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이른바 베네수엘라의 위기가 가시화된 지 3년째다. 2016년 여름부터 식료품 부족으로 상점 밖에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의 사진과 함께 베네수엘라가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2017년 4월부터 8월초까지 마두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집회가 연일 계속됐다. 공권력은 4개월 남짓 이어진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공식 통계에 따르면 127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지난해 5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마두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자 선거의 공정성 문제가 불거졌다. 그리고 베네수엘라 위기는 지난 1월 23일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날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은 스스로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언했고,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3년 동안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여러 차례 재배치됐다. 위기의 연쇄는 위기를 변화무쌍한 것으로 만들었다. 장기집권과 부패가 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위기, 지폐로 공예품을 만들어 팔아도 될 정도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보여주는 경제 위기, 미국의 정치적 압력과 경제제재에서 확인되는 주권의 위기, 후안 과이도를 지지하는 대중들의 시위가 보여주는 차베스주의의 위기, 자원의 저주를 풀어줄 마법을 알아내지 못하는 한 산유국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국제관계의 위기. 각각의 위기상황은 다른 위기상황을 움켜쥐고 있다. 위기의 연쇄를 끊을 방도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은 위기의 연쇄를 엮어낼 경첩을 매달았다.
모두가 목격한 텅 빈 진열대와 종이쪼가리가 돼버린 볼리바르화
베네수엘라 위기의 신호는 2013년부터 감지됐다. 꼬박 14년 동안 베네수엘라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차베스가 3월 5일 암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차베스가 투병하던 시기 이미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던 경제위기가 가시화됐다. 경제 위기의 신호는 두 곳에서 잡혔다. 첫 번째 신호는 볼리바르화의 가치 하락이었다. 2012년 20% 수준이었던 인플레이션은 2013년 50%를 넘겼고, 2017년 2000%에 이르렀다. 두 번째 신호는 국제원유가격의 하락이었다. 2013년 말 배럴당 100달러에 육박했던 원유가격은 2014년 하반기부터 급락하기 시작해, 2016년에는 24.25달러까지 내려앉았다. 유가 하락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미국 셰일가스의 대량생산이었다.
경제 위기의 첫 번째 신호였던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다양한 요인이 지목됐다. 그 가운데 가장 편하고 가장 먼저 회자된 것이 차베스의 포퓰리즘이었다. 차베스가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베네수엘라는 차베스가 남기고 간 포퓰리즘의 대가를 치르게 됐다는 저주 섞인 분석이 쏟아졌다. 복지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통화량을 증가시켰고, 그것이 볼리바르화의 가치 하락을 야기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정부가 통화량을 증가시킨 것이 인플레이션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인플레이션 증가 속도가 통화량 증가 속도보다 앞서 있었다는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효과적인 통화정책을 추진하지 못했지만, 빗발치는 화살을 혼자 받아내야 할 만큼 전적인 책임을 질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다.
두 번째로 언급되는 원인은 달러와 볼리바르화의 환율 정책이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경제구조에서 달러는 매우 중요하다. 베네수엘라는 전체 수출의 95%를 석유산업에 의지하고 있으며, 국가경제의 25%가 석유산업에 의존한다. 더구나 비석유부문 제조업이 매우 취약한 상태에서 대부분의 기본소비재는 수입에 의존해왔다. 말하자면 베네수엘라는 국영석유기업인 PDVSA의 원유수출을 통해 외화 대부분을 확보한다. 원유의 거래대금은 달러로만 이루어지므로, 베네수엘라가 확보하는 외화 대부분은 페트로 달러이다. 외화를 확보하는 PDVSA가 국영기업이므로 외화거래의 중심에 국가가 있다. 더구나 베네수엘라 경제구조에서 해외교역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베네수엘라 정부는 환율을 엄격히 통제해왔다. 2003년부터 2018년 1월까지 식료품 및 의약품과 같은 생필품 수입을 위해 적용되는 보호환율과 그 외 재화 수입에 적용되는 상업환율의 이중구조가 유지됐고, 원칙적으로 개인은 달러를 상품으로 취급할 수 없었다. 달러가 필요한 수입업자는 정부에 달러를 요청해야 했다. 달러로 수입대금을 지불하려면 길고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쳐야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생필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달러라는 도구의 사용을 통제하려 했지만, 달러는 도구로 남아있지 않았다. 달러는 매우 값나가는 상품이었다. 정부가 이 값나가는 상품을 통제하려 했지만, 온전히 통제할 능력은 없었다. 국가가 통제하려 했기에 그 상품은 더욱 비싸졌다. 부패한 관료들은 달러를 빼돌려 암시장을 키웠고, 수십 배로 벌어지는 보호환율과 상업 환율 사이의 격차는 암시장을 활성화시켰다. 심지어 외화유출을 막고 환율을 안정화시키는 것이 목적인 외환통제위원회(CADIVI)가 달러유출의 주범으로 지목되곤 했다. 베네수엘라 경제위기의 세 번째 원인으로 지목되는 부패는 환율정책의 파생물과 같은 것이었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상점의 텅 빈 진열대가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를 보여주는 이미지로 사용됐다. 일반적으로 이런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다. 상품 구입 대금이 없는 빈털터리가 됐거나, 누구에게도 물건을 살 수 없는 외톨이가 됐다는 의미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텅 빈 진열대가 말해주는 것은 진열대에 올려놓을 물건을 구입하는 절차가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그 물건보다 더 많은 이윤을 안겨줄 새로운 상품으로 돈이 몰렸다는 뜻이었다. 생필품을 수입하기 위해 필요하다던 달러는 생필품 수입대금으로 지출되는 대신 값비싼 상품으로 변신해 암시장에 다시 나타났다.
경제위기의 두 번째 신호였던 2014년 국제유가하락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국제유가하락은 베네수엘라 입장에서 달러의 감소를 의미했다. 2015년부터 베네수엘라 정부는 달러 유통을 줄였고, 달러가 필요했던 민간 수입업자들은 암시장을 찾았다. 암시장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2017년 민간업자의 절반이 암시장에서 달러를 손에 넣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암시장의 환율은 수입상품의 가격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물가는 상승하고, 달러는 모두의 사랑을 받는 귀하고 비싼 상품이 돼 갔다. 그럴수록 볼리바르화는 쓸모없는 종이로 변해갔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바탕에는 석유경제에 종속된 베네수엘라의 산업구조와 석유경제를 움직이는 페트로 달러라는 덫이 있다. 차베스는 달러 시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고정환율제를 도입했지만, 오히려 시장의 왜곡을 가져왔다. 그리고 달러를 앞세운 미국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국가공동체(CELAC)을 출범시키는 등 지역경제연합체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2013년 차베스의 죽음을 시작으로 이른바 라틴아메리카 핑크타이드는 우파의 물결에 휩쓸려버리고 말았다.(1)
모두가 말하는 각자의 민주주의 위기
2013년 경제 위기는 차베스 사망이 야기한 정치적 위기와 맞물린 현상이었다. 3월 5일 차베스가 사망한 후 4월 14일 치러진 선거에서 부통령이었던 마두로가 당선됐다. 총 6명의 후보가 경쟁한 선거에서 투표율은 79.69%을 나타냈고, 차베스의 후계자로서 마두로는 50.61%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러나 2위 후보와 득표율 차이는 1.49%에 불과했다. 1999년부터 시작된 차베스주의는 1.49라는 아슬아슬한 수치가 보여주는 불안감과 함께 마두로에게 계승됐다. 이미 2012년 차베스가 3선에 성공했을 때부터 국내외에서 장기집권과 독재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다. 마두로는 차베스주의를 계승함으로써 독재자라는 낙인도 함께 물려받았다. 낙인을 떨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은 부재했고, 볼리바르 혁명의 서사는 퇴색하고 있었다. 14년째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혁명의 가능성은 1.49라는 수치만큼이나 희박하다. 그 가능성은 인플레이션이라는 가시적인 경제위기와 국제유가하락이라는 결정적인 위기요소와 함께 점차 희미해졌다. 결국 2015년 총선에서 볼리바르 혁명을 지지하는 좌파연합 GPP는 반차베스주의 연합인 MUD에 패배했다. MUD는 167석 가운데 109석을 차지하며 2016년부터 의회를 장악했다.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 내내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의회는 반차베스주의의 아성으로 변했다. 마두로는 차베스주의자로 구성한 대법원을 내세워 의회를 무력화시키려는 무리수를 두었고 2017년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발생하며 127명이 사망했다. 경제적 위기는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요구했으나 정치적 비전이 요구되는 시점에 비전을 보여주는 대신 폭력의 현장을 들켜버렸다.
이제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 위기와 온전히 결합됐다. 미국은 각 위기의 국면마다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1월 23일이 돼서야 전면에 나섰다. 그날 트럼프 대통령은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후안 과이도와 사전에 교감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할만큼 신속한 대응이었다. 페트로 달러 체제 안에 도사리고 앉아 차베스가 시도했던 모든 개혁을 포퓰리즘이라는 부정확한 언어로 폄하해왔던 미국은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모습을 드러냈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독점함으로써 자국과 대립하는 국가를 비민주적 독재국가로 분류하고 석유경제를 통제해왔던 미국은 이번에도 베네수엘라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냈다. 2014년부터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하기 시작했다. 그해는 미국의 셰일가스 생산량이 급증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하다.
지금은 한국 외교부까지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걱정하고 나섰지만,(2)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가장 일찍부터 염려했던 것은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2014년 베네수엘라의 인권과 시민사회 보호를 위한 법안’(Venezuela Defense of Human Rights and Civil Society Act of 2014)에 서명했다. 2015년에는 베네수엘라의 민주 질서와 인권을 유린한 혐의가 있는 베네수엘라 관료 7명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비자 발급을 제한했다. 2017년 여당 중심으로 구성된 대법원이 야당이 다수파인 의회의 입법권을 제한하려 했을 때도 미국은 베네수엘라 대법관들의 입국을 막고 미국과의 교류를 금지했다. 베네수엘라 대법원이 의회를 무력화시켜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마두로 정권을 옹호하고, 그리하여 반민주 인사로 분류된 특정 개인을 향해 취해졌던 미국의 경제제재는 점차 베네수엘라 경제 전반으로 확대됐다. 2018년 8월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PDVSA의 미국 내 자회사인 시트고(Citgo)의 금융거래를 차단했다. PDVSA에서 생산하는 원유의 30%를 정유하는 시트고는 미국 내 베네수엘라 원유판매를 통해 달러를 확보하는 중요한 창구였다. 미국 재무부는 1월 29일 베네수엘라 민주주의를 회복시킬 후안 과이도 대통령 대리에게 시트고의 은행계좌 사용권한을 내주었다.
또 다시, 미국
미국이 ‘민주주의’를 전유하는 동안 독재자로 낙인찍힌 마두로 대통령은 2018년 5월 3일 엘파이스(El País)에 실린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다른 모든 민주주의와 다르다. 우리를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의 민주주의는 엘리트에 의한, 엘리트를 위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볼리바르 혁명의 후계자로서 마두로에게 민주주의의 핵심은 “경제가 민중한 복무하는 것이지 민중이 경제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민주주의’를 미국으로부터 구해내고 싶었겠지만, 상점의 텅 빈 진열대와 다발로 들고 다녀야 하는 볼리바르화는 민중에게 복무하지 못했고, “다른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지난 1월 23일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은 2018년 5월의 대통령 선거의 정당성을 문제 삼으며 “우리는 이것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가져올 결과를 알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도달할 때까지 베네수엘라의 길거리들을 채워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라고 연설하며, 미국과 ‘민주주의’를 나눠가졌다.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한다는 사람들이 양진영으로 나뉘어 카라카스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하는 전 세계 국가가 양 진영으로 나뉘어 후안 과이도를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민주주의를 염려하며 베네수엘라를 지켜보는 사이 1월 국제유가가 4개월 만에 급락세에서 탈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베네수엘라 위기가 원유 공급에 차질을 가져오리라는 전망 때문이다. 덕분에 미국 원유 생산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원유가격의 하락은 막을 수 있었다.
21세기 사회주의인가 포퓰리즘인가를 둘러싸고 이념전에 휩쓸렸던 베네수엘라는 이번에는 석유를 둘러싼 신냉전의 전장이 돼가고 있다. 전장은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까닭에 전장이 되는 것은 비극이다. 전쟁의 당사자는 전쟁을 멈출 수 있지만, 전장은 전쟁을 고스란히 겪어내야만 한다. 베네수엘라는 당사자로서 경제적 정치적 위기와 직면해야 한다. 그것은 베네수엘라의 몫이다. 그러나 베네수엘라가 직면해야 하는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제멋대로 민주주의의 위기로 재배치하며, 베네수엘라를 민주주의의 전장으로 만드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 결과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미국은 이번에도 민주주의를 매개로 베네수엘라의 위기를 엮어냈다. 미국의 전철이 우려되는 현실이다.
[각주]
(1) 베네수엘라와 함께 라틴아메리카 핑크타이드를 주도했던 브라질의 노동자당은 2016년 지우마 호셰프 대통령의 탄핵으로 힘을 잃었고, 급기야 2019년 1월에는 극우파로 분류되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취임했다. 아르헨티나 역시 2016년 대선에서 우파로 분류되는 마크리 대통령이 당선됐으며, 이러한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201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가 세상을 떠났다.
(2) 2019년 2월 1일 한국 외교부는 “정부는 2018.5월 베네수엘라 대선 결과를 둘러싸고 현재의 혼란이 발생한 것에 대해 우려함. 정부는 모든 정치 주체가 참여하는 평화적이며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가 조속히 회복되기를 기대함. 정부는 베네수엘라 국민이 당면한 인도주의적 위기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에 적극 동참할 계획”이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또 25일에는 과이도 국회의장을 베네수엘라 임시대통령으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워커스 52호]
[참고문헌]
https://elpais.com/elpais/2018/05/01/opinion/1525190756_964649.amp.html?__twitter_impression=true
http://www.fnnews.com/news/201902041241257405?fbclid=IwAR1RJKBrIt7BDW6FDTWnWmGi7g7L7d_eR82UDIkFX-XqBJ_DS4-dgusvhd8
http://www.rebelion.org/noticia.php?id=252781
하여튼 마두로 정부가 옳습니다.
포퓰리즘은 무슨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