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비라] 이번에는 ‘기본소득’이다. 반값등록금, 기초노령연금에 이어 새롭게 발굴된 대선용 복지 이슈다. 만인에게 평등한 기본소득이라니. 왠지 지금의 궁핍한 생활과 불평등 구조를 일시에 해소할 만능키 같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힘의 기울기부터가 불평등한데, 저들이 순순히 돈과 불평등의 권력을 내어놓으려고 할까. 뭔가 또 다른 속내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다. <참세상X워커스>는 궁금해졌다. 기본소득이 시행된 미래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평등할까. 그리고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총 5회에 걸친 기획 연재기사를 싣기로 했다.
[연재순서]
1) 나는 기본소득 받고 싶은데, 너는 어때?(링크)
2) 네가 가라, 기본소득 사회(링크)
3) 기본소득 184조원 is뭔들(링크)
4) 기본소득, 1라운드 시작한 실리콘 벨리 사장님과 노동자들
5) 절박한 내 인생, 기본소득 반대론자들이 밉다(링크)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이 서구에서도 치열하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실리콘벨리 사장님들과 노동조합의 입장이다. 가시권에 들어선 기본소득을 두고 사장님들과 노동자들의 이마엔 이제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실리콘 벨리, “21세기 사회적 백신”
주지하듯 실리콘 벨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의 열성 지지자 중 하나다. 그래서 이들은 심각한 실업 문제로 신음하는 청년들에게 선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페이스북과 휴렛팩커드 이사로 벤처 투자가인 마크 안드레센, 웹 구루의 팀 오라일리 등 사장님들은 기본소득이 “21세기 사회적 백신”이라며 차례로 지지를 밝히고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인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는 지난해 5월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사는 100 가구에 매달 1,000-2,000 달러(114-229만 원)를 지급하는 자체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실시하겠다고도 밝혔다. 테슬라모터스 창업자이자 대표인 일론 머스크도 기본소득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뿐 아니라 독일텔레콤의 대표도 기본소득을 열렬히 지지한다.
사실 전통적인 기업들은 기본소득에 주저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실리콘 벨리 사장님들이 유독 발 빠르게 치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가디언>에 따르면, 이들은 기본소득이 파괴적인 기술을 보조해 사회를 안전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와이 컴비네이터 연구책임자인 엘리자베스 로데스는 “기술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에서 소득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기존 사회 안전망의 대안을 탐구하기 위해 오클랜드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다. 기본소득이 ‘위험을 감수하는 자들’을 지원해 4차 혁명을 수행할 사람들을 길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허점 투쟁이인 기존 사회복지 모델을 구조조정하는 데도 안성맞춤이기 때문에 지지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니까 이들은 4차 혁명에 따른 일자리 유실을 전제하고 이를 위한 사회안정망이자 인적 투자로서 기본소득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결국 실리콘 벨리 사장들의 속내는 그들이 기술을 개발해 돈을 번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주역일 4차 혁명을 위해 기본소득 도입에 더욱 열성인 것이다. 노동 착취를 고도화하며 일자리를 없애는 4차 혁명을 위한 사회안정망을 만들자! 이쯤이면 노동자들에게는 심각한 경고음이 될 수 있다.
핀란드·스위스·독일 노조, “안돼요 안돼”
그렇지 않아도 서구에서는 기본소득을 둘러싼 노동조합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선 스위스의 주요 노동조합들은 오랫동안 기본소득 반대 입장을 밝혀 왔다. 지난해 6월 5일 기본소득 도입에 관한 주민투표를 앞두고도 스위스에서 가장 큰 스위스노총(SGB) 대표단은 조합원들에게 반대를 추천했다. 스위스노총이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이유는 “좋은 의도지만 잘못된 시도”이며 “무조건성은 유감스럽게도 허상일 뿐”이라고 한다.
SGB 홈페이지에 게시된 다니엘 람페르트 경제부장의 칼럼에 따르면, 기본소득이 사회복지를 대체할 경우 복지혜택이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스위스 사회복지 모델은 연령, 질병, 사고, 실업 등을 겪는 당사자에 대한 연대적 지원을 기초로 운영되고 있는데 만약 일반 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으로 사회복지가 소급된다면 이들 위험으로부터 당사자 개인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혜자 문제도 해외 거주 여부나 국내 이주자 등 때문에 현실성을 가지기 어렵다고 봤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정책은 정치적 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로서는 사회복지만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스위스는 알려졌듯 찬성 23%, 반대 76.9%로 이 주민투표를 부결시켰다.
기본소득 파일럿 프로젝트가 실시된 지 약 두 달이 된 핀란드에서도 최대 노총인 중앙노총(SAK)이 “기본소득은 무용한 프로젝트”라며 “작동 가능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카 카우코란타 중앙노총(SAK) 경제부장은 지난 10일 <블룸버그>에 “기본소득 프로젝트는 잘못된 방향으로 난 사회정책”이라며 “높은 수준의 고용 없이, 포괄적인 사회 보장을 위한 재원 마련은 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할 동기를 떨어트려 노동력을 약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독일에서도 독일노총(DGB) 등 주요 노동계가 오래전부터 반대 의사를 밝혀 왔다. 소규모 노조들도 기본소득에 반대한다. 독일 금속노조 IG메탈은 지난 1월에만 해도 독일 일간지 <벨트>에 기본소득이 “사회적이지도 경제적으로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밝혔고 프랑크 브시르스케 독일서비스부문노동조합연맹(Ver.di) 위원장은 “재정 충당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낮은 수준의 기본소득은 이미 기본소득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독일경제조사연구소(DIW)의 2014년 연구에 따르면, 독일 노동조합들이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주요 이유는 첫째, 기본소득이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상실하도록 위협할 것이며, 둘째 고용 보장을 약화하는 보다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드는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은 기본소득이 촉진될 경우 노동 중심성이 약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노동조합들과 마르크스주의 분파의 반대 때문에 독일 기본소득네트워크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공동대표가 된 카트야 키핑의 좌파당까지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 노동조합들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영국노총(TUC), 일반노조(GMB), 유나이트(UNITE)는 지난해 9월 차례로 기본소득을 지지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노조 뿐 아니라 좌파 의제로도 부상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제레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가 기본소득 제도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 이어 존 맥도널 노동당 예비내각 재무장관은 이달 초 기본소득안을 위한 워킹그룹을 만들겠다고 표명했다. 영국 노동조합들의 반응이 다르기는 하지만, 소니아 소다 옵저버 수석 논설위원이 19일 <가디언>에 기록한 것처럼, 영국 노조들은 더 큰 단체 교섭권을 보유한 핀란드 노조 보다 잃을 것이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노동당 내에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노동당 대표 선거 때 제레미 코빈을 추천한 36명의 의원 중 한 명이었던 존 크루다스 의원 등은 기본소득 때문에 노동조건이 더 열악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반자본주의 논거가 필요하다”
결국 기본소득이 장밋빛 청사진과는 다르게 노동 조건과 사회복지를 후퇴시켜 노동자에 대한 ‘트로이 목마’가 될 것이라는 우려와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러한 논란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편에선 반자본주의에 입각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제시 A. 마이슨은 미국 사회주의 저널 <자코뱅>에 지난 8월 “기본소득은 정치 스펙트럼에 따라 그의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사회주의자는 이에 반자본주의의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 원칙으로 △노동시장의 포악성으로부터의 해방 △사회복지 프로그램으로서의 기본소득 △공공부문 고용 확대를 통한 새로운 사회보장 제도 구축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기본소득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는 캐나다에서 오랫동안 빈민운동을 해온 한 활동가는 기본소득 운동이 아니라 기존 사회복지 투쟁을 강화해야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존 클라크 활동가는 <텔레수르>에 17일 “사회복지를 공격하지 않는 기본소득 모델을 종이에 그려보는 것은 꽤 가능한 일이지만 현행 정치경제적 의제와 힘의 균형에 기초해 고려해야 한다”며 “결국 다보스 1%의 취향을 희망하는 것 보다 훨씬 나은 접근은 과거의 성과를 방어하고 확대된 그리고 접근가능한 공공서비스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과연 우리는 노동 착취를 고도화하는 실리콘 벨리 사장들의 구호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정치 환경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