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패널] 지금 ‘연애’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정리 – 성지훈 기자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 표준국어대사전은 연애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런데 연애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일일까. 서로를 사랑하는 게 비단 남녀뿐일까.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연애가 아닐까. 얼마만큼 보고 싶어야 그리움이고 얼마나 좋아야 사랑일까. 그보다 이렇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감정’에 대한 정의 말고 연애 관계의 실체는 도대체 뭘까? 썸과 연애의 경계는 어디에 있나? ‘그건 케바케(case by case)’라는 케케묵은 대답 말고. 그래서 이번에 청년패널이 나눌 이야기 주제는 연애다. 고개만 돌리면 주변은 온통 연애 타령인데 연애를 못 하는 우리는 도대체 무얼까 고민하는 청춘들의 조금 찌질한 이야기. 그래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청춘들의 꼭 푸르지만은 않은 연애 이야기.
최장훈 – 총 5회의 연애 경력을 자랑한다. 청년패널의 연애 대마왕. 연애 횟수를 공식과 비공식으로 구분하며 비공식 연애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입을 열지 않은 젠틀남. 하지만 이 대담이 진행되던 즈음 오랜 연애를 마무리했다.
남지우 – 하필 이날, 평소와 달리 곱게 빼입고 나타났다. 얼마 전 군인 남친과 새 연애를 시작했다. 첫 연애는 고3 때. 공부 못하는 친구 도와주라고 짝을 시켜 준 선생님의 기대를 배반하고 잘생기고 키 큰 짝꿍과 야자에서 도망치곤 했다. 연애계의 앙팡테리블.
정찬 – 7년째 연애 중. 알뜰한 고학생의 살뜰한 연애를 함께한 여자 친구와 결혼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다. 연애 못 해 우울한 담당 기자와 실연해 우울한 장훈 사이에서 꿋꿋한 사랑의 전형을 보여 준 사랑꾼.
# 도대체 연애가 뭐지?
최장훈 – 연애는 서로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서로만 공유하는 거죠. 그리고 그걸 상대에게만 표현하는 것. 그렇게 서로에 대한 감정이 서로에게 확인되고 공유되는 것. 그게 연애겠죠.
정찬 –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조금 덧붙이자면, 서로 똑같은 생각을 갖지는 않더라도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일이 연애겠죠. 친구들과 마음이 잘 맞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과는 좀 달라요. 뭔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좀 더 애틋하고 특별하달까.
최장훈 – 그런데 그 공감하는 감정이라는 게 사실 특별할 건 없어요. 그냥 걱정되고 신경 쓰이는 감정. 그 정도예요. 조금 더 나가면 키스하고 싶고 껴안고 싶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것 정도?
남지우 – 저는 일상의 가장 자연스러운 부분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연애인 것 같아요. 같이 밥 먹고 영화 보는 일이 당연한 사람과의 관계요.
연애가 도대체 어떤 감정이냐는 뻔한 질문에 이렇게 뻔한 말들이 나올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일상의 공유, 감정과 감각의 공유. 그 단순한 감정을 어려운 말들로 포장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다 부질없었다. 그래서 실증적이고 실존적이며 실용적이기까지 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언제부터 연애인 거죠?”
남지우 – 사귀자는 말을 하거나, 오늘부터 1일이라고 선언할 수는 있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상대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는 ‘선언된 연애’ 이후에 알 수도 있는 거고, 그 이전에 알 수도 있는 거고. 그건 사람마다 다 다르겠죠.
최장훈 – 연애라는 걸 “너 나랑 만나자”부터 “헤어지자”까지로만 볼 수는 없어요. 자기감정을 상대에게 고백하고 서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칠 수는 있지만 그게 아니어도 단순히 ‘썸 타는’ 걸로만 볼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과정이 있어요. 정찬 사귄 기간을 숫자로 표현할 수는 있어요. 선언 이후, 공식화된 이후부터를 세면 되니까요. 하지만 그 기간만을 딱 잘라 연애라고 하진 않죠.
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과정’이 무얼까. 그동안 그토록 냉철하고 정확하던 패널들이지만 추상적인 말만 내뱉고 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니. 우린 말하려고 모인 건데. 기자만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일상을 공유하고 교감을 나누는 건 친구라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일상을 함께하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생각나고 좋은 곳을 보면 같이 가고 싶은 친구와의 관계가 다 연애일까.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럼 같이 자고 싶은 사람이랑 이 모든 관계를 공유하는 게 연애일까요?”
남지우 – 꼭 그런 맥락은 아니에요. 스킨십하고 싶고 같이 자고 싶은 건 그냥 감정을 표현하는 많은 방법들 중에 하나예요. 친구와 일상을 공유하는 일과 남자 친구랑 일상을 공유하고 싶다는 것의 의미도 다르죠.
최장훈 – 감정이 달라요. 어떤 사람이랑 자고 싶을 수도 있고 또는 어떤 친구랑은 너무 잘 맞을 수도 있지만 그게 다 연애 감정은 아니죠. 친한 거랑 연애 감정은 달라요. (중얼거리며) 난 그냥 이해되는데 그게 안 되나?
남지우 – 일테면 제가 엄청 맛있는 피자집을 발견하면 피자를 좋아하는 친구를 떠올릴 수는 있어요. 그런데 남자 친구는 그렇게 떠올리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와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남자 친구가 피자를 복스럽게 먹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우정과 사랑을 구분하지 않아요?
정찬 – 얘기를 나누다 보니 연애 관계를 규정하는 건 결국 배타적 관계를 유지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대상이 유지해 오던 기존의 관계를 다 무시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이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는 거죠. 저 같은 경우 연애를 하면 미래에 일상을 함께하는 걸 그려 보게 되거든요. 친구랑은 딱히 그런 거 안 하죠.
# 연애의 목적
조금 명확해졌다. 교감, 일상, 섹스 뭐 이런 많은 연애의 요소들이 등장했지만 결국 한 단어로 규정되는 건 독점에 대한 욕망이다. 최장훈은 “독점욕이 연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서로를 독점하려는 마음이 연애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만은 인정했다. 자신은 연애할 때 상대를 독점하려 들지 않는다는 쿨한 전제를 달았지만. 그렇다면 연애의 목표는 관계에 대한 온전한 독점, 결혼인가?
정찬 – 꼭 결혼은 아니죠. 그냥 옆에 같이 있는 게 목적이에요. 그냥 연애 행위 자체가 목적이에요. 이 사람과 같이 있으면 너무 좋다는 감정을 지속하는 거. 그게 목적인 거죠.
최장훈 – 연애의 목적은 그냥 자기의 감정, 욕망을 충족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상대와 감정을 나누고 싶고 그 감정을 토대로 무언가를 같이하고. 그 욕망을 충족하는 게 목적이지 그게 꼭 결혼의 형태로 결론 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남지우 – 그런데 결혼이 정상이라는 의식은 있어요. 연애를 해야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해야 출산을 해서 국가가 유지되고. 이런 시스템이 너무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이게 ‘보통’이 된 것 같아요. 그 시스템에서 벗어나면 정상이 아니라는 시선도 강한 것 같아요. 지난 설에 할머니랑 같이 TV를 보는데 엄정화가 나왔거든요. 할머니가 “쟤는 왜 결혼도 안 하느냐”며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할머니는 박근혜 대통령도 결혼 못 해서 불쌍하다고.
정찬 – 저도 연애의 목적이 꼭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자 친구랑 결혼식도 올리고 혼인 신고도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하긴 하거든요. 사회적으로 결혼 없이 오랜 연애를 이어 가는 게 정상처럼 보이긴 어려워요. 얘기가 좀 달라지지만 연애의 목적이 사회적 시선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적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로 연애를 하는 걸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동물의 사회에서는 승자가 배우자를 차지하잖아요. 사회적 승리자임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연애는 필수 요소 같은 거죠.
그러게. 언젠가 ‘연애 고자’ 같은 말도 생겼다. 연애를 못 하는 건 루저, 실패자 취급을 당한다. ‘브로콜리 너마저’ 도 노래했다. 아이들은 짝짓기에 몰두한다고. 도대체 연애가 뭐기에 연애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게 됐을까. 그래 봤자 연애.
최장훈 – 우리 사회에서 연애를 한다는 게 특별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젠더 역할을 너무 구분해요. 남녀가 같이 뭘 하는 걸 민감하게 대하도록 해요. 남녀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게 아니라 구분하도록 강요하죠. 그렇게 살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남녀가 함께 생활하면 그 구분이 깨지면서 혼란스러워지는데 그걸 극복하고 연애를 하면 대단해 보이는 거죠.
남지우 – 연애를 하면 자신의 성적 매력을 확인받는 거잖아요. 그래서 연애를 못 한다는 건 그런 성적 매력이 없다는 조롱이 아닐까요. 실제로 모태 솔로라고 하면 단 한 번도 성적 매력을 인정받은 적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거죠.
대담을 하던 날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남지우는 대담이 끝나자마자 데이트를 하러 떠났다. 정찬은 늘 그렇듯 어쩐지 너무 행복해 보였고, 최장훈은 실연 직후의 비 오는 날임에도 너무 쿨해서 더 슬펐다. 대담을 두 시간이나 진행했지만 연애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냥 무지 외롭고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만. 그리고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고작 두 시간으로는 부족하겠다는 생각도. 하긴 인류사는 아담과 이브 이후로 줄곧 남녀상열지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연애가 뭔지는 도통 모르겠으나 연애라는 그 복잡 미묘한 감정 놀이를 사회학적으로, 정신분석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게 의미 없는 짓이라는 것쯤은 알겠다. 장훈의 중얼거림대로 ‘그냥 알 수 있는 일.’ 어느 베스트셀러의 제목이 생각났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연애하지 않는 자 유죄’가 아니라. 그러니까 연애 말고 사랑하자. 사랑하다 보면 연애가 뭔지도 알게 되겠지.
(워커스 3호 | 2016.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