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모든 뉴스에서 “11.7”이라는 숫자를 소리 높여 성토했다. 이 숫자는 다름 아닌 전기요금 누진율. ‘요금폭탄이 두려워 에어컨도 못 틀겠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누진제를 바꿀 수 없다고 하다가 대통령 한 마디에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누진제를 개선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한여름 폭염이 오기 전인 6월, 정부는 〈에너지·환경· 교육분야 공공기관 기능 조정방안〉이라는 이름으로 전력과 가스 부문에 민간개방을 확대한다는 방침을 마련했다. 에너지 부문에 대한 실질적인 민영화 방안이다. 누진제와 민영화는 그냥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수면 위로 떠오른 걸까?
어쨌든 한전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한전은 원가 하락으로 올해도 엄청난 이익을 거뒀지만 전기 요금은 내려가지 않았다. 좀 이상하긴 하다. 공기업이 적자를 보면 적자를 본다고 ‘부실’과 ‘비효율’이라는 딱지를 붙였는데, 이제는 흑자를 내도 비난받는다. 물론 공기업이 흑자를 내는 게 잘했다고 하는 건 아니다. 적자든 흑자든 상관없이 공공기관에는 ‘시장경쟁 도입이 답’이라는 논리가 암암리에 퍼져나가는 것일 뿐.
누진제 논란 뒤에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정부가 정말 국민의 편의와 경제사정을 위해 누진제를 개편하겠다고 하는 걸까? ‘효율성’, ‘경쟁’, ‘스마트’ 같은 단어들 속에 숨은 것은 무엇일까? 전기요금을 둘러싼 의식의 흐름 속에서 민영화에 어느 정도까지 발을 담그고 있는지 나를 찾아 떠나는 시간을 가져보자.
A type
민영화 품은 청와대
과거 김대중 정부에서 현재 박근혜 정부까지, 전력 민영화를 위해 노력한 역대 대통령과 같은 일관된 논리를 갖고 있다. 민영화는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 누가 뭐래도 나의 길을 간다.
한여름 너무 더워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싶어도 전기세가 무서워 함부로 틀지 못했다. 하지만 그걸로 누진제를 폐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고개를 돌려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없는지 한번 살펴볼 노릇이다. ‘누진제 없앨 테니 전력 판매시장은 민간에도 좀 넘겨주자’고 하는 순간, 이제 여름 한 철 비싼 돈 내는 게 아니라 1년 내내 비싼 요금 물게 될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공기업은 오너 즉 주인이 없어서 경영이 방만하고 해이하다고 생각해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데 한 표 던진다면 더욱 이 타입일 가능성이 높다. 공기업의 주인은 국가와 국민인데, 주인인 자기를 부정하고 주인 찾기에 나선다면 자기 것도 못 챙기는 사람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이 공기업을 민영화했던 것처럼.
B type
함부로 민영화
어쩌면 당신은 A type보다 민영화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더 확고할지도. 공기업의 독점은 뭔가 문제가 있고, 경쟁이 도입되어야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믿고 있다. 하지만 민영화의 폐해에 대해서도 욕을 할 줄 안다. 뭔가 스마트 한 것을 쫓으면서 함부로 가는 그 길은 다름 아닌 민영화.
경쟁하면 품질도 좋아지고 가격도 싸질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경쟁 나름이다. 더우면 선풍기라도 틀어야 하고, 냉장고도 돌려야 하며, 24시간 내내 불 끄고 살 수도 없다. 당장 핸드폰 충전도 해야 하니까. 간단히 말해, 누가 얼마에 판매하든 우리는 전기를 쓸 수밖에 없다. 기업은 낮은 가격에 좋은 품질의 상품을 제공하려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수익을 내기 위해 경쟁한다. 그걸 아니까, 기업을 아니까, 보다 스마트하게 실시간으로 전기 사용량을 체크하고 한 푼이라도 줄여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아날로그 보다는 스마트한 게 좋다며 스마트 계량기 달고 함부로 민영화.
게다가 요금제가 다양해지는 것은 더 좋다. 정부는 핸드폰 요금제처럼 다양한 요금제를 통해 소비자가 필요에 맞게 요금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단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한 가지. 그래서 통신요금은 저렴할까? SK 텔레콤, LG 유플러스가 통신요금을 깎아주기 위해 장사하는 게 아니듯이, 한전을 대신해 이런저런 ‘다양한’ 요금제를 들이댈 전기 판매회사들도 딱히 우리를 위해 장사하지는 않을 터.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한전이 독점해서는 안되고 요금제도 경쟁이 좋아서 전기 판매도
C type
전기인더트랩
덫인 줄 알면서, 민영화가 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 치명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당신. 민영화의 덫 속에 놓인 달콤한 전기를 움켜잡기 일보 직전이다.
사실 전기는 한전에서 만드는 게 아니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한전을 민영화하려고 보니 덩치가 너무 큰지라, 조각조각 내서 팔아치우려고 했다. 그래서 일단 전기를 만드는 발전 부문을 분리해서 5개 발전사로 쪼개놓았고 여기에 한국수력원자력까지 포함하면 6개 사다. 한전은 이 발전회사들이 만든 전기를 구매해서 판매하는 일을 맡는다. 6개로 쪼개진 발전사들을 민영화하려고 했지만, 당시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파업까지 불사하며 민영화를 막았고 국민 여론도 부정적이어서 분할만 시켜놓고 민영화는 잠정 유보했다.
그런데 이미 우리나라 발전 설비 용량의 1/4 정도는 민간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민간기업이란 포스코, SK, GS, 삼성 등 대재벌이다. 민간 발전소를 허용해주고 점점 늘려온 결과다. 애초에 발전소 같은 엄청난 비용이 드는 국가 기간망 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게 재벌 규모의 자본 말고 또 있을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전기를 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옮겨서(송전) 필요한 곳에 보내는 것(배전), 그리고 판매하는 것까지 열어주는 것. 그러면 민영화는 완성된다. 당신은 민영화에 엄청 적극적인 것도 아니지만, 차근차근 당신 집 앞까지 도착한 민영화에 이미 빨려 들어가고 있다. 앗, 전기요금에 이동통신, TV에 전화, 인터넷까지 결합한 상품이, 대박~. 아닌 줄 알면서, 미끼인 줄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하는 치명적인 민영화의 유혹.
D type
공공성의 후예
민영화는 결사반대인 당신,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내지 말입니다.” 민영화가 되면 오히려 공공요금이 폭등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백열등 뒤 눈부신 듯 흩어진 군복은 뭔가 거슬리는데….
요금이 가장 와 닿는 문제인 건 사실이다. 수익성을 내기 위해서라도 민영화는 요금인상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 공공요금은 무조건 낮아야 하는 걸까? 거꾸로, 만약(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겠지만) 요금을 좀 낮춰준다고 하면 민영화는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이게 영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다. 올여름 폭염이 이어지면서 언론에서는 매일같이 ‘누진제가 비싼 요금을 내게 한다’며 공격했다. 누진제를 좀 완화하는 대신 여러 민간기업이 다양한 요금제로 전기를 판매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건 괜찮은 걸까?
또 한 가지.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공익에 봉사한다는 보장은 없다. 당연히 민영화보다야 좀 낫겠지만. 밀양에 송전탑을 세우려고 주민들을 밀어낸 건 한전이었고, 핵발전소 역시 국가 소유다. 오해하지 마시길. 민영화하자는 게 아니니까. 다만 국가가 소유하는 것을 넘어 좀 더 생각해보자는 거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국가가 소유하면 관료적으로 통제되는 것도 일부분 맞고, 공공의 이익보다는 정부의 지시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도 맞다. 그럼 우리는 국가가 소유하는 것과 함께 ‘누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E type
뷰티풀 마인드
민영화냐 공공성이냐 혹은 생활의 편리냐 아니냐, 실익이냐 아니냐보다 일단 환경이 먼저라는 당신, 뷰티플 마인드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마음만큼 현실도 뷰티플한 지는 지켜볼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 전력생산이 대부분 원자력과 화력발전으로 이루어지다보니 그 자체로 환경과는 상극이다. 거기다 발전설비를 늘려나가면서 전기를 많이 쓰도록 했고, 원료비도 문제지만 당장 지구를 말아먹게 생겼다. 필요한 전기를 안 쓸 수는 없지만, 지금도 원가 이하인 요금을 더 내려서 전기를 과하게 쓸 수도 없는 노릇.
그런데, 민영화를 막는다고 그 자체로 친환경 발전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국가 책임에서 떠나버리게 되면 친환경은 더 멀어진다. 예를 들어보자. 올해 한전 수익이 역대 최대라고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돈을 친환경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는 데 쓰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한전은 외국인 지분만 30%다. 올해에는 전체배당금으로 2조 원가량을 지급했다. 소유구조가 바뀌면 운영원리는 당연히 바뀐다. 지금이라고 친환경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공영역으로 남아있는 한 바꿔낼 수 있는 여지라도 있다. 민간으로 넘어가면 얄짤 없다. 수익과 배당 속에 친환경 요구는 메아리에 그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