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은 그에게 경계가 사라진 경험을 안겨줬다. 고비 사막으로 떠난 여행의 기억은 지점과 지점, 거리와 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거대한 풍경 속에서 안과 밖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카입은 그때의 기억을 재료로 소리를 만들고 공간을 구현하며 풍경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전자음악에서 출발한 그는 자신의 보폭을 자신의 속도로 넓혀가고 있다. 카입은 미술과 음악 각 매체와 소재를 달리 보지 않는다. 각자의 특성을 조합하고 구성해 자신의 세계, 자신이 가장 흥미로운 것을 해나가는 작가다. 하림이 카입을 만났다.
하림(하) 카입은 음악에서 출발해 미술이나 다른 분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요즘 미술이라고 하면 벽에 걸린 작품만 생각하지 않는다. 미술의 형태를 규정하는 게 어폐가 있어 보이는데, 어떤가.
카입(카) 이것과 저것, 미술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 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음악을 할 때는 보통 작곡가로 불렸는데, 영어로 composer 아닌가. 무언가를 구성한다는 뜻인데, 사실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매체에 구애 받지 않고 쓸 수 있는 말 같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음악을 만들어내는 의미가 있어서 맥락이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 구성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 자신을 composer라고 생각한다. 그 재료 자체가 꼭 소리일 필요는 없다. 미술에 한정해 놓을 필요도 없고. 다른 매체가 들어와서 다른 방식으로 조합해서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하 나는 이미지가 목이 말라서 음악에서 다른 매체로 점점 옮겨갔는데, 카입도 비슷한가.
카 목마르다기보다는 각 매체의 작동 원리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료만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맨 처음 시작할 때는 호기심 때문에 시작했는데, 지금은 역설적으로 음악 외에 다른 매체들을 다루는 작업을 하다 보니 소리가 잘할 수 있는 범위를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음악이 다른 매체에 비해서 더 잘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하고. (웃음) 다음 작업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 음악이 되게 기초적인 작업이고 동시에 퍼져나갈 수 있는 작업이다.
하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했나.
카 얼마 전에 바람이 불면 소리가 발생하는 장치를 전시했다. 하프를 이용한 구조체로 악기 같은 것이다. 시각적인 것이 소리에 기여하고 소리가 시각에 기여하는 것을 생각하며 시작한 전시다.
하 요즘 하는 음악 작업도 있나.
카 음악 하는 사람들과 무용 하는 사람들이 만나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국악을 하는 이들과 현대 무용하는 사람들의 만남이다. 두 매체가 만나는 지점에 관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안무가랑 이야기할 때 두 매체를 기계적으로 병치하는 것에서 벗어나 보자고 했다. 보통 무용과 음악이라면 움직임이 있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얹는데 그렇게 해보지 않으려 한다. 서로의 작동원리를 공유하며 작업해보려는 시도다. 지난번에는 ‘일원성’을 두고 작품을 풀어나가기도 했다. 하나의 조상을 가진 여러 개체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음악과 무용 역시 생명체가 진화하듯이 가지를 뻗어 나가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작업했다. 음 하나로 시작한 음악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앞 세대의 특성을 갖고 동시에 변이가 생기고. 움직임도 그렇게 하나의 동작에서 시작하고 변이하는 과정을 공유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피드백을 풀어내는 작업이었다.
하 또 어떤 걸 하며 지내나.
카 얼마 전부터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드는 기획을 하고 있다. 작년에 같이 일한 곳에서 아이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해서 시작했다. 한글을 이용해서 만드는 놀이터인데, 천지인이 퍼즐 같은 요소가 있더라. 자음과 모음으로 퍼즐을 쌓으며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려 한다. 자음과 모음에 센서와 조명을 부착해 둘이 만났을 때 소리가 나게 하는 거다. ‘기역’이랑 ‘ㅏ’랑 만나면 나는 소리 또 ‘니은’과 ‘ㅓ’가 만나서 나는 소리. 자연 음이 발생할 수도 있는 거고. 아이들 교육에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하 참 다양한 작업을 한다. 관심이 있는 주제가 있나.
카 예술이 아름다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기도 한 것 같다. 내 작업은 현실에 가까운 작업은 아니다.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랄까. 개인적으로 과학 서적 읽는 걸 좋아한다. 우리가 보는 현실이 좁은 틈으로 보는 세상이고 실제 세상은 우리가 전혀 접근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같은 것.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을 내 나름대로 풀어내고 있다.
하 지금 전시도 그 맥락인가.(카입 작가는 소마미술관에서 11월 20일까지 열리는 ‘어느 곳도 아닌 이곳’이라는 주제의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카 비슷하다. ‘경계의 풍경’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실제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다. 이곳과 저곳, 여기와 저기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풍경이다. 작업할 때 보통 소리를 먼저 떠올린다. 소리에서 시작해 그 소리가 들려올 법한 곳의 풍경을 이미지로 구현해 컴퓨터로 그린다. 빛의 움직임에 의해서 시간성을 주고 풍경을 가미해서 병치한다. 이번 전시에는 설치 요소가 들어갔는데 거울 같은 아크릴 미러를 이용해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표현해봤다. 우리가 본다는 건 결국 우리의 의식이 맺힌 상이니까. 그걸 형상화한 거라고 보면 된다. 실제 풍경이 있고 거기에 왜곡돼 비친 상이 있어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 질문할 수 있게끔 구성했다. 다른 작업 같은 경우는 원리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이 작업은 감각적인 작업이었다.
하 카입은 이야기 하고 싶은 부분이 명확한 것 같다. 음악과 사람, 작품에 그게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본인의 예술관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나
카 내게 흥미로운 작업을 이어갈 뿐이다. 개인적으로 매체들이 만나는 지점에 관심이 있다. 매체가 만났을 때 서로의 작동원리를 공유한다고 해야 하나 그것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것을 실험하는 지점이 재밌다. 하프 작업도 그렇고. 시각이나 소리 매체마다 고유한 작동방식, 원리가 있다. 이들이 서로 만났을 때 어떤 것들이 발생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하 예술가들은 존재에 고민을 놓지 않고 사는 사람들 같다. 카입은 어떤가.
카 자신의 존재와 고민을 현실에 가깝게 풀어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아닌 작가가 있는데 나는 (현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거 같다.
하 현실과 거리를 가까이하는 작품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그 이면에 자신의 욕망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카 작품에 작가의 욕망이 배제돼 있기는 어렵지 않을까. 인간의 본성이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 같다. 대신에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세월호 관련 책을 읽었는데, 정혜신 박사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심리치료를 하러 여러 현장을 다니면서 어느 순간 치료에 자신의 욕망이 들어가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고 하더라. 내가 유명해지기 위해서 하는 건가 하는. 그런데 그 기본적인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고 그게 있다고 인정하면 되는 거라는 말이었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에 대한 욕망도 그걸 인정하면 되는 거 아닐까 싶었다.
하 얼마 전 내가 하는 것을 두고 그게 일이야?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일로 보고 있지 않은 거지.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하는 일 자체를 어떤 식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카 예술도 일상의 일이다. 이걸 통해서 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거니까. 삶을 사는 방식이지 하는 행위가 다르지는 않다. 최근 설치작업을 하며 목공, 철근 하는 이들과 작업을 했는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은 용도가 있는 것들을 작업 하는 분들이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것의 용도가 뭘까 생각해봤더니 ‘용도가 없는’ 작업을 하고 있더라. 용도라는 건 어쨌든 보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생기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나는 사용 목적이 없는 것을 며칠씩 밖에 나와서 35도의 더위에서 하고 있구나 싶었다. 몇 명이 볼지도 모르고 몇 명이 의미를 담아갈지 모르지만 어쨌든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 무용한 것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나.
카 이걸 통해서 하루를 사는 거니까. 오늘 하루, 이걸 하면서 보내는 것. 그 자체가 의미다.
하 카입의 예술적 욕망이 궁금하다. 예술을 통해서 어떠한 욕망이 해소되는지도.
카 ‘예술을 통해서 세상을 바꾼다’라는 신념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예술은 내가 일상을 사는 방식이다. 단지 내가 관심이 있는 일을 하는 것 정도인데,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분들이 내가 하는 작업과 재료에 관심이 있어 하면 고마운 거고. 나는 내 관심을 쫓아가는 것이다. 내게는 일상인데, 이 일상을 잘 살면 다른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어차피 영원한 것은 없지 않나. 우리 모두 각자의 짧은 삶 안에서 거대한 흐름을 이어 가는 건데 그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하나의 구성이 된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진화에 관심이 많다. 오랜 시간의 진화. 거시적인 흐름 그 중간에 어떤 단계이자 그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다.
하 진화의 어떤 부분이 매력적인가
카 진화는 우열이 없다. 더 나아서 살아남은 게 아니다. 우연히 남은 형질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면 살아남는 거다. 이 흐름이 꼭 진보에 닿아있는 것도 아니다. 외려 찰나의 우연에 가깝다. 우연히 암수가 만나서 서로의 DNA를 반씩 나눠 조합하는 데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잘못된 복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면 이게 더 퍼지는 거다. 누군가의 손에 달린 게 아니다. 그래서 아메바나 우리가 우열로 구분되는 존재는 아니라고 본다. 우열은 없다. 실제로 다윈이 진화론을 썼을 때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진화라고 부르는 것과 진보의 관념을 등식화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생물의 구조를 고등이나 하등으로 표현하지 않기도 했고. 외려 다윈은 ‘우연한 변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하 세상은 나아지고 있는가,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가.
카 사람들은 보통 환경이 나아질 때는 잘 모르다 더 나빠지면 차이를 확 체감한다고 한다. 진화의 산물인데 자기가 가진 것이 줄어들었을 때 민감하게 반응해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비관의 힘이기도 하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차원에서는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은 맞는 거 같다. 얼마 전에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이 있는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에게 운명을 내다보지 못하게 했고 그 처방으로 맹목적인 희망을 주었다고 한 부분이다. 우리가 막 출항한 이 여행이 방금 끝맺은 것보다 더 나아갈 것이고 더 나을 것이라는 맹목적 희망을 굳건히 유지한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터뷰 하림 / 정리 신나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