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용나노텍은 산업, 의료 분야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나노 머신의 주요 부품인 고분자 탄소 모터를 생산하는 업체였다. 특히 주요 생산품인 고분자 탄소 모터는 폭발적으로 증가한 나노 로봇 산업 덕분에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고분자 탄소 모터는 의료 분야에서 특히 각광받았는데 인공 근육을 이용한 성형 수술 분야를 새로 개척하기도 했다. 중국과 인도에 대규모 나노 머신 생산 단지가 조성되자 호황기가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에 회사는 금융과 의료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짧은 호황기를 더 단축시켰다. 나노 로봇으로 이루어지는 성형 수술을 테마 상품으로 개발해 의료 관광 단지와 연계하려던 계획은 노동당이 국회에서 특별법을 무산시키면서 멀어졌고, 가전 사업으로의 무리한 확장은 몰락을 가속화했다. 결국 워크아웃하의 삼용나노텍이 중국에 매각되면서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약속한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미 핵심 기술인 고분자 나노 모터 제조 기술이 유출된 상황이었다. 삼용나노텍을 인수한 왕치엔 그룹은 3년 뒤 회사를 인도와 브라질에 분리 매각 하기로 했다. 그사이에 3,000명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해고 통보를 받았다.
지민은 눈에 띄게 늘어난 취재 차량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전에는 한산하더니, 무슨 일이죠?”
지민의 말에도 미강은 돌아보지 않고 공장이 있는 곳의 반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손차양을 한 그의 입술이 더듬더듬 움직였다.
“인…도…협상단 방문…예정…반복…인도…협상단…방문…예정…반복….”
“뭐요?”
미강은 손가락으로 지민이 봐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양 홍보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주상 복합 건물이었다. 지민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몰라서 미강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건물의 창문 하나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사광처럼 보이는 빛은 한낮임에도 선명하게 빛났고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깨달았다.
“모스 부호예요.”
미강은 멀리 보이는 건물과 공장을 번갈아 두리번거리다가 카메라 렌즈를 건물 쪽으로 돌렸다.
“탐조등이 있고… 남자가 넷, 여자가 둘. 노조원들일까요?”
지민은 대답 없이 장비들을 다시 차에 싣자고 재촉했다. 15분 뒤, 지민과 미강은 콘크리트 냄새가 가시지 않은 건물의 복도에 서 있었다. 지민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기 전 미강에게 잠시 뒤로 물러나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그 얼굴을 보면 문을 다시 닫아 버릴 것 같단 말이죠.”
미강은 수염으로 뒤덮인 넙데데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지민이 손이 아파서 다른 손으로 바꿀 정도로 문을 두드리고 난 다음에야 마지못한 듯 문이 열렸다. 지민은 잽싸게 문틈으로 기자증을 들이밀어 보인 다음 기혜영에 관해 취재 중이라고 알렸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대꾸 없이 문을 닫으려 했지만, 문틈으로 미강이 재빨리 발을 넣었다.
“날도 더운데 물이라도 한잔 얻어 마십시다.”
“복도 끝에 화장실 있어요.”
여자는 문손잡이를 붙들고 안간힘을 썼지만 미강의 팔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험악해진 방안 분위기를 감지한 지민이 빠르게 그들을 설득했다. 아니, 협박했다.
“기혜영 씨에 관해 취재 중이에요. 문을 그냥 닫으면 바로 경찰에 알릴 거예요!”
지민은 전화기를 들어 보였다.
“공장 입구에 진 치고 있는 정보과 형사 아시죠? 단축 번호로 저장해 두었어요.”
단축 번호는 둘째 치고 이름도 몰랐기에 지민은 여자가 계속 저항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잠시 후 방 안쪽에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물 한잔 드시고 가라고 해.”
익명을 원한다며 남자들은 자신을 각각 노땅, 싫어요정, 개타쿠, 퀴저씨라고 불러 달라고 했고 2명의 여자는 덴샤와 와타시②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미강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있는 동안 지민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는데 이미 개타쿠 지점부터 울상을 지었고 퀴저씨 부분에서는 아예 고개를 숙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미강이 괜찮냐며 지민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들었는데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벌게진 상태였다. 그들은 혜영과 함께 일하던 노조원과 점거 농성 초기에 SNS로 라이브 방송을 하던 혜영을 보고 돕기 위해 달려온 활동가들이었다. 점거 농성이 사실상 혜영 혼자만의 시위가 되었을 때 그를 지원하던 이들은 입장에 따라 반으로 나뉘었고, 그렇게 나뉜 반은 다시 반으로 줄어 지금의 인원이 되었다. 분양이 되지 않아 텅 빈 건물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혜영과 마찬가지로 기약 없는 싸움을 같이하고 있었다.
미강이 창가에 바짝 붙인 탐조등을 가리키자 자신을 노땅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영이는 학교 때 취미반에서 아마추어 무선 통신을 한 적이 있어요. 무선 자격증도 갖고 있고요. 교신 수단이 끊긴 뒤부터는 이걸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랜턴의 배터리 수명이 다한 뒤부터는 단방향 교신이 되었지만 가끔은 수신호를 합니다. 손바닥은 장음, 주먹은 단음. 이런 식으로요.”
노땅은 손을 펼쳤다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최근에 교신한 적이 있나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이쪽에서 보낸 모스 신호에 혜영 씨가 답신을 보낸 적이 있냐고요.”
노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흘 동안 이쪽으로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어요. 경찰이 냉각탑 위를 감시하기 위해 올려 보낸 드론 수가 늘어나서 들키지 않으려고 더 조심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지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혜영 씨의 건강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끊겼나요?”
지민은 미강의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보여 주었다.
“지금 혜영 씨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건 알고 계시죠?”
“저 위에서 200일 가까이 투쟁하고, 그중 30일은 고립된 상태나 마찬가지로 있다면 몸보다 정신을 더 걱정해야 합니다. 이전에 300~400일씩 고공 농성하던 동지들은 그나마 외부와의 연락 수단이 확보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고립시키는 경우는 정말….”
“살아서 내려올 생각 말라는 거죠.”
아까 전에 지민과 문을 붙잡고 실랑이를 했던 ─ 자신을 덴샤라고 소개한 ─ 여성이 말했다. 그 말에 개타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경찰이 그 정도로 막장은….”
“맞아요. 그렇게 말 안 하죠.”
덴샤는 지민과 미강에게 음료수를 내주며 말했다.
“대놓고 저년 말려 죽여. 이렇게는 말 안 하죠. 기업의 운영에 지장이 없도록, 그리고 지역 주민의 불편을 최소화하도록 신속한 결단을 내린다 어쩌구저쩌구… 이렇게 말하겠죠. 올봄에 있던 강제 진압 때 수칙 안 지켰다고 징계받은 경찰 있다는 소리 들어 봤어요? 얼굴에 최루액 캡슐을 직사하고 징계받은 경찰 있다고 들어 봤어요? 무마용으로 징계받았던 애들, 지금 다 저기 와 있어요.”
덴샤는 탐조등 옆에 설치한 천문용 망원경을 가리켰다. 개타쿠는 덴샤의 열변에 머쓱해졌는지 말없이 자신이 앉아 있던 책상으로 돌아갔다. 미강은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물건을 보고는 질문했다.
“그런데 뭐 만드시는 거예요? 혹시 폭탄 같은 건 아니죠?”
딴에는 농담이라고 했는데 방안에 묘한 정적이 돌았다. 지민은 눈치를 보다가 미강에게 속삭였다.
“저게 진짜 폭탄이라면 우릴 들여보냈을 리가 없잖….”
“들켰네.”
개타쿠의 말에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미강의 손을 잡고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구석에서 키득거리는 덴샤와 와타시의 모습을 보고는 그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냉각탑으로 올라가는 전원이 차단되었지만 완전히 차단된 건 아니에요. 냉각탑 자체는 가동 중이기 때문에 곳곳에 440볼트 공급선은 살아 있거든요. 사측이 끊은 건 일반 전자 제품을 사용할 때 쓰는 220볼트 선뿐이에요. 440볼트 3상을 220볼트 단상으로 변환하는… 말 그대로 ‘다운 도란스(Down Trans, 변압기)’지요. 접지 후에 사용하는 방법만 알려 주면 냉각탑 위에서 다시 핸드폰도 사용 가능할 겁니다. 일단 전기를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혜영이한테는 도움이 될 거예요. 사측도 냉각탑으로 올라가는 440볼트는 차단하면 난리 나기 때문에 함부로 전원 못 내립니다.”
개타쿠의 말에 지민은 미덥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저기로 보내요?”
“날려 보내야죠.”
“뭘로요?”
개타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덴샤와 와타시가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싸구려 중국산 쿼드콥터③는 잊어버리세요. 삼용나노텍의 탄소 나노 튜브를 사용한 몸체로 총 운반 중량 25킬로그램이라는 믿을 수 없는 능력을 자랑하는 미국 썬더버드 사의 마스터피스 옥토콥터④, 머스탱-S를 소개드립니다. 당연히 국내에서는 비행 자체가 불법입니…!”
[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인물 소개]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하미강: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보안 책임자.
기혜영: 삼용나노텍 노동자, 정리 해고자 복직을 위해 고공 농성 중.
①Mustang Sally – Wilson Pickett. 1967.
② 私(わたし). 일본어의 1인칭 대명사, 나.
③ Quadcopter. 4개의 프로펠러를 가진 드론의 형태.
④ Octocopter. 쿼드콥터와 유사하지만 8개의
프로펠러를 가진 드론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