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 사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두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의원 비례후보 경선이 진행되던 정의당에서 벌어진 일이다. 비례 1번 후보로 세 명이 나섰다. 그 중 한 명은 여성, 청년이자 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장 경력을 지닌 정혜연 후보였다. 어쩌면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첫 여성 성소수자 시의원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반대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정의당 내의 성소수자 당원들이다. 이 일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정책토론회에서 벌어졌다. 정혜연 후보가 권수정 후보에게 이렇게 질문했던 것이다.
“권수정 후보님께 질문 있습니다. 여성민우회 회원이시고 민주노총의 전 여성위원장이신데 얼마 전에 여성민우회와 민주노총에서 메갈리아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서울시 여성관련 정책을 추진할 때 메갈리아 같은 혐오주의 논쟁이 일어날 수 있는데 서울시 여성정책을 추진할 때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답변해 주십시오.”
정혜연 후보가 질문한 ‘여성민우회와 민주노총에서’ 일어난 ‘메갈리아 논쟁’이란, 다름 아닌 게임회사 IMC게임즈의 대표가 한국여성민우회의 SNS 계정을 팔로우하고 페미니즘 관련 내용을 리트윗했다는 등의 이유로 원화작가인 여성 직원을 불러 ‘페미니즘 사상검증’을 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게임의 유통사인 넥슨에서는 지난 2016년 메갈리아의 후원금 모금 참여를 인증하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게임 클로저스의 성우를 계약해지 한 바 있다. 그리고 당시 정혜연 씨는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가 이 사건에 여성노동자의 노동권 침해라는 논평을 내고 전국위원회가 특별결의문을 채택하자, “절망했다” 며 성소수자위원회를 탈퇴했다. 정혜연 씨는 탈퇴 입장을 밝히는 글에서 “연대를 파괴하고 서로를 찢어놓는 혐오와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선을 그어야 할 곳이 어디였던가는 클로저스 성우 계약 해지 사건 이후 벌어진 일들이 말해주고 있다. 그 사건 이후 일부 게임 유저들은 당시 해당 성우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힌 사람, SNS에서 페미니즘 관련 계정을 팔로우한 사람, 혹은 관련 글을 리트윗하거나 공감한 사람이 있으면 아예 해당 게임과 관련 업체를 ‘메갈게임’으로 간주하고 목록을 만들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게임 업계 노동자들의 SNS 사찰과 사상 검증은 ‘반 페미니즘 운동’의 실질적인 해고 협박의 수단이 됐다.
‘페미니즘 사상 검증’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비단 게임 업계만이 아니다. ‘메갈’은 페미니스트를 낙인찍기 위한 이름이 됐고, 이러한 일련의 공격들은 아이돌 가수, 방송작가 등 대중적인 압력에 영향을 받기 쉽고 상대적으로 계약 관계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을 향해 지속되고 있다. 수많은 여성들이 불안정한 노동 조건에서 페미니즘을 이유로 쉽게 생계와 생존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현실은 상황의 심각성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번 IMC게임즈 사건에 대해서마저 ‘메갈리아 같은 혐오주의 논쟁’이라는 시각에서 한 치도 달라진 바 없이, 도리어 그들과 똑같이 권수정 후보를 사상검증의 시험대에 올렸던 것이다.
“권력과 정치의 장을 뒤집는 공동의 싸움이 필요해”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정의당 인천시당 성소수자위원회와 ‘누구나 존중받는 차별 없는 사회를 바라는 성소수자 당원 일동’은 정혜연 후보의 이와 같은 행보를 비판하며 권수정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성소수자 당원 일동’은 이렇게 썼다.
“‘성소수자 정치인’은 누구일까요? 그것이 단순히 정치를 업으로 삼는 성소수자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이미 많은 성소수자 정치인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삶이 그렇듯 인간은 어느 한 정체성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속성들이 서로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나이듦이 곧 성숙함을 보증하지는 않듯, 성소수자 정체성만으로 그가 성소수자 인권의 옹호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당사자라는 사실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나, 정치적 방패로 수단화하는 불행한 기회주의자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염원해 마지않는 ‘성소수자 정치인’이란, 성소수자의 존엄과 인권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정치인을 말합니다.”
이들은 정체성이 정치의 내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정치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정체성이 아니라 그가 하고자 하는 정치의 내용이라는 것을 분명히 짚어주었다. ‘성소수자인’ 정치인 이기에 앞서, 성소수자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구조와 정치의 장을 제대로 파악하고 변화시켜나갈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구조와 정치의 장이란 당연히 ‘성소수자에게만’ 작동 하는 억압과 차별의 구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따라서 우리는 단지 각자의 정체성 정치 사이의 연대가 아니라 그 권력과 정치의 장을 뒤집는 공동의 싸움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선언한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이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에 있어서도 분명히 의미 있는 한 장면으로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던 시점에 또 하나의 인상적인, 아니 참담한 소식을 들었다. 어느 학회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인 토론문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엘지비티(LGBT)는 자신들이 더 약자인 것을 무기로, 페미니즘에 총알받이를 요구하며 응석부려도 모성처럼 받아주어 온 관례에 따라 페미니즘 안에 기거하면서 마치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페미니즘에게 내놓으라는 태도는 아닌가? 함께 합시다가 아니라 왜 우리의 현안을 제1로 놓지 않느냐(젠더 감수성의 결여) 하면서 요구하는 것 아닐까? 자신들의 적에게 쏘아야할 포탄을 약한 사슬 총받이에게 겨누고 있는 것 아닌가?”
이 토론자는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참,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