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적변화가 없는 한미관계
문재인 대통령의 첫 한미정상회담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 북한은 ICBM ‘화성-14형’ 발사로 응답하며 문제의 본질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그것은 북한에 대한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고 체제를 보장해달라는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과 핵문제는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핵군축 문제로 확장될 여지를 남겼다. 더 이상 북한붕괴론이나 김정은 참수작전 등 북한을 자극하는 전략을 구사하지 말라는 신호이다. 북한은 여전히 20여 년 전 고난의 행군 구호인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간다”는 원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북한은 자신이 정한 길을 자신이 정한 원칙에 따라 간다.
이러한 북한의 행태를 두고 미국은 북한에 원유 공급을 제한하는 초강력 제제를 결의하고 국제사회와 함께 대응해 나가겠단다.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 야욕을 포기할 때까지 대북 제재와 압박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 역시 북한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것”이라고 공헌한 바 있다. 북한과 미국 모두 동일한 패턴을 연출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이는 한미정상회담과 베를린 구상에서 표방한 문재인 정부의 대북 구상이 수정-보완돼야 함을 의미한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미국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운 트럼프 행정부가 한미관계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우려(?)의 상황과, 문재인 정부의 출범으로 인한 기대가 교차하며 개최된 회담이었다. 문재인 정부에게는 커다란 부담이면서도 한미동맹을 확인하는 게 핵심 과제였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공동 의제인 북핵문제와 실익에 기반을 둔 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한미 공동성명에는 ①한미동맹 강화 ②대북정책 공조 ③경제성장 촉진 위한 공정한 무역 ④여타 경제 분야 협력 강화 ⑤글로벌 파트너로서의 적극적인 공조 ⑥동맹의 미래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경향신문, 2017.7.3.).
예상대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한 인식과 대응방식에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양국 대통령의 첫 만남이었기 때문에 이견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실패로 평가한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한국이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에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문재인 정부가 제재와 대화를 병행해서 북핵문제 해결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큰 이견은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최대 성과로 꼽는 것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도권을 확인한 것이었다. 평화적 방식의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합의는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련의 흐름을 차단한다는 의미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정상회담의 이름에 실패란 없다’는 말처럼 첫 정상회담이 대부분 실패하지 않은 전례를 고려하면 과도한 평가는 곤란하다. 첫 정상회담이라 질적인 변화까지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기존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회담이었다. 일부 언론들의 평가를 보면 ‘첫 관문을 무난히 통과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외교관계가 오디션 프로그램도 아님에도 그런 표현은 자발적인 굴종에 불과한 심각한 문제이다.
게다가 한미 공동선언문의 주요 내용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듯, 모호하고 불확실한 문제가 산재해 있다. 제재를 통해 대화로 끌어들인다는 모순된 구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회의적이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원하면서 핵 의제는 문재인 정부가 아닌 트럼프 행정부와의 핵심 의제이며, 사드 배치에 대한 절차적 이해를 공유한 상태에서 한국의 주도권 행사는 모호하다.
진일보한 베를린 구상
이러한 모호성과 불확실성 그리고 북한의 ICBM 발사를 의식한 듯 7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한반도 평화 구상’을 발표하며 대북정책의 원칙과 비전을제시했다. 이번에 발표된 구상에서는 대북정책 3원칙으로 대북 적대 정책, 북한정권의 교체와 붕괴, 인위적인 통일 가속화 등을 추구하지 않을 것임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5대 정책방향’으로 평화 우선, 체제보장의 비핵화,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신 경제지도, 교류협력의 지속 추진 등을, 이를 실행하기 위한 로드맵으로 ‘4대 실천과제’를 공개했다. 이른바 ‘쉬운 일부터 시작해 나간다’는 선이후난(先易後難) 접근방식으로 이산가족 상봉과 성묘, 북측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DMZ 적대행위 중지, 남북대화의 재개 등이다.
모호한 한미 공동선언문 보다는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역대 대통령 처음으로 언급한 ‘평화협정 체결’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원칙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방향으로 커다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문제 해결 방식은 과거와 동일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어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남한의 적극적인 남북대화 재개 의지표명에 대해 북측의 반응은 아직까지 싸늘하다.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명백히 하고 핵보유국의 지위를 바탕으로 대화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서 당장은 스포츠 등 민간 교류협력이나 대화에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11일(현지시간) 미 알래스카에서 실시된 사드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첫 요격시험을 통해 사드 배치 필요성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국내 정치권 일각에서 여전히 ‘사드 배치 무용론’이 제기되는 데 대한 대응으로 풀이된다. 이는 북핵 문제에 대해 출구전략을 마련하지 못한 트럼프 행정부의 무능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미국이 추진하는 대북 제재는 중국의 협조가 관건이라는 것을 국제사회 모든 나라가 알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거부권 행사를 아랑곳하지 않을 태세다. 중국의 반대로 대북 제재 결의안 채택이 무산되면 미국은 ‘세컨더리 보이콧’을 포함한 독자 제재에 착수해 중국까지 제재 대상에 포함시킨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이는 북핵문제를 포함해 동북아 정세를 더욱 긴장되고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미·중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충돌하게 되면 그 여파는 한국을 직격하게 된다.
따라서 제재와 대화를 병행하면서 평화적 방법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나아가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및 구상은 ‘미.중 충돌’ 상황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미국은 북핵 문제의 최고 책임국가이자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나라다. 중국에 책임을 미루는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미국이 직접 나서야 한다. 미국이 군사적 옵션과
인위적인 정권교체를 포기했다면 그에 걸맞은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북.미 대화다. 과거와 같은 방식이 아닌 북.미 적대 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담대한 구상과 제안이 필요하다.
중국과 러시아가 제시한 ‘쌍중단(북한의 핵 동결과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였는데, 미국이 맞교환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버렸다. 북한이 핵동결부터 폐기까지 단계별 비핵화 프로그램을 수용한다면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체제보장이 제공돼야 하는데, 트럼프는 핵동결 단계에서 보상은 절대 없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오바마 행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담대한 정책적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 이제라도 동결에 앞선 유예의 조건을 검토하고, 불능화를 동결의 최종형태가 아니라 비핵화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북핵 문제의 책임이 가장 큰 미국이 대안은 내놓지 않으면서 현실적 접근법을 묵살한다면 결국 자기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주도권이 발휘돼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에게 북미 직접대화와 대안 제시를 요구해야 한다. 얼마 전 문제가 된 문정인 외교안보특보의 발언은 그 시작이었는데, 기회를 상실했다. 하지만 또 다른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북한의 안보 문제가 선결되지 않으면 남북 대화도 늦어질 것이므로 현실성있는 대북제안을 8.15광복절을 기해서 제안해야 한다. 그것도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을 겨냥한 대담하고 수준 높은 메시지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남북 특사회담도 고려해야 한다.
남북 대화를 통해 북한을 설득하고 그 내용을 가지고 미국, 중국, 일본을 설득해 주도권을 확보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들 국가의 공동 목표가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 비핵화라면 그에 대한 목표와 비전을 공유하고 북한과 소통한 결과를 가지고 문재인 정부가 중국, 미국, 일본에게 구체적 상황에 대한 요구를 적극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목표는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와 직결되는 것이며, 남한의 민중들에게 중요한 과제다. 이제 한미동맹의 관성으로는 평화와 안전이 지켜질 수 없다. 과연 문재인 정부는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워커스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