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세계화에 빼앗긴 사람들, 그 너머에는
정은희 기자
4월 23일 영국 런던 롬 포드에 위치한 마거릿 대처 하우스.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쁘다. 영국 수호성인 세인트 조지를 기리는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대처는 이곳에서 철의 여인으로 여전히 칭송받고 있다. 그녀의 얼굴이 벽에 가득한 액자 속에서 방문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캐머런 총리에 대한 대우는 정반대다. “캐머런의 사진을 보고 싶나요?” 노년의 여성이 여러 개의 대처 액자 뒤에서 캐머런 총리의 사진을 꺼낸다. “숨긴 건 아니에요. 하지만 자리 낭비죠. 그는 영국을 EU(유럽연합)에 팔아넘겼어요. 그래도 사진 한 장쯤은 있어야겠죠. 어쨌든 우리 총리니까요.”
독일-프랑스 협력 공영 방송 아르테TV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브렉시트 악몽’의 한 장면이다. 브렉시트 투표를 앞두고 방영된 이 다큐엔 불안한 미래에 대한 영국인의 근심이 가득하다. 대처가 주도한 신자유주의의 극심한 분열과 양극화 속에서 화살은 이민자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서구가 이식한 신자유주의에 먼저 희생된 이들이라는 점은 좀처럼 조명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민자들은 왜 영국으로 와야 했던 것일까? EU 출신 이민의 주요 이유는 일자리 문제였다. 올해 5월 영국 통계청이 발표한 이민 통계에 따르면, 2015년 영국으로 이주한 EU 출신의 61%가 일자리 때문이었다고 답했다.
어머니와 두 자녀와 링컨셔 주 보스턴으로 이주해 온 리투아니아 출신 여성도 그렇다.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제조업 공장에서 일한다. 돈 벌기는 녹록지 않다. “아무도 사회 보장비 때문에 영국으로 온 게 아니에요. 일자리를 얻으려고 왔어요. 아이들과 우리 가정을 좀 더 잘 돌보고 싶었어요. 생계비는 비슷하지만 리투아니아 임금은 너무 적었거든요.” 그녀처럼 다른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도 임금에 붙은 세금을 꼬박꼬박 낸다. 2014년 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연구진이 2001년부터 2011년 사이 EU 출신 이민자가 받은 복지비와 이들이 낸 세금을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이민자들은 오히려 200억 파운드(30조 3000억 원)의 세금을 더 냈다. 그러나 이민자들은 브렉시트 국민 투표 후론 더욱 늘어난 극우 폭력에 길거리 다니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폴란드 노동자의 엑시트
일자리를 찾아 대륙을 건너 영국까지 찾아온 이주노동자들. 이들 이민은 신자유주의가 낳은 동구권 노동자의 엑시트(출구)였다. 영국으로 가장 많은 이민자를 배출한 EU 출신국인 폴란드가 대표적 사례다.1)
1989년 폴란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들어선 자유주의 마조비에츠키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와 세계은행(WB)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했다. ‘충격 요법’이라는 발체로비치 계획이 수립돼 국영 기업 민영화, 외국인 투자 제한 철폐, 노동 유연화를 기조로 구 사회주의 국가 모델을 전면 구조조정했다. 한국과 비슷하게 자유화된 상품 및 서비스 시장과 변화된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 국영 기업 매각은 세계은행이 <2005년 민영화 보고서>에서, 브라질, 중국, 인도,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가 1990~2003년까지 민영화로 발생한 세계 전체 수익의 41.3%를 냈다며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폴란드를 언급할 정도로 대대적이었다. 그러나 국영 기업 매각으로만 3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1989년에서 1993년 사이 거의 제로 수준이던 실업률은 1994년 16.4%까지 증가했다.
강화된 신자유주의 노동 개혁이 실업률 폭증의 계기가 됐다. 1998년에서 2001년, 폴란드 자유주의 정부는 두 번째 신자유주의 개혁을 몰아쳤다. 이번에는 1993년 창립한 EU가 가세했다. EU는 유럽통화동맹(EMU) 확대를 위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준수하라고 폴란드에 요구했다. 폴란드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위한 통화 및 환율 안정, 재정 규율과 긴축을 시행했다. 더불어 보건, 공공 서비스, 교육과 연금 서비스 민영화도 더욱 확대했다.
폴란드는 이러한 구조조정을 통해 사회주의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체제 전환에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혔다. 폴란드 GDP는 세계 경제 위기 이후에도 평균 2% 이상 성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폴란드는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유럽 국가 중 최악의 저임금 노동 시장으로 전락했다. 노동 개혁을 통해 ‘쓰레기 계약직’이라 불리는 임시 계약 노동자의 규모가 2000년 5.8%에서 2011년 27%까지 증가했다. 이는 EU 평균(14.1%)의 약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사회 보장과 실업 기금도 축소되면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더욱 추락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2011년 폴란드 아동 빈곤율은 영국의 두 배 수준으로 악화했다. 또 수도 바르샤바에서만 부촌과 빈민촌 사이 수명은 평균 15년 차이가 났다. 2012년 OECD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폴란드 지니 계수2)는 1990년대 0.27 이하였으나 2010년에는 0.34로 확대됐다.
가난에 찌들고 적체된 실업 인구는 EU 가입을 통해 취업과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자 서구로 밀려들었다. 유럽노조연맹(ETUC)이 올해 발간한 <유럽 실업, 내부 평가 절하 및 노동 시장 규제 완화>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이전에 폴란드 이민 비율은 약 2%였지만 2002~2007년 사이 150만 명이 폴란드를 떠났고 결과적으로 해외에 사는 폴란드 인구는 거의 세 배가 됐다. 150만 명은 2007년 폴란드 경제 활동 인구의 약 9%에 해당한다.
결국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민영화와 노동 유연화는 더 잘사는 서구를 향한 폴란드 노동자들의 디아스포라를 유발했다. 폴란드의 저임금 노동력은 신자유주의의 노동 분할 속에서 영국 정부와 자본에는 도움이 됐지만 영국 저소득층에게는 경쟁이 강요됐다. 폴란드의 이 같은 상황은 동구 여러 나라의 모습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서유럽 이주노동자들의 송금액이 국내 총생산의 10~20%에 달할 정도로 이주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결국 폴란드 노동자들의 대이주 그리고 이에 대한 1세계 가난한 이들의 반이민자 정서는 서구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유발한 결과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27일 브렉시트 결과를 놓고 “세계의 루저(실패자)들이 반란하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이들 모두는 루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이다. 1990년대 구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을 전후로 서구는 이들 국가에 신자유주의 체제를 이식했다. 1970년대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표면화된 뒤 1980년대 영국 대처와 미국 레이건 정권에서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했다. 이는 자본 시장 자유화, 외환 시장 개방, 정부 예산 삭감,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등 자본의 세계화와 정부 축소를 골자로 자본의 위기를 민중에 전가했다. 국제 무대에선 세계 금융과 무역을 규제하는 WTO(세계무역기구),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이 자유 무역과 구제 금융이라는 형식으로 각국 경제 위기에 개입하며 구조조정을 했다.
이 같은 자본의 세계화 문제는 1980~1990년대에는 남미와 아시아에서 그리고 서구에선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를 고비로 첨예해졌다. 유럽 우파와 사민주의 정권은 EU가 지구화의 시대, 유럽 시민의 이익을 위한 연합체로 봉사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유럽 경제 위기가 시작되자 EU와 각국 정부는 파산한 은행들을 구제하면서 민중에 그 희생을 전가했다. 결국 각국이 경쟁적으로 시행했던 긴축으로 유로 존 실업률은 10% 이상 치솟았고, 그리스 경제는 약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긴축은 이전 국민 국가가 보장했던 제한적인 복지 국가 모델마저 침식했다. 노동권보다는 고용주 우선 정책이 늘어 갔다. 초국적 자본에 맞선 사회적 유럽을 상징하며 2014년 떠들썩했던 금융 거래세조차 여전히 도입되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민족주의와 극우 세력이 수년 동안 분노하고 절망한 사람들에 쉽게 다가갔다. 그러나 이들은 경제 위기와 긴축, 중동 전쟁의 여파로 늘어난 난민 인구의 확대 속에서 근본 이유인 신자유주의 모순에는 눈을 감고 인종주의와 보호주의를 선동했다. 이제 프랑스 국민전선, 독일 대안당, 영국 독립당 등 극우는 정치권력에 더욱 가까워졌다. 미국 트럼프도 대권을 넘보고 있다. 그러나 비단 서구뿐 아니라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 속에서 최근 마크리 우파 정권이 복귀한 아르헨티나, 필리핀의 트럼프라 불리는 두테르테 대통령 집권 등 자본주의 주변부에서도 극우/우파 정치 담론은 더욱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급진적 경제, 이주 정책
대처 하우스 행사에 참석한 한 노년 신사의 양복은 빳빳하게 빛났다. 그는 “우리 대영제국은 대양을 지배했습니다. 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어디서나 우리 의회를 모방했죠. 그런데 왜 유럽 정치인들이 우리를 지배해야 하지요? 왜 우리가 더 이상 꼼짝없이 있어야 합니까?”라고 아르테TV에 대거리를 한다.
하지만 뻣뻣한 목소리만 있는 건 아니다. 브렉시트 찬성표가 67.5% 나온 영국 잉글랜드 북부 랭커셔 주 해안 블랙풀의 한 중년 여성은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녜요.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주민을 감당할 수 없어요. 자원이 없어요. 더 많은 사람이 온다면 미래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말 거예요. 여기는 그냥 작은 섬일 뿐이잖아요”라며 미안한 듯 말한다. 그녀의 말소리엔 인적 드문 ‘빙고 파라다이스’ 게임장 슬롯머신 기계음이 나지막하게 섞였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 모두가 민족주의나 극우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극우로 대표된다.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에 반대하며 대안 세계화를 외쳤던 활동가들은 이 현상에 누구보다 진지하다.
영국 활동가 조셉 토드는 좌파 언론 <레드 페퍼>에 “우리는 브렉시트에 찬성한 이들이 은행과 정치인, 유럽 관료주의만이 아니라 대도시 중산층, 고학력자, 잔류에 압도적으로 표를 던진 진보 세력들조차도 엘리트로 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암암리에 또는 명시적으로 노동자 계급을 인종주의자나 호모포비아 또는 성차별주의자로 모욕해 온 이들, 정치인과 더불어 그들의 근심을 무시했던 자들 모두를 말이다. 그래서 토드는 현재 노동자 계급의 염려를 비웃거나 애국주의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히려 매우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경제적으로 주변화되고 습관적으로 무시된 이들에 귀 기울이는 확고하고 급진적인 경제 정책과 이주 정책을 통해서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본다. 이민자 대신 글로벌 자본주의와 긴축이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임을 알려야 한다는 주문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브렉시트가 국민 투표로 가결되자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영미, 한영 FTA를 서두르고 있다. 마침 대서양 건너 미국에선 공화당이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를 수용한다면서 ‘미국 우선주의 무역 협정’이라는 정강을 마련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파 정치인들도 극우와 타협하며 준비된 듯 더 극단의 보호주의로 돌아섰다. 결국 영국 독립당과 보수당 우파는 현재의 신자유주의도 충분치 않았다. 서구의 우파는 다시 노동자들을 어디까지 밀어붙이려 하는 것일까? 조셉 토드는 “문제의 뿌리는 경제 체제에 있다. 근본 이유와 씨름한다면 그 문제는 사라진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 영국 국가통계청(ONS)에 따르면 2014년 말 영국 시민권자 중 외국 출신은 인구의 8.3%인 약 530만 명인데 이 중 폴란드 출신이 약 85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2) 소득 격차를 계수화한 것이다.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정도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