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세상 이야기]
박다솔 기자/사진 정운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 천으로 덮어 놓은 커다란 비석이 있다. ‘HYUNDAI MOTOR GROUP’이 굵은 글씨로 크게 박힌 비석이다. 재 보지 않았지만 가로 길이 4미터, 세로 길이 2미터 이상 돼 보인다. 그 앞엔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있다. ‘함께 만들어 가는 선진 집회 문화로 글로벌 경쟁력 강화’라 적힌 띠를 둘렀다. 이들은 지금 집회 중이다. 서초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내고 밤낮으로 서 있다. 스마트폰으로 SNS도 하고, 가끔 험악한 표정도 지으면서. 이 사내들, 둘러진 띠의 문구처럼 진짜 선진 집회 문화를 위해 집회 중인 걸까?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가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다. 현대차 본사 앞 무기한 농성은 한광호 열사의 죽음에서 촉발했다. 그동안 현대차가 노조 파괴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검찰을 통해서도 나왔다. 현대차의 노조 파괴 책임을 묻기 위한 유성기업지회의 노력은 지난했다. 충청도에 있는 2개의 공장을 두고 현대차 본사가 있는 서울 양재동까지 올라왔다. 용역은 첫날부터 기자 회견을 방해했다. 현수막을 걷어차고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무릎으로 툭툭 쳤다. 집회 신고를 먼저 냈다는 이유를 들었다. 경찰은 노조원 2명을 연행했다. 남은 농성자들이 현대차를 상징한다는 비석 앞에 분향소를 차리고 열사의 영정을 지켰다. 분향소는 경찰이 둘러싸는 바람에 출입이 통제됐다. 그렇게 딱 3일을 보냈다.
현대차는 이들을 결코 현대차 앞에 세워 두지 않았다. 경찰이 불법 집회라며 조합원을 연행해 간 자리에 24시간 용역을 대기시켰다. 심지어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까지 동원해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비석 앞을 막아섰다. 그곳은 요새였다. 꼭 차지하고 있어야 승리할 수 있는 그런 요새. 용역은 그 요새를 지키는 용병이었다. 용역의 집회 방해는 똑같은 방법으로 지겹게 반복된다. 경찰서에서 대기하다 집회 신고를 먼저하고, 집회 장소를 미리 선점하는 것은 기본이다. 폭력 상황을 유발해 경찰의 개입을 유도하기도 한다. 노조와 용역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면 경찰은 사전에 충돌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집회 신고를 반려한다. 노조가 경찰의 판단을 무시하고 계획했던 집회를 계속하면 불법 집회가 된다. 확성기를 타고 나오는 경비과장의 “여러분들은 지금 불법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말들이 익숙하다.
최근 현대차는 본사의 상징석이라 불리는 이 비석에 천을 입혔다. 모든 글자는 천에 가려 보이지 않고 거대한 돌덩이 실루엣만 드러난다. 덕분에 언론사 기자들이 와서 용역과 노조, 경찰의 충돌을 찍어 가도 현대차는 보이지 않게 됐다. 하도 커서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노출됐던 현대차 이름이었다. 열사의 친형인 국석호 조합원은 이미지 관리 차원의 대책이라고 봤다. “현대차의 상징이라는데 언론에 자기들 로고가 나가는 것을 꺼리겠죠.” 농성장을 지키던 한 조합원은 “저 비석에 계란이라도 던질까 봐 막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가끔 조합원들이 정몽구 회장을 본뜬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고 하니, 사측이 비석 앞에 모이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눈에 보인다.
비석과 비석 앞 공간을 워낙 중히 여기니, 이곳에서 집회를 열었던 노조는 손에 꼽는다. 유성기업지회가 비석 앞에 분향소를 차린 것은 단 3일이었다. 그것마저 이제껏 없었던 일이다. 동희오토, 현대차 사내하청지회 등 하청사들의 집회는 어김없이 주변으로 밀려났다. 유성기업지회 역시 근처 농협 하나로클럽 앞에 천막을 치고 집회를 이어 가고 있다. 노조가 주변으로 밀려나기 전까지 현대차 비석 앞은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용역은 노조를 밀어내기 위해, 노조는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경찰의 행동은 일사불란했지만 기준이 없었다. 때때로 조합원들은 고약한 용역에게 걸릴 때가 있는데 경찰에 도움을 요청해도 본척만척했다. 그래서 경찰은 자본과 한패라고 욕을 먹었다. 헌법재판소는 “집회 장소가 바로 집회의 목적과 효과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누구나 ‘어떤 장소에서’ 자신이 계획한 집회를 할 것인가를 원칙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만 집회의 자유가 비로소 효과적으로 보장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 현대차 비석 앞이든 어디든 집회 장소는 노동자의 자유다. 사내하청지회가 본사 앞에서 집회를 시도할 땐 비석 앞 공간에 서지 못하게 못을 거꾸로 촘촘히 박아 놓기도 했다. 올라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정작 그 장소를 자주 이용하는 건 경찰이다. 높은 비석 위에 올라가면 채증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조는 ‘유령 집회’를 중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단순히 회사 앞 공간을 선점하기 위해 하는 집회 흉내이고, 다른 집회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유령 집회를 용인하는 경찰을 향해서도 비판이 나온다. 노조가 집회할 땐 불법이라며 여러 번 끌어낸 전적이 있다. 경찰은 이 이중 잣대를 어떻게 설명할까. 서초경찰서 관계자는 “유령 집회 기준이 애매하긴 하다”면서도 “(용역들이) 가끔 구호를 외치기도 해서 유령 집회로만은 볼 수 없다”고 얘기했다. 노조 집회만 불법으로 규정하는 이중 잣대에 대해서는 권한 밖의 사항이라며 답하지 않았다.
선진화 띠를 두르고 집회 중인 그들에게 다가갔다. 모여 있는 용역들과 1미터쯤 떨어져 관리자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집회의 이유와 목적을 물었지만 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용역들에게도 지금 집회를 하는 중인지, 몇 시간 동안 있을 건지 물었다. “우리에게 그런 거 묻는 거 아니다”라는 답변과 함께 매서운 눈빛이 쏟아졌다. ‘선진 집회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가자’면서 정작 시민의 관심은 불편한 모양이었다.
(워커스16호 2016.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