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비라] 이번에는 ‘기본소득’이다. 반값등록금, 기초노령연금에 이어 새롭게 발굴된 대선용 복지 이슈다. 만인에게 평등한 기본소득이라니. 왠지 지금의 궁핍한 생활과 불평등 구조를 일시에 해소할 만능키 같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자본주의 매커니즘이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힘의 기울기부터가 불평등한데, 저들이 순순히 돈과 불평등의 권력을 내어놓으려고 할까. 뭔가 또 다른 속내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참세상X워커스>는 궁금해졌다. 기본소득이 시행된 미래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평등할까. 그리고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총 5회에 걸친 기획 연재기사를 싣기로 했다.
[연재순서]
1) 나는 기본소득 받고 싶은데, 너는 어때?(링크)
2) 네가 가라, 기본소득 사회
3) 기본소득 184조원 is뭔들(링크)
4) 기본소득, 1라운드 시작한 실리콘 벨리 사장님과 노동자들(링크)
5) 절박한 내 인생, 기본소득 반대론자들이 밉다(링크)
* 이 글은 기본소득이 시행된 미래 사회를 상상해본 가상기사입니다.
가족 구성원
A는 L전자 하청업체 생산직 노동자다. 아내 B는 같은 업종 하청업체 경리로 일하다 A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아들이 아픈 후엔 일을 그만두고 아들을 돌보고 있다. 큰딸 C는 대학생 3학년이고 뇌병변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들 D는 특수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 2019년 8월 A 가족 수입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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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8월 A 가족 지출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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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의 2019년 8월 가계부를 살펴봤다. 월 소득 540만 원은 적지 않은 돈이지만 이 4인 가족은 거의 500만원 이상을 생활비로 지출한다. 특이 사항이 있다면 아픈 아들 때문에 약값과 치료비가 매달 나간다. 그래서인지 문화, 여가생활 비용은 거의 없다. 아들 통원 치료 때문에 매끼 음식을 할 수 없어 외식을 자주 할 뿐이다. 생활비 상승의 가장 큰 요인은 물가 승승, 약값 및 치료비 상승 등 외적인 요인에 있다. 모두가 일정 소득을 받게 된 이상, 물가는 오르게 마련이었다. 또 기본소득 재원 마련을 위해 기존 복지가 일부 축소됐다. 경제적, 정치적 변화로 기본소득을 호불호가 갈리는 복잡한 성격을 띠게 됐다.
기본소득 붐이 일었을 때, 정치권의 찬성파들은 좌우를 가릴 것 없었다. 이유는 달랐지만,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기본소득이 가져올 풍요로운 삶은 여러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소비됐다. 이는 국민적 지지로 이어졌고 재원 마련, 기존 복지와의 관계 설정 등으로 몇 달 좌충우돌하다 결국 개인당 월 60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정책이 시행됐다. 매월 10일, 전 국민의 통장엔 60만 원의 기본소득이 입금됐다.
기본소득, 정체가 뭐냐
A에게 기본소득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 생명체 같았다. 노동과의 연계를 끊는다는 기본소득 발상은 혁명적이었다. 어떤 조건 없이 소득을 재분배해야 한다는 요구는 시대에 부응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평소 노동자 정책에 관심을 가졌던 A는 미심쩍었다. 노동자를 위한 법률이 이렇게 쉽게 도입될 리 만무했다. 노동계 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기본적 생계를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당위성을 가졌지만, 노동조건이 후퇴도리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기본소득 논의를 이끈 건 엘런 머스크 테슬라 사장, 크리스 휴즈 페이스북 공동창업자 등 IT 기업의 CEO들이었다. ‘생산성이 초고도화된 사회에서 모든 게 풍성해지고, 저렴해지기 때문에’ 기본소득으로의 귀결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을 들여 기본소득 실험을 지원했고, 그 실험은 언제나 많은 지지를 받았다. 주요 언론들도 이런 결과를 꾸준히 실었고, 기본소득은 전 세계에서 법제화되기 시작했다. 기존 복지를 단일화하며 재원 조달 여력이 생긴 북유럽 국가에선 소득 하위 계층의 구매력이 향상하는 성과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기존 논의되던 30만 원 보다 통 큰 60만 원이 도입됐다. 청년들의 큰 지지가 이뤄낸 수확이었다.
만능 핑곗거리
기본소득 재원 대부분을 조달해야 하는 자본의 요구는 만만치 않았다. 자본은 기본소득법과 일명 ‘기업 구조조정 프리패스법’이 세트로 통과돼야 한다고 떼를 썼다. 구조조정이 코앞에 와 있고, 더 늦어지면 기본소득이라는 지원책도 없어질 줄 알라는 압력도 상당했다. 기회만 노리던 제조업 공장들로부터 자동화 기계를 도입하고 대규모 인력 감축을 했다.
A는 8차 임금단체협상 자리에 노측 교섭위원으로 참석했다. 사장과 노조위원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본다. 아마 오늘도 진전된 논의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측은 8차가 다 되도록 임금 동결을 주장하고 있다. 2년째 물가상승률도 못 따라잡는 임금인상률에 노조 역시 물러설 수가 없다. 기본소득은 임금 동결의 막강한 무기가 됐다.
사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올해는 동결하는 게 좋겠습니다. 영업손실도 그렇고 알다시피 법인세 부담이 상당하거든요. 이해하시죠?”
노동위원장 “기본소득이 녹차티백도 아니고 언제까지 우려먹을 작정인지… 제멋대로 인력 감축 보고서 만들어서 사람 내보내는 걸로 모자랍니까? 엉터리 보고서 때문에 잘린 사람은 잘린 사람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 남아있는 사람대로 제정신이 아니라고요. 이러다 정말 큰일을 치러야 정신을 차리죠?”
기본소득 도입 후, 임금은 심각한 정체 상황을 겪었다. 임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근거가 되는 생계비가 기본소득으로 벌충됐기 때문이다. 물가상승률을 들이대도 소용이 없었다. 사측도 법인세 인상이라는 핑곗거리가 있었다.
청년의 독립운동
인문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C는 취업준비를 하느라 한창 바쁠 시기다. 그렇지만 요샌 ‘기본소득으로 없앤 국가장학금 되돌리기 시위’에 매일 나가고 있다. C는 오래전부터 재정적 자립, 가족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꿨다. 그래서 2년 전, 국민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준다고 했을 때 환호했다. 평생 60만 원씩 통장에 돈이 꽂히니,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면 바로 독립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같이 청년을 팔아먹던 정치권이 이런 대박을 터뜨리다니 기특했다.
하지만 돈은 들어오는 만큼 새 나갔다. 기본소득이 도입되기 전인 2016년, 한 학기 등록금은 600만 원이었다. C는 대학교 1학년인 2016년 국가장학금으로 한 한기에 200만 원 정도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2017년 국가장학금이 기본소득 재원으로 쓰이면서 국가장학금은 없어졌다. 청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던 기본소득은 대학생인 C에겐 ‘줬다 뺐는 기본소득’이었다. 결국, 방학 중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최대한 벌고 용돈은 부모님에게 받아 쓰는 중이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1년에 최대 520만 원까지 받던 국가장학금이 사라져도 1년에 720만원을 기본소득으로 받으니 200만 원 이익을 보는 게 아니냐”라고 했다. 청년의 다양한 자아실현에 도움이 될 거라던 기본소득은 포장지만 화려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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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이 도입되고 오른 건 학비만이 아니었다. 대학 주변의 원룸 가격이 일제히 오르면서 대학생들은 학교와 멀리 떨어진 교외에서 집을 구해야 했다. 왕복 4시간이 걸려도 집에서 다니는 학생이 늘어났다. 7평짜리 월세가 2년 전만 하더라도 보증금 2,000만 원에 월 60만 원이었는데 최근엔 보증금 3,000만 원에 월 90만 원 정도로 크게 뛰었다. 기본소득을 도입한다고 정부는 부동산 소유주들에게 세금을 크게 거두기 시작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세입자가 떠안아야 했다. 주인은 주인대로 앓는 소리를 했지만, 세입자들의 고통에 비하면 엄살이었다.
비정규직 증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노동시장을 개혁하지 않고 도입한 기본소득은 청년 취업에도 별 도움이 못 됐다. 안 좋은 일자리가 늘어 차라리 기본소득을 용돈 삼아 일하지 않겠다는 청년들도 생겼다. 이들은 친구도 만나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사회 기반 시설을 강화하는 최선의 방법과는 거리가 멀고 금욕과 민영화 의제를 강화하는 재앙을 부를 것이다.’ 2017년 캐나다의 한 빈곤퇴치 활동가의 예견이 들어맞는 것도 같다.
“죄짓는 기분이야”
아들 D는 뇌병변 3급으로 거동할 수 없어 휠체어를 이용한다.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어머니가 등하교를 함께 하고 있다. 방과 후엔 언어와 보행을 위한 재활치료 수업을 듣는데 이 비용이 계속 인상돼 엄마의 불만이 크다. 특히 지자체에서 지원하던 보조비가 일시에 끊겼다며 엄마와 다른 학부모들은 대책회의도 했다.
이런저런 문제 제기에 앞장서던 엄마는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아무도 음식을 만들지 못할 상황이 와서 외식도 늘었다. D는 인터넷 기사를 통해 장애인 관련 지원이 대거 축소됐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과 같은 장애인이나 노인,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들은 기본소득을 ‘사회보장파괴법’으로 불렀다.
기본 복지 위에 얹어 주겠다던 기본소득은 결국 기존 복지수당과 통폐합됐다. 기본소득 찬성론자 중엔 기본소득이 다른 모든 공급시스템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파들이 있었다. 또 우파 정치인들은 빚을 내지 않고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력히 말했다. 최소한의 생계선을 건드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지원되던 복지비는 가장 먼저 축소됐다. 정치적 합의는 늘 이렇게 이상에서 후퇴했다.
확실히 과거 사회보장체계는 전면 개정이 필요할 만큼 문제가 많았다. 새로운 소외 계층인 ‘청년’은 대상자에서 빠져있었고, 수급자에게 끊임없이 무언가 요구하고 수치심을 줬다. 가난을 증명하는 절차 등이 일시에 없어졌다는 것은 기본소득의 장점이었다. 딱 한 가지 장점.
엄마가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차로 돌아온다. 엄마는 이제 재래시장을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이대로라면 엄마한테 어떤 반찬을 먹고 싶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댁들의 가계부, 다들 안녕하십니까?
모든 가격이 올라 간단한 반찬거리만 사도 5만 원이 훨쩍 넘어간다. 기름 가격은 어찌나 올랐는지 집과 멀리 떨어진 특수학교가 야속하다. 마이너스 통장을 이때만큼 쓴 적이 있나 싶다. 물가가 이렇게 오른 이유는 아마 기본소득 탓일 게다. 정부는 소득이 늘면 응당 그만큼 쓰는 게 당연하다며 소비를 장려했고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남편의 직장도 말들이 많다. 노조 간부인 남편은 구조조정 일순위.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답답한 마음에 부업이라도 할까 싶어 구인광고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사기를 치라는 건지, 부업을 하라는 건지. 관련 글을 읽어도 아리송하다. 늘어나는 한숨에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은 아들만 애꿎은 눈치를 보고 있다.
남편은 종종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요즘엔 온갖 영양제를 사들이고 있다. 가족 중 아픈 사람이 늘면 큰일이라는데 맞는 말 같아 그냥 놔두고 있다. 그래도 불안한지 가족 보험도 들어놨다. 공공 의료혜택이 줄면서 민간보험료가 크게 올랐는데 아랑곳 안 한다. 이렇게 돈 쓸데가 늘어났지만, 기본소득은 늘지 않을 것 같다. 언론에서 ‘재정 절벽’이니 ‘국가 파산’이니 하면서 임금 인상 뿐 아니라 기본소득 인상까지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네 가족이 먹고살기 참 팍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