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숙(인권활동가)
우리는 인천에 있는 아암도와 연안부두에 갔다. 바다와 하늘을 촬영하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아암도는 인천시가 만든 둘레10길에 있는 명소다. 간만에 미세먼지 없는 날이라 상쾌할 것 같았지만 바닷바람이 세찼다. 아암도로 가는 마음에도 찬바람이 스몄다. 이곳에서 1995년 11월 25일 장애인노점상 이덕인 씨가 의문사를 당했다.
이번 인권기행의 길잡이는 과거 노점상운동을 했고 현재는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밥으로 연대하는 ‘밥묵차’의 유희 씨와 장애해방열사 추모 활동을 주로 하는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김종환 씨다. 수인선의 숭의역에서 그들과 만나 여정을 시작했다.
차로 15분을 가니 아암도가 나왔다. 2000년에 조성된 아암도 해안공원은 이미 공사로 해체된 상태여서 공사차량만 보였다. 사람이 많지 않은 해안공원이라 우범지대가 되고 있어 공원을 없애고 도로 확장 공사를 한다고 했다. 아암도해안공원은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도록 아암도 부근 해안가 1.2km를 벤치와 꽃나무로 조성한 곳이었다.
아암도는 홍보문구처럼, 소나무가 우거진 정말 작은 섬이다. 서울 한강에 있는 밤섬 정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훨씬 작았다. 송도신도시 조성을 위해 바다를 매립해서 도로를 만들다 보니 아암도는 ‘섬’이 아니라 아암대로에 있는 ‘작은 동산’이 돼버렸다. 1980년대에는 바닷물이 빠지면 섬까지 걸어서 갈 수 있도록 ‘바다 속 보도’를 만들어 썰물과 밀물의 차이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운치 있는 섬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썰물 때라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그저 바람소리만 윙윙 뺨을 때리며 소리를 냈다. 검은 갯벌이 펼쳐져 있고 건너편에는 으리으리한 고층 건물이 보였다. 고층건물을 막듯이 다리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통하는 인천대교다. 이곳은 밀물이 밀려오는 저녁 무렵 낙조와 함께 인천대교 사진을 찍는 촬영지이기도 했다. 처절하게 떠나간 장애인노점상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출사 지점으로 변해있었다.
갯벌바닥처럼 드러난 국가폭력
공사현장을 따라 아암도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유희 씨는 덕인이가 가고 이렇게 해안공원이 들어섰다며, 이곳을 지날 때면 공원 벤치에 앉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눈물을 머금더니 우리를 1995년으로 이끌어갔다. 함께 있던 김종환 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여기가 원래 군사보호지역인가 그랬어요. 초소에서 간첩이 들어오나 보는 곳이었나 봐요. 철조망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가 그 당시에 철조망을 허물고 해안공원으로 개발한다고 해서 우리가 (노점 하러) 들어갔어요. 최정환 열사가 서초구청에서 분신을 하고 돌아가신 후 장애인들과 노점상이 함께 장애인도 노점해서 먹고 살자고 5월경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를 만들었거든요. 첫 사업으로 7월쯤 청계천8가에 있는 벼룩시장에 장애인과 비장애인 한 명씩 한 팀이 되어 노점을 차렸고 여기에는 10월말 쯤 들어왔어요.”
1995년 3월 초 최정환 열사 분신 이후, 노점상을 비롯한 빈민투쟁이 대규모로 일어났다. 김영삼 정권의 개혁정책에 빈민들은 없었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게 노점 단속과 복지정책이었다. 장애인과 노점상들은 빈곤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노점을 결심했다. 그 흐름을 따라 인천에서도 아암도 해안가에 장애인과 노점상들이 포장마차 20동을 차렸다. 유희 씨는 계획대로 됐다면 얼마나 낭만적이었겠냐고 했다.
“노점을 굉장히 깔끔하게 하려고 했지. 천막을 치고 횟집에서 사용하는 어항을 해가지고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바다를 보면서 먹게끔. 굉장히 운치가 있지. 도로에서 먹고 아암도 위에 올라가서도 먹고. 계산대로 하면 너무 멋진 풍류의 거리가 됐을 텐데, 시에서 이걸 그냥 놔두겠어. 불안하니까 회도 비싼 건 갖다 놓지 못했지.”
인천시는 수시로 철거 협박을 했다. 결국 노점상들은 망루를 만들어 싸우기로 했다. 11월 24일 포크레인과 전경버스, 철거 용역깡패들이 탄 관광버스가 연수구 일대를 배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애인과 노점상 30여 명은 즉시 골리앗이라 불리던 망루에 올라갔다. 망루는 10m 높이였다. 그러나 인천시와 연수구청이 동원한 경찰병력 1천4백 명, 철거 용역반 4백여 명, 구청직원 3백여 명이라는 물리력에 5시간 만에 속절없이 포장마차는 철거됐다. 농성자들은 준비한 인분도 던지고 음식도 던지면서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소방차를 동원한 물대포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오후 4시쯤 철거 용역깡패는 잠시 철거를 멈췄다. 그리곤 탈출을 막으려는 듯 원형 철조망을 망루 주변에 설치했다.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해 며칠간 밥도 물도 소진됐다. 다른 노점상들이 몰래 밤에 음식을 망루로 전달했다. 노점상들이 망루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급히 온 유희 씨도 여기에 함께했다.
“와보니까 음식도 안 올려주고 죽이려고 했더라고, 진짜. 사람들 잠들었을 때 몰래몰래 밥을 올려주고 그랬지. 밤에 수로를 지나서 음식 보급 투쟁을 했어.”
그렇게 망루농성을 하던 3일째인 11월 28일 바다 위로 사람 하나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시신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며칠째 얼굴이 보이지 않던 이덕인이었다. 한을 품은 듯 눈을 뜬 상태였다. 농성자들은 급히 경찰에 알리고 노점상들에게도 연락했다.
군홧발에 밟힌 병원에서의 시신탈취
도저히 자연사로 여겨지지 않았다. 가까운 세광병원으로 사람들은 갔으나 경찰이 눈을 번득이고 있어 불안했다. 영안실이 좁아 언제든 시신을 뺏길 수 있겠다 싶어 인천 중앙 길병원으로 옮겼다. 29일 새벽 시신탈취를 대비해 70여 명의 연대자들이 영안실을 막았지만 전투경찰 2000여 명의 물리력은 당해낼 수 없었다. 김종환 씨는 그때 영안실에 다른 유족들도 있었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쳐 짓밟고 폭력을 행사했다고 했다.
“영안실 지하로 내려가는 램프와 램프 사이 평지 왼쪽에 진짜 시신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가로막고 있으니까 경찰들이 그 다음 램프에서 벽을 뚫고 들어온 거야. 해머로 쳐서 요만한 개구멍을 내서. 처음에 경찰 초짜를 구멍으로 들여보낸 거야. 우리는 들어오지 말라고 경찰을 때렸지. 피가 나니까 우리도 더는 못 패. 경찰이 다쳤는데도 계속 밀어. 그러다 보니 뚫린 거지. 그 구멍으로 경찰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한 거야. 들어오자마자 경찰이 한 학생의 머리를 발로 확 차니까 피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학생은 쓰러졌지. 나중에 그 학생 실명됐다고 들었어요. 영안실에 우리와 상관없는 다른 유족들도 많았는데 군홧발로 다른 분향소까지 짓밟으면서 다니는 거야. 무서워서 영안실에 있던 유족들이 오줌을 쌀 정도였어요.”
문민정부라고 했지만 노태우정권 때 있었던 박창수 열사 시신탈취와 다름없었다. 유희 씨는 경찰의 시신탈취장면을 언론사에 보내려고 일회용 카메라로 찍었다. 다른 회원을 통해 밖으로 내보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사진은 단합대회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결국 시신탈취의 폭력은 기억으로만 남게 됐다. 그리고 경찰은 연행된 이덕인 씨의 형을 죄인처럼 끌고 가 부검 동의와 입회를 강요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강제부검을 했다. 재부검을 막으려는 듯 난도질을 해 버렸다. 부검이 끝난 바로 다음 날 몸에서 플랑크톤이 많이 발견된 익사라고 발표했다. 김종환 씨와 유희 씨는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 친구 고향이 전남 신안 바닷가에요. 수영을 잘 하는데 줄에 묶여서 죽었다는 게 말이 안 돼요.” “인의협 의사들 말로는 바다에서 바위에 살갗이 부딪쳐서 생긴 멍과 맞아서 생긴 멍의 두께는 다르대요. 맞아서 죽고 떨어지고 밀물에 쓸려서 발견된 거지. 줄도 일반인이 묶는 그런 포박 매듭이 아니야. 걔네들 말에 신빙성이 없어.”
빈곤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도 만들었다. 이덕인 열사의 정확한 사인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다음 해 봄까지 싸움을 이어갔지만 익사로 판정한 검찰을 비롯한 정부는 입장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부모의 한을 품은 연안부두
우리는 싸늘한 아암도 앞바다를 뒤로하고 이덕인 열사의 부모님을 만나러 연안부두로 갔다. 부모님은 연안부두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계신다. 2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덕인 열사의 명예회복을 위해 서울로 뛰어다니신다.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어머님은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제라도 아들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겠냐고 했다. 최근 청와대에서 유가협 가족들을 초청한 자리에 참석해 아들의 사연을 김정숙 여사에게 말했는데 소식이 없다고 했다.
독재정권 시절 의문의 죽임을 당한 사람이 너무 많아 민주정부가 들어선 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보수정권으로 바뀌면서 의문사니 과거사니 하는 역사적 과제들은 중단됐다. 그렇다보니 문재인정부에 거는 유족들과 피해자들의 기대는 크다.
이덕인 열사의 경우는 정권교체로 진실이 뒤집힌 대표 사례다. 2002년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대규모의 공권력 동원과 통제로 헌법상의 생명권을 위협하고, 신체의 자유, 행복추구권을 과도하게 침해하여, 공익에 비해 침해되는 사익이 현저히 큰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였으며, 국민기본권의 확립을 위해 항거하는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렀으므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경찰이 어떻게 죽였는지까지는 밝히지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9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는 이덕인 열사의 죽음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방정부의 노점상 단속행위는 적법한 행정행위이므로 민주화운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덕인 열사의 어머님은 “세월이 가면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세월이 갈수록 우리 아들 말만 하면 눈물이 쏟아져. 재부검도 못 하게 갈가리 찢어놓고는 내 자식을 지그가 죽였다고 인정을 안 해”하며 왈칵 눈물을 쏟았다. 언제나 경찰에 맞서 앞장서 싸웠던 어머님의 위풍은 아들 생각에 약해지셨다. 아버님은 손수 정리한 당시 사진들과 직접 쓴 진정서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다시 대통령과 정부에 호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두 분은 추모제를 잊지 않고 여는 김종환 씨와 1995년 당시 6개월 간 부모님 옆을 지켰던 유희 씨에게 고맙다며 연신 먹을 것을 내오셨다. 인심이 후하기로 유명한 횟집이 된 것은 아들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바다만큼 깊은 부모의 한이 서린 연안부두를 뒤로 하고 세월호 참사 합동분향소 희생자 영결식이 있는 안산으로 향했다.[워커스 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