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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성소수자 그리고 환대

2018년 8월 17일Leave a comment45호, 레인보우By 박종주

[출처: 김용욱]

박종주(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무지개 연대는 국경을 박살낸다.” 지난 7월 14일 열린 서울퀴어퍼레이드에서 소수자난민인권네트워크가 들고 행진한 플래카드의 문구다. “성소수자는 난민을 환영합니다”라는 문장이 적힌 피켓을 들고 행진한 참가자도 있었고, 난민 관련 정책 개선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진행한 부스도 있었다.

한편 퀴어퍼레이드가 열린 서울광장 인근에서는 개신교 단체들이 주최한 ‘반동성애’ 행사 몇 개가 열렸고 가까운 광화문광장 곁에서는 인터넷 카페 난민대책국민행동이 주최한 제주 예멘 난민 수용 반대 집회가 열렸다. 터져 나오는 혐오 앞에서, 퀴어퍼레이드는 혐오에 지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를 보듬는 자리가 됐다.

성소수자와 난민은 가까운 존재들이다. 단순히 난민 가운데 성소수자가 있다거나 성소수자 가운데 난민이 있다거나 하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출신국의 성소수자 탄압은 난민 신청을 결심하게 하는 사유 중 하나다.1) 지난 2013년에는 동성애자인 한국인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실이 알려져 신문 지면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은 1992년에 난민협약에 가입해 1994년부터 난민 신청을 받고 있으며 2013년부터는 난민법을 시행하고 있지만 누적 난민 인정률은 5%에 채 못 미치는 낮은 수준이다. 2013년 1574명이었던 난민신청자 수는 2016년 7542명으로까지 급증했지만 2013년에 57명이던 난민 인정자는 이후로도 연 100명 내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저 바늘구멍을 뚫고 한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이들 사이에, 성소수자들이 있다.

성소수자 박해를 이유로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받지만, 탄압이 심한 사회에서는 성소수자임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기에 이것부터가 쉽지 않은 관문이다.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이성과 결혼했던 이력이 있는 경우는 물론 이성 소개 업체 이용 흔적만 있어도 거짓 신청을 의심받는 것이다.

그다음 단계 역시 지난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이 박해받았고 돌아갈 경우 계속 박해받을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구체적인 경험의 기록을 제시해야 한다. 정체성을 숨기며 살았기에 직접적인 폭력에 노출되지 않았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관련 신문 기사 등 자료를 내놓을 수 없는 경우 난민 지위 인정은 요원한 일이 된다.

심지어 ‘정체성을 숨기고 살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2016년 대전고등법원의 한 재판부는 동성애자 탄압을 이유로 난민 인정을 요청한 알제리인 A씨에 대해 “(박해에 대한) A씨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족들과 떨어진 알제리 내 다른 곳에 정착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며 “이게 A씨에게 지나치게 불합리하고 가혹하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2)

언어적 장벽으로 한국인 공동체로의 접근이 어렵고, (성소수자 혐오와 같은) 문화적 문제로 한국 내 자국인 공동체로의 접근 역시 어려운 점, 한국 역시 성소수자와 이주민을 차별하는 사회인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고립 속에서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성소수자와 난민이 가깝다는 것은 또한, 성소수자 탄압이 난민 인정 사유 중 하나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최근 어느 연예인이 성소수자 공동체를 향해 띄운 ‘러브레터’ 한 통을 읽었다. 미국 빌보드사가 6월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을 맞아 기획한 연재 중 한 편이었는데, 바로 가수 티파니 씨가 쓴 것이었다.3) 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살아가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제 커리어에 있어, 저는 종종 문화적으로 오해 받고 길을 잃었으며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자기애, 무조건적인 사랑, 수용, 표현의 자유, 그리고 희망. 성소수자 공동체는 지속적으로 저에게 이런 것들을 불어넣어 주었고, 제가 갈 곳이 없다고 느꼈던 시기에 계속해서 나아갈 용기를 줌으로써 제 삶에 큰 긍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물론 그는 난민이 아니지만) 이처럼 문화적, 인종적 소수자로서의 경험과 성적 소수자로서의 경험은 여러 각도에서 만난다. 사회가 제시하는 정상성 바깥에 있다는 이유로 혐오와 차별을 경험하는 삶, 서로를 환대하고 보듬으면서 굴하지 않고 나아가는 삶들로서 말이다. 어떤 공동체가 다른 이들보다 먼저 누군가를 환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로를 환대하고 서로에게 환대 받은 경험을 통해서일 것이다.

성소수자와 난민만의 일은 아닐 테다. 이들과 연대하는 여성, 노동자, 장애인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가진 것 없이도 서로를 기꺼이 맞이하는 이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환대’라는 말을 생각한다. 반갑게 맞아 후하게 대접한다는 것, 그것은 나의 자리를 기꺼이 상대에게 내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당연하게 내 것인 자리는 없다는 사실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환대 덕분에 이 자리에 있다.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서 배운 바다.[워커스 45호]

[각주]
1) 난민협약 상의 난민 유형 중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으로 인해 박해 받는 경우가 명시돼 있다. 특정 사회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탄압에 대해 출신국 정부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을 경우 난민 신청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 연합뉴스 2016년 8월 18일자 기사 「“조국 가면 박해 받아”…‘동성애 알제리인’ 난민 인정될까」.
3) https://www.billboard.com/articles/news/pride/8462334/tiffany-younggay-pride-love-letter-lg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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