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하나의 도전에서 시작됐다. 장혜영 감독은 발달 장애를 가진 동생 장혜정 씨를 시설로부터 ‘모시고 나와’ 함께 살기로 했다. 물론 혜정 씨의 동의가 필요했기에 기간을 두고 열심히 꼬셨다. 드디어 2017년 6월, 어렵게 구한 전셋집에서 동생과 살기 시작했다. 장애인과 함께 살기 위해선 여러 지원이 필요하다. 낮 동안 일을 하려면 동생을 주간보호시설에 맡겨야 하는데 이런 종류의 공적 지원은 ‘서울에서 6개월 이상 거주’라는 자격을 충족해야 했다. 함께 살기 위해 6개월을 살아남아야 하는 과제가 이 자매에게 주어진 것이다. 시설 안에서 혜정 씨의 행동은 “어른이 되면”이라는 말에 막히곤 했다. “어른이 되면”이란 말이 필요 없는 세상에서, 자매는 어느덧 1년 6개월 넘게 함께 살고 있다. 영화 <어른이 되면>의 장혜영 감독을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어른이 되면’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해달라
단 한 번도 계획한 적 없지만 시끄럽게 진행 중인 당황스러운 프로젝트다.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중증발달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13살에 시설에 간 동생을 모시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좌충우돌의 일상을 글과 영상 으로 담아내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프로젝트다.
유튜브용 영상 제작에 이어 영화 제작까지 판이 커진 이유는?
유튜브 브이로그를 통해서는 ‘훅’ 치고 들어오는 일상적인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홍대 한복판에서 운동화를 사고 있는 발달 장애인을 보는 것만으로 전달되는 감성 같은 것. 그러다 하나의 스토리텔링 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흘러 가는지 명확히 찾고 싶은 마음에 영화를 구상했다. 장애계의 전선이기도 한 탈 시설 문제를 몇 분짜리 브이로그만으로 다루기엔 무리가 있어서 쭉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장혜영 감독은 영화 제작을 위해 2017년 텀블벅으로 후원자를 모았고, 5천만 원이라는 목표 금액을 108%로 가뿐히 넘어섰다. 모인 금액이 발판이 돼 2017년 6월부터 12월까지의 자매의 일상을 담은 영화가 제작됐다. 목표 금액도 채웠겠다, 펀딩 리워드인 2월 중 상영 약속도 지켰겠다, 남은 목표는 관객 수 1만 명이다.
영화는 자매의 일상을 담고 있는데, 영화적 연출은 전혀 없었나?
인위적으로 뭔가를 만들려고 하진 않았다. 촬영 원칙은 있었는데 생활이 작품보다 우선된다는 것, 그리고 카메라가 들어가서 상황이 변한다고 느끼면 촬영을 중지하는 것이었다.
영화화한 일상은 어떤 기준으로 뽑힌 것인가?
시설 안과 밖, 그 낙차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싶진 않았다. 두 상황을 대비하는 식으로 가면 디테일을 놓치기 쉬울 거 라고 생각했다. 시설을 보고 나면 밖에서의 생활은 웬만하면 다 좋아 보인다. 소소하게 느껴질지언정 시설에서의 모습은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보여주고, 어떻게 사회 속에서 혜정과 혜정을 둘러싼 사람들이 적응해 나가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탈 시설 이후를 보여주는 건, 어떤 효과가 있을까?
폭로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탈 시설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이에 따라 대놓고 반대하기도 어려워졌다. 하지만 탈 시설 이후 장애인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선 다들 추상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 시설한 장애인의 일상을 지켜본다면 장애인도 우리와 같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친구가 되기 위해 착한 마음은 필요 없어.’ 영화 제작 회의를 하다 나온 문장인데 이게 정답인 것 같다. 이 같은 태도는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장애인 정책은 따뜻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차가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이번 정부는 과거 정부보다 진심으로 이 문제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생각을 표현하려고도 애쓰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생각했는데 9월에 나온 대통령의 발언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1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종합대책 발표 및 초청간담회’에 참석해 생애주기에 맞춘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발달 장애인의 처지를 이야기하다 울먹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발달 장애인은 다른 장애인 보다 더 힘듭니다’라고 했다. 불행 올림픽에서 발달 장애인이 맨 밑에 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데 혜정이가 나보다 행복할 때가 있다. 사실 행복, 불행은 개개인이 마음속에서 느끼는 바다. 개인의 문제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많은 사람은 겪지 않아도 되는 빈번한 불평등을 겪는다면 이건 시민권의 문제다. 정치를 통해 당연히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따뜻한 마음이 부각되면 일견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은 본질을 가린다.
애초 목표였던 서울시의 장애인 지원을 받고 있나?
사실 그 지원은 서울시의 파일럿 정책 이었다. 아마 지금의 생활 체계 구축을 하지 못했다면 이 지원을 받기 위해 목매달았겠지만, 상대적으로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지원하지는 않았다.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는 영화가 완성 되고 2, 3개월 후에 받기 시작했는데 사람을 못 구했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기도 하는 제 지인이 안타깝다면서 본인이 직접 교육을 받아 혜정이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활동지원 서비스를 이용하는 게 그렇게 힘든지 몰랐다.
지역마다 중개기관이 있는데 수요자가 직접 연락해서 고용할 사람을 구해야 한다. 어디 살고,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몇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에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지 작성해 제출한다. 그러면 중개기관이 우리의 정보를 자신들이 갖고 있는 풀(pool)에 뿌려 매칭시키는 거다. 서로 마음에 들면 고용계약서를 작성하지만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다면 더는 방법이 없다. 정부는 수요에 대해선 알고 있지만 공급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고, 지금 우리의 경우 수요자가 직접 공급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지 않나. 공적인 복지서비스로는 완전히 실패한 제도다.
탈 시설에 대한 선진국의 정책은 어떤가?
이번 서울시 인권 컨퍼런스에 탈시설 세션이 있어 참가했다. 스웨덴은 국가 주도로 탈 시설을 이룩했는데 장애난민 활동가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장애난민이라 함은 장애인이면서 난민인 이들이다. 스웨덴은 몇 단계를 더 나아간 활동이 있다는 게 우선 인상적 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스웨덴은 법제를 통해 2000년까지 모든 시설을 폐쇄할 것을 공표했다. 1994년 그 법이 만들어지고, 1997년 중간 평가를 했는데 여전히 약 1000명 정도의 장애인이 시설에 살고 있다고 파악됐다. 그러자 정부는 한 번 더 강력한 법 개정을 했는데, 누구를 언제, 어디로 나오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출 하게 했다. 이게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 집중하는 것.
혜정 씨가 시설에서 나온 지 1년 반이 지났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두 자매는 서울 한복판에서 살아남았다. 온전한 적응을 10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어느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나?
15? (웃음). 없는 길 속에서 혜정이가 길을 제시하고 있다. 탈 시설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혜정이처럼 가라고 하는 것은 틀린 거다. 토끼는 토끼의 길, 노루는 노루의 길, 혜정은 혜정의 길을 돌파한다. 혜정이는 스스로 적응하는 것을 넘어서 주변을 변화시키고 있다. 비장애인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혜정이의 창의성을 존중한다.
장혜영 감독은 감독보다 ‘작업자’라는 호칭이 편하다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활동 중이다. ‘생각 많은 둘째 언니’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으며, 2018년 <어른이 되면> 이라는 책을 냈고, 직접 짓고 부른 노래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아니야> <연약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 아냐>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가 담긴 앨범도 발표했다.
유튜브 채널 이름이 ‘생각 많은 둘째 언니’다. 둘째로서의 자아가 큰가?
혜정의 두 번째 언니라고 하는 것은 저라는 사람의 형성 과정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조건이고 화두였다. 나를 나로 만든 것, 인생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건 둘째 언니라는 자아다. 그리고 이런 컨디션이 많은 생각을 이끌어냈다.
혜정 씨와 한 살 차이가 난다. 한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장애인 동생의 돌봄을 맡는다는 게 감당할 만한 일이었나?
저로선 동생의 보호자가 되는 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보면 아동 학대, 착취였다. (웃음) 90년대 초반 시골마을에선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 이었다. 어머니가 장애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 가족, 이웃도 그랬지만 스스로를 괴롭혔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힘든 엄마를 보면 엄마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 또 동생을 보며 내가 언니라는 생각보다 혜정의 부모 대신이 되고 싶었다.
혜정 씨가 시설에 가고 나선 어땠나?
그 이전까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증명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혜정이의 좋은 언니가 되는 것이었다. 동생이 없어지니 내 가치를 증명할 말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도 모르겠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시간을 보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은 씨줄 날실로 꽉 짜인 것만 같은데 의외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바닥없이 추락하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책 읽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었다. 경쟁 체제로 편입된 다음엔 순응을 가장하는 게 편하다는 것을 알아서 고등학교도 가고, 대학도 충동적으로 갔다. 대학은 다시 나오게 됐다. ‘이걸 왜 해야 하지’ 라는 근본적인 삐딱함이 내겐 있나 보다.
‘근본적인 삐딱함’은 종종 어디서 발현됐나?
카피레프트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 집에 인터넷 선이 깔렸다. 우리 집은 정말 가난하고 시골에 있어서 책이나 음반을 사거나, 영화관에 가는 일이 불가능했다. 인터넷이 깔리고 그때부터 소리바다로 비틀즈를 듣기 시작한 거다. 내 문화적 토양은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사람들은 ‘돈 없으면 보지 말아야지’라고 너무 쉽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을 배제 하자고 하는 것, 그 논리대로라면 나도 진즉에 배제됐어야 한다. 저작권법에서 창작자의 권리 보호 측면이 강조되고 있지만, 저작권을 많이 가진 사람을 제외하면 창작자의 자유도, 문화를 향유할 권리도 전혀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공감이 갔다. 고등학교 때 카피레프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찍으려고 했는데 이를 다루는 데가 진보넷(진보네트워크센터) 밖에 없었다. 그때 오병일 활동가에게 전화해서 ‘카피레프트를 하면 창작자는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했는데 ‘우리도 방법을 찾는 중 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대로 카피레프트에 대한 다큐 제작은 접었다. (웃음).
콘텐츠에 페미니즘 이슈가 많다. ‘메갈’이란 연관 검색어도 그 때문에 붙은 것 같다. 유튜브를 시작한 계기는?
민주주의가 참 어렵다. 유튜브를 시작한 것은 내가 고민한 것들로 전쟁을 치르는 대신 공론장에서 논의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페미니즘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신고할 필요가 있었다. 근데 유튜브 활동을 하면서 내가 ‘민주주의 바보’ 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로만 다양성을 외쳤지, 이 세상에 내가 싫다는 이유만 으로 나를 죽이겠다는 사람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들과 싸우는 건 지겹고 지루하다. 그래도 나는 동료 시민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있다. 실제로 유튜브를 해보니 여혐을 내세우는 자극적인 콘텐츠를 보는 사람이 내 영상을 보기도 한다. 들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많은 생각을 얻어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어른이 되면’ 프로젝트의 최종 목적은?
프로젝트가 독립적인 생명력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은 내가 했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이곳저곳을 누비는 프로젝트의 생명력에 내가 끌려 다니는 기분이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되도록 멀리 가길,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연결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