 씌어 있었다. 시댁과 대화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족이 되려는 노력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영혼이 털리는 마당에 나부터 살고 싶었다.
이번 설에는 시댁에 가지 않았다. 몇 달째 시어머니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있다. 이래도 되나 싶어 혼란스럽고 잠 못 이루며 고민했다. 그러다 달님이 “더 나쁜 년이 되도록 하여라. 니가 애매한 나쁜 년이라 마음이 무거운 것이야”라고 말하는 그림을 봤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더 나쁜 년이 돼야겠다. 마음이 편해졌다.
대부분의 가족은 TV에 나오는 것처럼 화목하기는커녕 싸우고 갈등하고 때론 남처럼 지낸다. 나와 시어머니도 그런 가족 중의 하나가 될 뿐이다(계속).[워커스 29호]
가족이 될수 없네요, .요즘세상 시댁과 가족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리석은거죠..가족이 될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