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의 일
성지훈 기자 / 사진 홍진훤
초등학생 때, 대기업 총수들의 자서전이 유행처럼 출판됐다. 지금이야 그게 재벌의 정계 진출을 위한 떡밥, 기업을 사유화하기 위한 신화화의 수작이라며 비아냥거릴 만큼 머리가 굵었지만 그땐 그 ‘성공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참 꼼꼼히도 읽었다. 그 자서전들의 내용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나는 구절이 있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재벌 회장은 어린 시절 밥 먹듯 서울로 가출했다.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가출할 때마다 그를 찾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흘린 땀만큼 반드시 돌려주는 게 땅이다.” 어린 나이에 그 말이 왜 그리 인상적이었는지 이후로 재벌 회장보다는 농부를 동경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 솔직한 노동을 하고 딱 그만큼의 대가를 거둬들이는 사람들. 생명을 키워 내고, 밥을 만들고, 키워 낸 삶이 다시 죽어 새로운 생명이 되는 세계의 순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
5월 11일 서울 대방동의 여성플라자에 故 정광훈 전국농민회총연맹 전 의장을 그리는 사람들이 모였다. 2011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고인의 5주기를 맞아 제작된 다큐멘터리 <혁명으로의 초대> 서울 상영회가 열린 것이다. 이날 상영회에는 김영호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김순애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회 의장 등 각계 원로를 포함해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모두 정광훈 전 의장과 함께 투쟁하던 ‘동지’들이자 그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이다. 정광훈 의장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문경식 정광훈의장 추모사업회 회장은 “우리가 정광훈 의장을 회고하는 것은 의장님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평가하고 단련하는 운동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정광훈 전 의장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에 입담 좋은 대중 연설가다. 대학 때 농활 가는 버스 안에서 노래를 하나 배웠다. <아스팔트 농사>. 버스를 타기 전 학교에서 먼저 배운 <농민가>는 그렇게 안 외워지더니 <아스팔트 농사>의 가사는 금방 외웠다. 미사여구나 수식이 없는 가사는 촌스럽고 투박했지만 쉬웠다. 보리농사 망하고 고추 농사마저 망해 빚더미만 남은 억울한 농민들이 여의도 아스팔트 위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그 촌스런 가사. 노래의 지은이는 정광훈 전 의장이다. 그는 직접 지은 노랫말을 따 ‘아스팔트 농사꾼’으로 불렸다. 그는 노랫말처럼 투박하고 쉬운 말을 하는 연설가였다. 억센 전라도 사투리로 “아우어 워드 이즈 아우어 웨폰(Our word is Our weapon ,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무기다)”이라고 또박또박 말하던 그의 연설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유려하지 않았지만 거짓이 없고, 쉽지만 날카로웠던 그의 말은 그의 연설 속 경구처럼 우리의 ‘무기’가 됐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쉬운 말과 글이라는 게 실은 얼마나 어려운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 금융 자본주의, WTO, FTA. 쉽지 않은 내용을 대중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광훈 전 의장은 부단히 공부했다. 생전에 정광훈 전 의장과 같은 집에 살던 오종렬 전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은 “그는 눈만 뜨면 책을 읽었고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책을 사 모았다”고 회고했다.
5월 12일 혜화동 서울대병원 앞 농성장에는 네덜란드에 거주 중인 백남기 씨의 딸 백민주화 씨가 왔다. 세 번째 생일을 맞은 그녀의 아들 지오와 남편도 함께였다. 지난해 11월 민중 총궐기 집회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 씨는 아직 혼수상태에 있다. 여전히 이 사건의 책임자는 나서지 않고 있다. 백남기대책위 소속 단체의 사람들이 돌아가며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백민주화 씨는 국내에 머무는 동안 백남기 씨 사건의 국가적 책임과 처벌을 요구하는 활동을 펼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광주에 내려가 5.18 기념식 전야제에도 참석했다. 국내에 머무는 백남기 씨의 장녀 백도라지 씨도 아버지가 희생된 국가 폭력 사태에 책임을 묻기 위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꾸준히 삶과 운동을 이어 오던 아버지의 활동을 물려받은 것처럼 꾸준히.
백남기 씨는 포도밭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다. 유신 정권에 학교에서 제적된 후, 오갈 곳이 없어 수녀원과 수도원 등을 돌아다니며 날품팔이를 하고 인천 포도밭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1980년 세 번째로 제적된 이후에는 아예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5.18 유공자지만, 살아남은 자는 말이 없다며 보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사라져 가는 우리 밀에 관심을 두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추방한 이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된 나라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울분이나 지난날의 업적 대신 지금의 삶을 꾸준히 이야기했다. 그는 “농민이 편하게 농사지으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살았다. 민중 총궐기가 열리던 날 백남기 씨는 개 사료보다 싼 쌀값과 대책 없는 농산물 개방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그리고 6개월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재벌 회장의 소작농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땅과 함께 살아가는 농사꾼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꾸준히 땀 흘리고 솔직하게 거둬들인다. 그건 농사꾼 정광훈과 백남기가 증명해 온 삶이기도 하다. 거짓말을 하는 건 사람과 그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다.
정광훈은 그래서 거짓된 세상과 싸웠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농민과 민중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 말했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농민운동의 씨를 뿌렸다. 그가 뿌린 씨앗은 거짓 없이 자라 오늘날 그를 기억하며 운동의 튼튼한 종자가 되었다. 백남기는 거짓된 세상에서도 꾸준히 삶의 소중함을 지켜 냈다. 유신 독재와 계엄과 신자유주의의 풍파에 맞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은 농사꾼의 방식이었다. 하나씩 씨를 뿌리고 꾸준히 물을 대고 땀을 흘려 잡초를 뽑으며 긴 시간을 견뎌 내는 일. 민중 운동, 농민운동이라는 토양은 그들이 뿌린 씨앗을 거짓 없이 키워 냈다.
지난 17일 광주에서 열린 5.18 전야제는 정광훈과 백남기의 농사꾼 일이 수확을 거둔 자리와도 같았다. 백민주화 씨는 전야제 무대에 올라 국가 폭력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고 아버지를 대신해 농민의 삶과 투쟁에 대해 말했다. 전야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망월동 묘역에서 정광훈 전 의장을 추모하며 그의 유지를 이어 가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거짓 없이 일하고 솔직하게 거둬들이며 다음으로 이어지는 순환을 지켜보는 일. 정광훈과 백남기의 싸움은 농사꾼의 방식이다.
(워커스 11호 201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