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순
“아가씨, 이거, 아가씨 엄마 제사에요.”
실수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수습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참에 더 치고 나가야 했다.
“그렇게 오기 힘들면, 이번 제사 때 아가씨가 오빠랑 의논하세요. 자리 비워 드릴게요.”
삼년 전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시부모님 제사를 어머님 기일에 맞춰 함께 모셨다. 생전의 아버님은 제사상에 문어 한 마리는 꼭 올려달라고 당부하실 만큼 문어를 좋아하셨다. 그 문어 한 마리 사왔으면 좋겠다고, 문어가 겁나게 뛰노는 부산에 사는, 자갈치 시장이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는 큰 시누에게 문자를 보낸 터였다. 이에 시누는 장문의 메시지로 화답했는데, 내용인즉슨 이랬다.
=내가 요즘 얼마나 바쁜지 아냐.
=정말 못 갈 상황인데 겨우겨우 간다.
=근데 나더러 문어까지 사오라고?
=그렇게는 못 해.
그래? 그렇다면, 팩트를 말해주마.
‘야, 이거 너네 엄마 아빠 제사야.’
거실에 둘러앉은 시댁 식구들 앞에 섰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자리 비워드리겠습니다. ‘가족’끼리 앞으로 제사를 어떻게 하실지 의논하세요.
아가씨들이 원하지 않는 제사라면 저도 고집할 생각 없습니다.”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작은 아가씨가 쫓아 나왔다.
“언니,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전 불편할 거 없어요. 이제 아가씨들이랑 오빠 몫이니까요.”
현관문을 쾅, 닫았다.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한 덩어리로 뭉쳐 있어 엉킨 줄도 몰랐던 실타래였다. 잠자코 앉아 그 실을 풀어내자니 머리가 지끈 거렸다. 반짇고리에서 가위를 꺼냈다. 그리곤 그 실타래 어디쯤에 ‘싹둑’ 가위질을 했다. 여전히 실타래는 뭉텅이진 채였지만 실마리 하나가 삐죽하니 나와 있었다. 이토록 애매하기 짝이 없는 결합 상태를 절단하는데 15년이 걸렸다.
시댁에서 보낸 첫 명절을 잊지 못한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경상도 사투리는 힘들지 않았다. 추석에 송편을 빚지(먹지) 않는 가풍도 문제될 건 없었다. 피아노 쳐봐라, 이야기해 달라, 반가움에 달려드는 조카들도 참을만했다.
그러나 모두가 잠든 밤, 엄습해 오던 낯선 시계 초침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수구가 물을 빨아들이는 기척에 몸을 돌아 누었다. 시어른의 잔기침과 불규칙한 냉장고 소음이, 여기는 다른 무대라고 말해주었다. 장롱을 열 때 마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나프탈렌 냄새는 내게 다른 배역이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울었다. 딱히 누가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낯선 무대 탓이었다.
실타래는 내가, 끊어야 했다
친정은 서울, 시댁은 부산, 사는 곳은 남원이니 명절마다 골치가 아팠다. 첫 해엔 부산과 서울을 왕복하기도 했다. 몸살이 났다. 이건 아니다 싶어 설엔 시댁에, 추석엔 친정에 가기로 남편과 합의를 했다.
그 해 추석, 친정 엄마는 나를 부엌으로 몰래 불러 “얘, 이제 그만 가라. 엄마 윤서방 보기 힘들다”고 속삭였고, 시어머님은 “거 봐라.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 거다”라고 훈계하셨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둘째가 5개월이 안됐을 때였다. 시아버님을 집으로 모시고 와 제사 준비를 했다. 젖을 물린 채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다 잠에서 깬 애를 다시 어르고 그렇게 새벽을 맞았다. 제기를 닦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남편의 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내 집인 줄 알았던 그 집은 내 집이 아니었다. 여전히 낯선 무대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삼년이 지났다. 완치 판정을 받았던 아버님의 암이 재발했다.
“아버님 모셔 와요.”
그 수많은 밤, 내 집인 줄 알았던 남의 집에 배반당했으면서도 나는 저런 말을 뱉어놓았다. 아직도 여기가 내 집인 줄 알고, 내 무대인 줄 알고, 무슨 역할이든 맡으려고만 했다. 좋은 아내, 좋은 새언니, 좋은 며느리, 좋은 엄마 노릇을 하느라 원래 내 배역이 뭔지 조차 잊어버렸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빈틈을 메꿔주는, 그래서 결국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리고야 마는 무명의 단역 배우, 그게 나였다.
진짜 단역배우와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내 경우는 경쟁 상대가 없는 종신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걸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삼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러니 실타래는 내가, 끊어야 했다.
제사를 지내지 않은 지 일 년이 됐다.
남편은 추모식을 원한다. 나는 말한다. 그 추모식은 당신과 당신 형제들의 것이라고. 내가 단역으로 출연한 그 연극은, 이제 막을 내렸다고. 나는 다른 연극의 막을 올릴 것이다. 그 연극에서 나는 주연을 맡을 참이다.
주연의 이름은 비로소, 정상순이다.[워커스 3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