뎡야핑(팔레스타인평화연대)
팔레스타인에 가는 활동가들은 항상 선물 전달을 부탁받는다. 자주 갈 수는 없고 택배도 이스라엘에서 걸려 못 받아볼 수 있으니 가는 사람 통해서 뭐라도 보내고자 하는 것이다. 와엘을 처음 만난 것도 다른 활동가 친구에게 부탁 받은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팔레스타인에 두 번째 갔을 때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도시 ‘나블루스’에서 활동하는 그는 ‘나블루스에 왔으니 크나파를 먹어야지!’라며 크나파 집으로 날 데려갔다. 크나파는 설탕에 절인 치즈 패스트리 디저트로 중동 지역에서도 나블루스 크나파는 유명하다. 크나파를 먹으며 대화하던 중 우리는 우리가 왜 이제야 처음 만나는 걸까 의아해졌다. 첫 번째 방문 때 나는 국제 활동가의 팔레스타인 현지 활동을 조직해 주는 ISM이란 단체를 통해 활동했는데 그때 내 주요 활동지역이 나블루스였다. 그런데 와엘은 당시 그 ISM의 나블루스 코디네이터이기도 했다. 날짜를 따져보던 그는 곧 내가 왔던 시기에 자신이 감옥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잠깐의 선물 전달을 위한 만남이었고, 그때 내 활동계획은 나블루스 중심이 아니었는데도 나블루스에서 그가 계획하는 여러 활동에 초대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블루스 체류 기간이 길어졌었다.
와엘은 그 후에도 항상 내 계획을 물어보고,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찾아보고 제안했다. 종종 전화로 안부를 묻고, 집회 일정을 알려줬다. 대중교통이 운행을 중단하는 금요일에는 인근 마을 집회에 같이 가기 위해 미니버스를 대절해 좌석수보다 많은 사람을 겹겹이 태워 가곤 했다. 한번은 이스라엘군에 습격당할 위험이 있는 난민촌의 한 집에서 야간 경계를 서줄 것을 요청했다. 국제 활동가의 안전을 우려한 집안 가족들의 요청으로 새벽까지 경계를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가긴 했지만. 그는 국제 활동가들이 폭력적인 상황만 경험해선 안 된다고, 팔레스타인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며 각종 문화 행사에도 초대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 역시 자연스럽게 나블루스를 활동지역에 넣게 됐다.
▲ 사고로 불에 탄 난민촌의 집 벽 그을음을 제거 중인 와엘. 반점령 운동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다양한 문제에도 개입하는 와엘은 지역 주민들로부터도 신망이 높다. [출처: 탄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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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최근 팔레스타인을 다시 방문하며 나는 와엘과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렸다. 와엘이 출소한 뒤 처음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페이스북을 통해 와엘이 ‘행정구금’된 상태임을 알게 됐다. 일상적으로 연락하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최근 타임라인에서 도통 볼 수 없다고 인식했을 즈음이었다. 와엘의 친구들이 그를 태깅한 글을 통해 그가 다른 행정구금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죄명으로 이스라엘에 구금돼 어디에 어떤 상태로 있는지 알 수 없단 걸 알게 됐다. 그 뒤 6개월 가까이 그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감옥은 이전에도 많이 갔다고 들었지만 막상 소식을 알 수 없으니 무서웠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많은 활동가들이 세계 전역에서 그의 소식을 기다리며 그와 함께 한 추억들을 공유했다. 어느 날 그가 드디어 재판을 받아 1년여의 실형을 살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를 비롯해 전 세계 활동가들이 기뻐하며 안도했다. 드디어, 와엘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던 날들이 끝났다고. 재판을 받고 실형을 더 살게 된 게 기뻐할 일일 정도로, 통계로만 알던 행정구금이 정말로 어떤 건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희망들
다시 만난 와엘은 조금 여위었지만 여전히 활동적이고 바빴다. 와엘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이 각 지역에서 각개전투 하는 수준이라며 해방 운동의 새 청사진이 필요하다고, 다른 지역 활동가들과 더불어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나아가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해방 운동에 연대하는 국제 운동이 긴밀히 연결돼 집중적으로 이스라엘의 점령과 식민화를 끝장낼 수 있도록 힘을 모으기 위해 논의 단위를 만들고 있다며 참여를 제안해 왔다. 언제나와 같이 열정적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활동을 제안하면서도 와엘은 피로와 고독감을 숨기지 못했다. 와엘이 감옥에 가게 된 건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의 밀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활동가들이 기획해서 단행한 직접행동으로 인해 많은 활동가들이 이스라엘군에 끌려 갔는데, 고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몇 활동가들이 주모자로 와엘을 지목했다. 대대적인 활동가 검거로 나블루스 일대가 쑥대밭이 되자 운동이 위축됐다. 와엘과 몇몇 활동가들이 수감돼 있는 동안 나블루스의 해방 운동은 숨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와엘만이 아니라 와엘의 가족들까지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벳에 의해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다.
동료들의 배신을 얘기하는 와엘은 전에 없이 어두웠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들과 같은 국제 활동가들이 있어서 고립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며, 오직 국제 활동가들의 연대 활동에서만 희망을 본다고 말했다. 나는 팔레스타인 내부 로부터 해방 운동이 더 중요하지 않냐는 너무 당연한 말을 하면서 새로운 세대가 운동에 계속 참여하는 걸 보며 희망을 얻는다고, 와엘이 속한 문화운동 단체 ‘탄위르’의 셰밥(10대, 20대 청년들)을 보며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본다고 대답했다. 내가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항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전에 알던 청년 활동가가 생계 혹은 여타 다른 사정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와엘이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덕에 여러 청년들이 와엘과 함께 운동하겠다며 찾아오고 있다. 와엘 역시 맞다고, 셰밥이 없다면 자신이 어떻게 계속 활동할 수 있겠냐고 대답했다.
와엘에게 청년 활동가 U와 어떻게 같이 활동하게 됐냐고 물어봤다. 몇 년 전 각종 집회에서 와엘을 봤던 U는 같이 활동 하고 싶다며 와엘을 찾아왔다. 십대 중반의 U가 참여하기에는 집회가 너무 위험해서, 와엘은 처음에는 거부했다. 하지만 이후 집회에 혼자 나오는 U를 보며 자신이 같이 활동하지 않겠다고 해도 어차피 혼자 계속 나올텐데, 차라리 같이 활동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U의 용기에 감동받기도 했다. U에게 집회 등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지시를 따를 것을 요청했고, 그래서 지금껏 같이 활동하게 됐다. 다른 청년들도 비슷한 경로로 함께 활동하게 됐다고 한다. 탄위르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도 있다. 학교와 가정에서 방임되고 정규 직업을 찾기 어려운 청소년들은 도둑질이나 마약 등으로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에게 단체가 일종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도 매일 청소년들이 탄위르 사무실에 온다. 손을 보탤 일이 있으면 함께 하고, 없으면 자기들끼리 논다.
연대를 기다리며
가을이 되면 팔레스타인 전역에 올리브 수확 캠페인이 전개된다. 불법 유대인 정착촌 인근의 밭에서 올리브를 수확할 때 유대인 정착민들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국제 활동가들이 함께 수확하는 것이다. 일종의 농활이다. 국제 활동가들이 있다고 공격을 안 하지는 않지만 빈도가 현저히 준다. 안하무인 정착민들도 어쨌든 외부의 눈을 의식하기는 하는 것이다. 폭력 상황이 발생하면 기록자로 역할할 수도 있다. 이번 여름에 왔으니 가을에 또 오기는 힘든데도 와엘은 올가을부터 적극적으로 올리브 수확 캠페인을 할 거라며 가을에 또 오라고 했다. 못 온다니까 한국에서 관심 있을 사람들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너무 멀고, 비행기 등 비용도 많이 들고, 너무 당장이라서 안 될 거라고 약속할 수 없다고 대답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올 만한 데가 어디 있을까 생각해봤다. 사실 올리브는 2년 주기로 풍작과 흉작을 반복하는데, 짝수 해가 풍년이고, 그래서 올해보다는 내년에 조직해서 오는 게 나을 것 같다. 이 얘길 했더니 와엘이 어떻게 알았냐고 가벼운 비밀을 들킨 것처럼 멋쩍게 웃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다 이젠 잡혀가지 말라며 억지를 부리는 내게 와엘은 그건 투쟁을 하지 말라는 말이나 같다며 그런 약속은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만 순교자가 되지 않을 거란 것만은 약속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그와 동료들이 무사무탈하기를.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와엘을 만나러 가고 싶다.[워커스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