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숙(인권운동사랑방)
<옥자>에 대한 감상평이 분분하다. 모든 예술이 취향에 많이 의존하듯, 영화에 대한 평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옥자>는 감독에 대한 기대로 그게 더 심해진 듯 보인다. 봉준호의 전작을 본 관객들의 높은 기대가 실망을 낳는 역설! 영화를 보며 ‘괴물’과 ‘플란다스의 개’가 오버랩 될 때 더 그렇다. 그럼에도 평가는 상대적이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다른 영화에 실망한 사람들은 <옥자>를 보고 ‘그래도 역시 봉준호!’라며 후한 평가를 매긴다.
아무래도 <옥자> 감상평의 큰 변수는 영화를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봤느냐가 아닐까 싶다. 넷플릭스 스트리밍서비스를 극장개봉과 동시에 했기 때문이다. 노트북으로 봤느냐, 영화관의 큰 화면과 좋은 음향으로 감상했는가에 따라 영화의 몰입도, 영상과 음악이 주는 울림이 다르다. 필자도 처음 넷플릭스 서비스로 봤을 때 앞부분은 지루하고 뒷부분은 뻔했다. 초입에 나왔던 자와 미자의 관계를 그린 아름다운 장면조차 그랬다. 그러나 영화관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의 장면에 빠져들 수 있었고 자연의 일부분이자 독립적 판단과 의지의 주체인 옥자와 친구 미자가 보였다.
진화하는 기업, 네이탐판에서 유전자조작 대량 식육생산까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사회비판적이다. <플란다스의 개>는 교수사회의 부조리와 시간강사의 비루함,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코믹하게 다뤘고, <괴물>은 미국 제국주의에 편입된 국가 폭력과 투쟁을, <설국열차>는 출구 없는 미래사회의 처절한 계급 현실을 담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높게 평가하는 영화 <마더>에는 ‘가족’의 폭력과 폭력의 은폐, 가해와 피해가 얽혀 구분하기 어려운 인간의 이기심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그의 영화는 질문의 여운을 남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들은 곱씹는다. 부조리사회를 완성시키는 개인들의 거짓말과 타협에 대해, 괴물을 만들어낸 사회에 대해, 착취의 순환을 끊는 멈춤에 대해,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영화 <옥자>는 초국적 기업의 탐욕과 기만이 낳은 동물학대와 그에 맞서 싸우는 미자의 투쟁기다. 초국적 식품기업인 미란도 코퍼레이션은 육고기의 대량생산을 위해 유전자조작으로 ‘슈퍼 돼지’를 만들고 이미지를 포장하고자 여러 지역에서 10년 동안 키운다. 옥자는 한국의 시골에서 키워진 슈퍼돼지로, 산골소녀인 미자와 자매처럼 키워진다. 기업은 옥자를 슈퍼 돼지 1등으로 선정한 후 미자의 동의 없이 미국에 데려가고, 미자는 옥자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추격전을 벌인다. 친환경과 생명은 수사이므로 미란도 코퍼레이선의 계산에는 미자와 옥자의 친밀한 관계가 포함되지 않는다. 옥자를 데려가는 건 애초의 계약을 이행하는 것일 뿐. 그러나 옥자에겐 ‘타고난 팔자’를 바꿀 친구 미자가 있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고기를 못 먹겠다고 했다. 주변에는 채식주의로 선회한 사람도 있고, 고기를 좋아해서 영화를 안 보겠다고 선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돼지의 도살과 육가공 현장, 동물이 분해돼 식품이 되는 장면 덕에 고기를 못 먹게 된다고들 했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산업화된 축산업의 잔인함과 그를 뒷받침하는 저임금 이주노동의 문제, 비위생적 식품가공과 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에는 <패스트푸드 네이션>(2006,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라는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패스트푸드 네이션>이 묘사한 잔인함과 착취에도 햄버거를 먹을 수 있었던 건 동물(소)의 죽음에 감정을 이입(교감)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옥자와 미자의 관계를 알아버린 관객들은 동물의 주검(고기)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멜라이 조이가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2011, 모멘토)에서 썼듯, 동물의 몰개성화, 추상화 속에서 우리는 사육된 동물은 ‘독립적 개체’로 보지 않는 데 익숙하다. <육식의 성정치>(2006, 미토)의 캐럴 J. 아담스의 말대로, ‘부위별로 절단(해체)난 동물’이 생명체였다는 사실을 각종 장치로 지워 ‘고기’로 소비한다. 자본주의 대규모 식육생산시스템은 이를 완성시킨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 미자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끓이는 닭백숙이 나오는 장면은 이를 짐작케 한다. 여기에서 질문이 생긴다. 왜 옥자(돼지)는 안 먹으면서 닭은 먹지? 미자는 돼지(옥자)와 교감했으나 닭과는 그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어쩌면 동물과 인간의 차이, ‘종’차를 근거로 한 폭력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만들어진 타자화의 절정이 동물착취 아닌가. 소통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동물해방전선(ALF)의 케이가 저지른 가짜 통역에도 나온다. 케이는 자신의 기술을 사용하고 싶어서 미자가 옥자를 ALF의 동물학대 폭로계획에 동의했다고 동료들에게 통역한다. 그 결과 옥자는 뉴욕의 실험실에 갇힌다.
블랙코미디가 던진 물음, 녹색과 적색의 만남 VS 비싼 거래
<옥자>의 넷플릭스 상영이 미국에서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넷플릭스 가입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햄버거의 나라 미국은 산업화된 식육생산시스템이 절정인 나라가 아닌가. 동양인 소녀의 액션에 어울리지 않는 이국적 음악, 과장된 연기를 하는 백인배우들은 사악하나 우스꽝스럽다. 사람에 대한 폭력을 사절한다는 ALF에서, 리더는 거짓말을 한 케이를 무자비하게 발로 찬다. 이 모든 블랙코미디의 요소는 우리에게 웃음과 씁쓸함을 선사한다.
특히 끝부분에 살아있는 옥자와 금돼지의 거래는 압권이다. 옥자를 죽음의 고비에 이르게 한 ‘금’(돈)으로 옥자를 살리는 설정은 역설적일 뿐 아니라 동물권운동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낸시 미란도가 미자를 ‘첫 구매자’라고 지칭했듯이, 자본주의 식량생산시스템의 동물 착취에 근본적으로 맞서기보다 자본은 그대로 둔 ‘비싼 거래’를 통해 일부 동물만을 살리고 있는 건 아니냐고. 그럼에도 그의 비판은 차갑지도 닫혀있지도 않다. 따듯한 시선으로 비밀스럽게 잡은 옥자와 미자의 대화 장면이 그렇다. 거기서 우리가 읽은 게 희망의 비밀인지, 현실안주의 평온함일지는 각자의 몫이다.[워커스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