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내희
제20대 총선을 치른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이미 다 아는 대로 4.13 총선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선거 전에는 야권 분열로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할 수 있는 180석은 물론이요, 단독 개헌선인 200석까지 얻는 것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있었으나, 선거 결과는 판이했던 것이다. 새누리당은 122석밖에 차지하지 못해 제2당으로 전락했고, 더민주당은 소속 유력 인사들이 대거 국민의당으로 넘어갔는데도 123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으며, 국민의당은 38석이라는 적잖은 의석수를 확보해 원내 교섭권을 얻어 냈다. 한마디로 새누리당의 참패요 야당 세력의 대승리인 셈인데, 이 때문에 한편에서 유권자가 총선 바둑판에서 ‘신의 한 수’를 둔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통념이 있다. 이는 민주주의란 선거를 통해야 그 가능성을 활짝 피울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언뜻 보면 지난 총선은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임을 증명해 준 것 같기도 하다. 총선이 없었다면 박근혜 정권의 반민중적 국정 운영을 지원해 온 거대 여당을 어떻게 제2당으로 전락시켰겠는가. 선거가 있었기에 유권자들이 새누리당을 심판할 수 있었고, 선거가 있었기에 호남 민심이 더민주당을 심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은연중에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통념을 다시 강화한다.
그러나 총선을 치르고 한 달이 지난 지금 그 결과를 다시 반추해 보고 싶은 것은 그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지난 총선은 한국의 공식 정치판을 보수 일색으로 바꿔 놓았다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 진보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 더욱 위축되었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한 것과는 달리, 진보 세력이 얻어 낸 의석수는 다 합쳐도 7석밖에 되지 않는다. 정의당이 지역구 2석과 비례 대표 3석을 얻은 데 그치고,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진보 후보 2명이 당선되었을 뿐, 녹색당 등 다른 진보 정당은 의석 확보에도 실패했다.
이 결과 한국의 정치판은 20대 국회에서 우편향을 띨 것으로 예상된다. 새누리당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번에 엉겁결에 제1당이 된 더민주당이 더 보수화될 가능성이 크다. 더민주당은 아직도 ‘운동권’ 전통에 매몰되어 있다는 비판을 최근 외부에서 수혈한 세력으로부터 받고 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 이미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노동자들을 억압한 전력이 있다. 더구나 지난 총선에서 거둔 승리도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참여했던 보수 정객 김종인을 꾸어 와서 얻은 결과다. 더민주당이 이처럼 더 보수적 색채를 띤다면 국민의당은 어떨까? 이 당의 주요 의원들이 더민주당 의원들보다도 더 보수적이라는 것은 새누리당과의 연정 제안이 내부에서 가끔 튀어나오는 것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4.13 총선 결과가 유권자에 의한 ‘신의 한 수’라기보다 선거 제도가 만들어 낸 유권자의 전략적 실수 또는 자충수는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기고만장하던 여당과 대통령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것은 시원한 일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일당 독재’를 막으려는 의도가 전략적 투표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 과정에서 진보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 위축된 것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고사시킨 경우에 해당한다. 민주주의의 ‘민’이 민중이라면, 이 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진보 세력이 지난 선거를 통해 오히려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보 세력의 정치적 무능력까지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겠으나, 지난 선거가 꼭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가능하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 되기 어려운 것은 원래 그것이 귀족 정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마지막 부분에는 주인공 햄릿이 투표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왕족이 다 죽어 버린 덴마크의 차기 왕위를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에게 넘기겠다며 햄릿이 자기 표를 그에게 던지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햄릿의 투표 행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은 극 중의 덴마크가 소수 왕족끼리 선거를 통해 왕위를 정하는 나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왕족 또는 귀족 중심의 투표 전통은, 추기경들이 교황을 투표로 뽑는 가톨릭 전통에서도 발견된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는 선거나 투표가 꼭 민주적 절차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의 산실인 고대 아테네에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방식은 제비뽑기였다. 제비뽑기와 선거는 판이한 선택 및 결정 방식이다. 선거가 소수의 입후보자 가운데 필요한 수의 사람을 뽑는 것이라면, 제비뽑기는 다수의 입후보자 가운데 추첨을 통해 필요한 수의 사람을 뽑는다. 제비뽑기가 투표와 다른 점은 입후보자들의 특권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데 있다. 투표에서는 권력, 재력, 명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제비뽑기에서는 복불복의 원칙 즉 운수가 작용할 뿐이다. 아테네에서 공직자를 선출할 때 제비뽑기 방식을 택한 것은 모든 출마자에게 철저하게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인구 수십만에 불과하던 고대 아테네와는 달리 한국과 같은 현대 국가에서는 유권자가 수백만, 수천만 명이나 된다는 점에서, 제비뽑기에 의존해 국회의원을 뽑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서만 민주주의의 꽃이 만개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망해 보인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그리고 과거 선거에서도 진보 세력이 공식적인 정치판에서 성장하지 못한 것은 선거가 꼭 민주주의를 꽃피우지는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햄릿>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그동안 가장 많이 읽은 작품이지만, 햄릿이 죽는 순간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보면, 이 작중 인물이 소수의 상층부가 지배하고 있던 왕국의 특권층이었다는 점을 다시 깨닫게 된다. 진보 세력은 선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어 낼 방안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워커스10호 201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