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 활동가. 인권운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 홍진훤
바스락바스락, 탁탁탁탁, 파아 파아 그리고 하하하… 맛있네요. 아스팔트 농성장에서 펼쳐지는 상차림으로 분주한 손들 끝에 나는 소리들, 마무리는 항상 웃음과 고맙다는 인사다. 농성장을 차지한 밥상의 마력으로 농성자들 표정도 따뜻한 밥마냥 부드러워지고 풀어진다. 농성자를 웃게 하는 ‘밥 연대’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운동의 경험으로 시작된 밥 연대
“제가 노점상 운동을 하면서 여럿이 밥을 해먹던 경험이 많아서 ‘밥 연대’를 하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 엄마가 주변에 먹을 것을 나눠 주는 걸 보고 자란 영향도 크고. 1989년에 명동성당 농성을 하면서 전국노점상연합회가 만들어졌는데 농성하니까 돈은 별로 없고 밥 먹을 사람은 많아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직접 해 먹었어요. 인천에서 이덕인 열사 영안실 싸움을 할 때도 그랬고요. 함께한 인천대, 인하대 학생 중 지금 노동운동을 하는 이가 있는데, 그때 밥하던 저를 기억하더라고요. 힘들고 배고플 때 따뜻한 밥 한 끼가 사람들의 가슴에 남나 봐요. 본격적으로 밥 연대를 하게 된 건 콜트콜텍 노동자 투쟁 때부터 같아요. 그때부터 농성장에 밥을 해서 갔어요.”
노점상 운동을 하던 경험에서 밥 연대를 시작하게 됐다는 유희 씨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농민, 장애인 투쟁 현장에도 밥을 싸서 간다. 강원도 홍천에서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며 군청 앞에서 농성을 벌일 때도 밥을 싸서 갔다. “밥이 하늘이고 힘”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저녁마다 어디에 밥을 싸러 가야 하는지, 누가 밥도 못 먹고 싸우는지 살펴보는 게 일이다. 가끔 다 큰 자녀들이 몸도 챙겨 가면서 밥 연대를 하라고 잔소리하면 “동지들이 밥 먹을 때 짓는 행복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고 응수한다. 무엇보다 밥 연대를 했던 이들이 싸움에서 이길 때 뿌듯하다는 그는 요즘 투쟁이 길어지는 일이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런 만큼 ‘집 밥의 즐거움’을 전할 일도 많아졌다.
농성자가 100명이 넘을 때는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십시일반 음식 연대’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돈을 보내 주곤 한다. 어디에 밥 연대를 갔다 왔는지 올리는 게 세상 소식을 전하는 일이 된다. 운동을 전혀 모르던 동창도, 화물차 기사도 그를 통해 노동자들 투쟁 상황을 알게 됐다.
트위터로 시작하게 된 ‘밥 셔틀’
“세상이 보이면서 시작한 거랄까요. 학교 다닐 때 학생회는 했지만 세상일을 알게 되면 제 성격상 가만히 못 있을 것 같아 일부러 외면하고 기사만 살짝살짝 봤어요. 2011년 1월 1일 홍익대학교 청소 노동자들이 해고된 소식을 듣고 너무 화가 났어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잖아요. ‘김여진과 날라리’라는 모임에서 김장 번개를 준비하는 데 간 게 시작인 거 같아요. 2012년 쌍용차 노동자들이 자결하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서울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렸어요. 어떤 트위터 친구가 ‘쌍용차 노동자가 빵 먹는데 전경들이 비웃듯이 쳐다보고 가더라’며 열 받는다고 썼어요. 토토맘이라는 분이 그러면 우리가 고기라도 해 가자고 해서 몇몇이 밥을 해 갔어요. 자발적인 셔틀이라는 의미로 ‘밥 셔틀’로 이름을 지었어요.”
쌍용차 밥 셔틀을 1년 반 했다는 ‘아싸’ 씨는 처음부터 그렇게 오래 할 생각은 없었는데 함께하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오래 하게 됐다. 태어난 지 6개월 된 아이와 함께 밥을 싸온 토토맘, 밥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부엌을 내준 호규, 함께 먹을거리를 준비한 혜리 등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고 이어졌다. 어떤 이는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출근하자마자 회사 냉장고에 넣었다가 점심시간에 나와서 주고 가기도 했다. 직장 일도 힘든데 그렇게까지 시간과 돈을 들이며 밥 연대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자기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일”이란다. 싸우는 노동자 소식을 듣고 불편했던 마음이 뭐라도 하니 편해졌다는 뜻일 게다. “내가 먹어도 맛이 없는데 맛있게 드시니까 감사하다”는 그는 연대를 하면서 노동운동도 알게 되니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냐고 했다.
밥차에서 밥통까지, 진화하는 밥 연대
“진보신당 때 윤종철 씨가 갈비 식당을 했는데 그 사람이 밥 연대를 많이 했어요. 나중에 당원들이 특별 당비를 내 밥차를 사면서 당 소속으로 움직였지요. 2011년 희망 버스나 2012년 쌍용차에 연대를 많이 갔어요. 그냥 나눠줄 때도 있고 저렴하게 판매를 할 때도 있었는데 재정난으로 밥차가 없어졌어요. 그러다 몇 사람이 안정적으로 하려면 협동조합 형태로 밥차를 만들자고 해서 28명이 출자해서 ‘밥통’을 만들었어요. 사회적 협동조합이 아니라 영리 협동조합이라서 웹진 정기 구독자를 모으는 형태로 밥 연대를 하고 있어요.”
최근 잘 나가는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밥통의 매니저 일을 하게 된 손지후 씨는 “한 명에게 집중되는 노동력이나 몇몇의 노동을 쥐어짜서 나오는 밥이 아나라서” 성별화된 가사 노동과 다른 힘이 있다고 했다. 밥 연대 당일에 참여해 밥을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미리 양파 등 재료를 썰어 오는 사람도 있고, 직장 끝나고 배식을 하는 사람도 있고, 늦은 밤 설거지를 해 주는 사람도 있다. 각자 허락된 시간에 보이지 않지만, 연대하는 ‘밥 연대 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세월호 2주기 때 3000개의 주먹밥을 만들 수 있었던 힘이란다. 현장에 관심이 있지만 혼자 얼쯤해 주저주저하는 사람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숟가락 건네며 편안하게 연대하도록 개인들의 연대를 북돋는 게 밥 연대의 매력이라고 짚는다.
밥 연대의 연원은 ‘연대하고픈’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밥은 몸과 마음에 영양을 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엮이고 모이는 매개였다. 먹을 사람을 생각하며 음식을 만들다 보니 농성자의 처지도 생각하고, 먹는 사람은 밥을 하고 장을 볼 그이들의 시간을 떠올리며 싸움의 의지를 다지게 된다. 게다가 함께 밥을 만들고 나누는 사람들이 서로 엮이지 않는가. 사회학자 데버러 럽턴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의 정체성이 음식에 날인된다”고 한 음식과 먹기의 사회학이 밥 연대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밥으로 엮이고 싶은 사람들은 서울 시청 광장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분향소에 오시라. 매주 일요일 밥 연대의 시간이 있다니 밥 나누러 오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