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 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의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 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도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워… 워…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길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 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훨… 훨…”
(“92년 장마, 종로에서” – 정태춘, 박은옥)
92년과 16년
응팔에도 나오던 웬디스 버거가 치킨 집으로 바뀌고,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 단지로 변했고,
20대 청춘의 검은 머리에 잔설이 내려 40대를 훌쩍 넘겼다는 것 뿐,
역사는 나선형이라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