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식(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산업기술 발전과 모호한 고용관계의 확산
2017년 3월, 이세돌과 구글 알파고의 바둑 대결을 계기로 인공지능(AI)과 딥 러닝, 사물인터넷(IoT), 3D프린팅 등 새로운 디지털 기술 용어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기술에 의한 새로운 사회의 변화를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 과장됐다는 비판들이 제기되면서 관심은 초기보다 줄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열풍이 1년 이상 지난 지금, 기술발전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의 대응을 차분히 되짚어보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다만 지금까지 기술발전은 자본의 일방적인 독주였기에 한참 늦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재의 기술 발전을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르든, 아니면 디지털 전환이라고 부르든, 사회는 디지털화된 정보로 축적된다. 또 축적된 정보들이 인터넷 기반의 온라인 세계와 접합되고, 증폭하면서 사회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이 기술 변화가 야기하는 모습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노동력 매매와 생산이 이뤄지는 업무공간을 둘러싼 풍경 또한 과거와는 질적인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노동의 내용에 있어선 기존 작업조직 및 노동통제의 변화뿐 아니라, 노동-자본 간 고용관계에 있어 표준고용관계 (standard employment relationship)의 변화, 즉 ‘풀타임-종신고용-높은 기업복지’를 특징으로 하는 정규 고용의 약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자본이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관료적 통제’에 대한 자신감 속에 표준고용관계의 약화를 추동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 노동자의 지위는 ‘노동자(고용계약)’가 될 수도 있고 ‘개인사업자(업무위탁계약)’가 될 수도 있다. 또한 노동-자본의 관계가 기존의 ‘1 :1 관계’ 뿐 아니라 ‘1 :다수 관계’, 즉 위계적인 중층 고용 (hierarchical multiple employment)이 확산되면서 노동자의 실질적인 고용주가 여럿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노동-자본 관계도 모호해지고, 노동자와 개인사업자의 경계도 모호해지면서, 모호한 고용관계(ambiguous employment)와 불안정 노동 (precarious work)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이는 비단 고용관계의 모호성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노사관계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동네에서 여러 음식점과 건당 수수료를 받으며 배달하는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면, 단체교섭과 협상을 누구와 어떻게 할 것인가? 개인사업자로서 배달원들은 배달업체와 근무조건에 대해 단체교섭을 할 것인가? 아니면 진짜사장인 음식점들과 단체교섭을 할 것인가?
기술진보와 노동 :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
그러면 노동의 변화 어디에 초점을 둬야 할까?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ILO(국제노동기구)나 EU(유럽연합) 등에서 발간한 고용 관련 보고서들은 ‘노동의 미래(The Future of Work)’를 최대 화두로 제기하면서 디지털기술 발전, 플랫폼의 등장과 같은 사회 환경 변화에 따른 노동의 변화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주로 신기술에 의한 일자리의 위협과 감소에 주목하면서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고용의 축소에 따라 나타날 사회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노동조합운동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노동의 미래’가 아니라 ‘노동자의 미래’가 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후자는 기술 변화가 노동자와 노동운동에 미치는 함의가 중요하더라도, ‘노동의 미래’ 담론은 현재 노동자들이 직면한 기술적인 위협을 선정적으로 과장하고 충분한 검토 없이 설익은 대안−대표적으로 기본소득−을 제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ILO나 EU가 기술적인 위협을 실제로 추동하는 세력이 누구인지는 간과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의 노동 또는 노동자는 어떠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런 논쟁을 하는 것인가? 이에 앞서 1970년대 이후 과학기술 발전과 노동시장 변화가 중첩해서 전개되는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이념이 서구 선진국들을 주도하면서 노동 측면에서 안정고용은 해체되고 고용불안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편 1970년대는 처음으로 8비트 개인용 컴퓨터(PC)가 등장하고 여러 패킷 교환망들이 프로토콜을 통해 개발되면서 인터넷의 개념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정보통신기술의 빠른 발전은 경영학의 조직관리론과 접목되면서 유연조직이론, 유연생산모델로 확산됐고 불안정노동의 유형들이 서서히 등장했다.
그런데 21세기 초, 자유시장경제(LME)와 조정시장경제 (CME)가 서로 다른 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있다는 논쟁 (소위 VoC 논쟁)이 전개됐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적어도 노동시장의 관점에서는 불안정 노동의 확산이 두 경제 제도 모두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면서 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어졌다. 즉, 오늘날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노동의 유연화가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되면서 불안정 노동이 미래 노동자들의 화두가 됐고, 노동연구의 대세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부터 불안정노동을 연구해 온 칼레버그(2009)의 정의를 인용하면 불안정 노동은 기본적으로 불확실하고, 예측이 어렵고, 불안정(unstable)하고, 취약하고, 위험한 노동을 지칭한다. 또 이와 같은 불안정노동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초국적 자본의 영향력이 전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불안정 노동의 확산은 지난 30년간 자본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기존 노사관계 체계를 뒤흔들고 노동자들을 위협해 왔다.
불안정노동의 확산과 새로운 노동윤리? : 해커톤 사례
그렇다면 오늘날 디지털 정보기술과 불안정노동의 확산이 개별 노동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앞서 1970년대까지 정규직 ‘표준고용’이 점차 약화돼 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표준고용 개념의 약화는 기본적으로 노동비용 절감과 단기고용 정당화를 위해 자본이 의도하는 바이다. 하지만 비표준적인 비정규 일자리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해 있다. 따라서 자본 입장에서는 정규직 일자리에 대한 선호를 약화시키고, 불안정 노동의 확대에 부응하는 노동윤리를 새롭게 창조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합의된 평가가 있지는 않지만, ‘해커톤(Hackathon)’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노동윤리를 모색하는 자본의 시도를 읽어낼 수 있다. 해커톤은 해킹(hack)과 마라톤(marathon)의 합성어로 IT업계나 대학 관련 학과 내 다양한 분야의 구성원들이 팀으로 하루~1주일 동안 API(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 경연대회를 말한다. 페이스북 사내 해커톤 경연을 통해서 ‘좋아요’ 기능이 나왔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해커톤은 혁신의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4차 산업혁명이나 디지털 경제와 관련해서 해커톤이 소개되고 있으며, 실제 많은 IT기업들에서 해커톤 경연을 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동안의 고생에도 불구하고 해커톤 경연 수상자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그다지 크지 않고, 수상한 프로토타입들(prototypes)을 실제 기업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고 한다.
올해 초 에메랄드 출판사(Emerald Publishing)에서 노동사회학 연구 시리즈 31권으로 출간된 『Precarious Work(불안정 근무)』(2018)에는 해커톤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실려 있다. 공저자인 추킨과 파파달토나키스(Zukin & Papadantonakis)는 해커톤 경연의 참여관찰과 인터뷰들을 통해 기술적 재능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정식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고 단지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또한 일이 아니라 놀이, 재미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작업공간과 노동시간을 재조정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해커톤은 새로운 사회 조직의 출현을 위한 시공간을 형성하기에 중요하다.
이렇게 주조된 새로운 사회조직은 사회, 정치, 경제적 통제의 새로운 유형을 정당화한다. 해커톤 참가자들은 자발적이고 열정적으로 부불노동(unpaid work)을 하는데, 이를 자기 착취이자 동시에 자기 투자로 여긴다. 그리고 오늘날 IT 산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Work is Play, Exhaustion is Effervescent, and Precarity is Opportunity(일은 놀이이고, [열정을] 하얗게 불태우는 것은 상쾌한 것이며, 불안정은 기회이다)”라는 3개의 경구를 해커들의 하위문화로 체득하게 된다.
디지털시대에 새로운 노동규율은 아직 취업도 하지 않은 기술 분야 학생들의 이런 자발성에 기반해서 창조되고, IT기업과 일반기업들의 해커톤 후원 하에서 점차 확대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혁신이라는 명분으로 ‘새로운 노동의 시공간’을 주조해낸다. 홉스봄(E. Hobsbawm)이 근대 이후 (손목)시계의 보급이 공장운영에 필요한 노동규율을 체화시켰다는 점을 간파했다면, 해커톤 경연은 디지털시대, 불안정노동 시대에 필요한 노동규율을 학생시절부터 체화시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사관계의 변화와 노동조합운동의 대응
그렇다면 오늘날 디지털 기술발전과 불안정노동의 확산, 그리고 자본의 새로운 노동윤리 형성 시도에 맞서 노동조합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자본 주도로 기술변화와 불안정노동이 확산되면서 조합원수가 줄고, 교섭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노동조합운동 차원의 대응이 지난 20여 년 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러다이트’ 수준으로 기술도입을 저지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기술발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사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노동운동의 대응원칙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개입전략을 실천하는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다.
먼저 IT 및 정보통신기술 기업 노조들이 상당수 차지하는 국제노동조합연맹(UNI)에서는 ‘미래의 노동세계(the future world of work)’라는 노조 산하 특별위원회를 통해 정보기술의 발전, 인공지능 활용, 디지털정보 수집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권리 침해에 대한 대응원칙을 제안하고 있다. 데이터와 수집과 활용과 관련해서 업무관련 노동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수집, 투명성, 노동자들의 정보공개 청구권 보장, 단체협약을 통한 제도화 등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또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는 아직까지는 선언적인 수준에서 인공지능(AI)의 ‘윤리적 활용’을 강조하는 가운데 윤리적 블랙박스(Ethical Black Box)를 확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국제제조산별노조(IndustriALL)에서는 ‘산업(industrial) 4.0’에 대한 기존의 논의가 경제적, 기술 중심적인 접근에 매몰됐다고 비판하면서 기술변화와 고용의 관계에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제출하고 있다. 국제산별노조의 이런 문제의식은 사실 독일에서 먼저 진행된 ‘노동 4.0’ 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서는 새로운 생산설비로 추격하는 신흥 공업국들의 성장에 대한 위기감으로 자국 내 제조업 기반을 위한 ‘산업 4.0’ 정책이 추진됐는데, 주로 독일 제조업의 낡은 생산방식을 혁신하기 위한 디지털 기술혁신 방안 모색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이에 독일노총(DGB)은 산업 4.0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노동 4.0에 대한 녹서 (2015년 4월 발표) 및 백서(2016년 11월 발표)를 내고 노사정대표 및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정책협의 네트워크’에 적극 참여해 노동계의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했다. 독일 금속노조(IG Metall)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2014년 노조 내에 ‘노동의 미래 부서(Future of Work Department)’를 신설하고 전략수립 및 정책개발을 전담하도록 했다.
한국에서 디지털 정보기술이나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노동조합 차원의 대응으로는 2017년 7월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에서 <디지털 시대 노동의 대응 : 4차 산업혁명 바로보기>라는 보고서를 언급할 수 있다. 주로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미래차와 관련해서 노동조합 대응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독일의 노동 4.0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지만
디지털 기술 도입 및 4차 산업혁명이 한국 노동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떻게 전개될지는 누구도 확답할 수 없다. 다만 한국에서 자본은 이윤추구 목적으로 기술개발을 위해 끝없이 달리고 있는데, 노동조합들은 그 내용도 모른 채 지켜만 보고 있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로봇을 활용한 의료장비의 도입이 의사 및 간호사들의 노동조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금융산업의 핀테크 도입이 금융 노동자들의 미래를 어떻게 좌우할지 그저 막연하게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기존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노동조합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지만 이미 자본은 노동자와 노동조합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이윤경쟁에 혈안이 돼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다.
질주하는 자본에 의해 노동자, 나아가 노동자들을 포함한 취업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나빠지고 있다. 재해위험과 건강악화 가능성은 높아지고, 삶의 질은 나빠지고 있다는 진단이 세계 곳곳에서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한국뿐 아니라 유럽의 노동조합운동도 아직까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노동의 유연화 공세에 맞서 기존 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방어도 벅찬 상황이었다. 새로운 기술적인 변화양상에 대해 현상을 진단하고, 의미를 파악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지만, 일부러 장기적인 과제로 미루면서 계속 외면해 온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늦출 수 없다.[워커스 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