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아
“임신하는 데 문제없을까요?” 난소에 혹이 있어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아버지가 물었다. 순간 뒤통수 어딘가에서 신경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수술 뒤 한쪽 난소는 거의 남지 않았고, 나머지 한쪽은 7-80% 정도 남았다.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속으로) 내가 아이 낳는 도구냐고 분노하면서도 저 반응이 사람들의 상식이라고 각인된 것 같다. 나는 위축됐다. 당시 연인이었던 E에게도 수술이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E는 내 난소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당시에는 괜찮다는 위로조차 없어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별문제 아니라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나았다.
결혼을 결정하고 내 난소의 상태를 시댁에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 E와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오래전에 합의했는데도 신경이 쓰였다. 요즘은 결혼 전에 건강검진도 받는다던데 시댁에 내 결함을 숨기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E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시어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우리의 결혼 결심을 듣고 E에게 고마워했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하자’ 있는 자식으로 여기고 있었다.
결혼은 준비과정부터 내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확인시켜 줬다. 30년 넘게 여성으로 살면서 받은 차별과 억압이,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는 그 빈도가 훨씬 잦았고, 타격도 컸다. 무엇보다 나도 모르게 가부장제 귀신에 씐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었다. 드라마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에 나온 대사처럼 나는 “사회적 관습과 이목이 만들어 낸 기성품 중 하나”였다.
나는 언제부터 남편의 밥이 아내의 몫이라고 여기게 되었을까. 시어머니가 음식은 E에게 들려 보내면서 요리법은 내게 알려줬을 때는 발끈해놓고, 나는 ‘밥 먹었어? 뭐 먹었어?’라고 물으며 E의 끼니를 챙겼다. 내가 외출해서 E만 집에 있을 땐 라면을 먹을까 봐 걱정돼, 어디에 무슨 반찬이 있으니 잘 챙겨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다. 남편과 자식의 끼니 걱정에 외출도 맘대로 못하는 사람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렇다는 것을 깨닫고 더는 E에게 밥 먹었냐고 묻지 않기로 했다.)
화목한 가정, 누군가는 억압을 참고 있다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아들만 둘을 둔 시어머니에게 가끔 딸 같은 존재가 돼 주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안부 전화하고, 한 달에 한두 번은 같이 시간을 보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결심은 결혼식을 치르기도 전에 깨졌다. 나는 도대체 시어머니와 편한 사이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사이좋은 고부 사이를 실제로 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E는 나보다 사회적 통념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그가 말했다. “우리 역할로 살지 말자. 아내 역할, 남편 역할, 며느리 역할, 자식 역할로 살지 말자.”
처음에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주어진 역할은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나는 집안일을 세분화해서 각자 도맡는 방식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E는 그 어떤 일도 누군가의 책임으로 두길 원치 않았다. 나는 주말에 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청소가 돼 있지 않으면 예민해졌다. (주말은 청소와 빨래를 하는 날이다.) 그러면 그는 누군가 집안일을 하면 고마워할 일이지, 안 한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따졌다. 집안일은 우리 둘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빨래와 설거지는 쌓였고, 바닥은 더러운데 누군가는 책임지고 해야지!’라고 응수했다.
같은 주제로 몇 번 더 논쟁이 오갔다. E의 기준으로는 청소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지만 내가 원할 때 그는 같이 청소한다. 내가 청결에 신경을 쓰기에 (요구한 적은 없지만) 그는 앉아서 일을 본다. 그의 말은 집안일을 내버려 두자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책임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방점이 있었다. 이런 과정이 지나고, 나는 더는 집안일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집안일은 소소한 예지만 결혼 생활에서 서로에게 역할과 책임을 강요하지 않기가 쉽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달리 E는 내게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지만 나는 만약 E가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가장이라는 역할을 맡기고 싶었고, 이 사회가 요구하는 며느리, 아내 역할에 가까워지려고 했다. 그래야 안전하고 행복한 가정이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가장이랍시고 집안에서 군림하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봤으면서도 나는 어째서 이런 세뇌를 당했을까.
이제 나는 누군가 “우리 집은 화목해”라고 한다면 ‘그 가족 중 누군가는 차별과 억압을 참고 있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대개 여성이다. 내가 좋은 며느리 역할을 그만두려는 이유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를 본다. 며칠 전 내 자궁에 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시어머니 생각이 났다. 내 몸은 손자를 원하는 그의 바람과 더욱더 멀어지는데,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왜 아픈 와중에도 이런 생각이 났을까. 이런 날 얼마나 더 겪어야 자신을 억압에서 놔줄까.[워커스 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