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전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화장실에서 어느 여성이 살해당했다. 아니, 어느 남성이 어느 여성을 살해했다. 범인은 화장실에 숨어 때를 기다렸다.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내고, 일곱 번째로 들어온 여성을 살해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여성들로부터 무시 당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묻지마 살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관심이 대두됐다.
왜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내고 마지막에 들어온 여성을 겨냥했을까? 남성에게는 무시를 받은 적이 없어서였을까. 그가 실제로 무시를 당했는지 어쨌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유독 여성에게 당하는 무시를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하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여성은 감히 남성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여성혐오를 정의하는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여성을 공적 공간에서의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여기지 않는 태도 ― 기껏해야 성적 대상으로, (무료) 노동력 정도로 여기는 태도 ― 라고 말이다. 동등한 주체가 아닌 이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종종 참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동등한 주체가 아닌 이를 공격하는 것은 종종 아무 문제도 아닌 일이 된다. 여성혐오 범죄는 그런 식으로 일어나고 그런 식으로 정당화된다.
이것은 어떤 ‘패닉’이다. 여성의 지위는 여전히 낮지만, 가끔씩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거나 혹은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남성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아니던 존재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때로 자신이 갖는 것 이상의 권리를 갖는 듯하니 말이다. 반복해서 일어나는 여성혐오 범죄는 아마도 이런 패닉에 대한 일종의 ‘방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5월 17일은 국제 성소수자혐오 반대의 날1)이기도 하다. 이 두 개의 날이 겹친 것을 보며 ‘패닉 방어’라는 말을 떠올린다. 정확히는 ‘트랜스젠더 패닉 방어 논리’라 불리는 이것은, 트랜스젠더를 살해하거나 폭행한 범인이 ‘상대방이 트랜스젠더인 것을 알고 당황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며 스스로를 옹호하는 논리를 가리킨다. 예컨대 트랜스젠더를 살해하고는 놀라서 저지른 우발적인 범행이니 고의적인 살인이 아니라 과실치사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상대방이 트랜스젠더인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놀라움’에 대한 반사작용으로서의 폭력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 바꾸어 쓰면 이런 문장이 될 것이다. 사람이 트랜스젠더인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그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제거해야 마땅하다는 것. 이런 전제들이 통용되는 이 사회에서, 패닉 방어 논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혐오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면서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된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의 성원으로 ― 예컨대 남성을 평가하는 주체로 ― 등장하는 것을 당황스러운 일로 여기는 것, 그리고 그것을 혐오와 범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삼는 것과 닮아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법적으로는 트랜스젠더나 여성이나 모두 인간이므로 그에 대한 폭행이나 살인은 범죄로 취급되고 얼마간의 처벌도 받지만, 혐오를 정당화하는 이런 논리 앞에서 그 처벌은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미약한 것에 머물고 만다.
패닉을 놀람, 놀람으로 인한 당황 같은 말로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는 없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놀라움에는 언제나 무의식적인 전제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도시의 길에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고 놀라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도시 한 가운데에 있을 리가 없는 것, 예컨대 호랑이가 지나가고 있다고 한다면 놀라지 않기는 힘들 것이다.
놀라움의 뒤에는 언제나 있음직한 일과 없음 직한 일에 대한 구분이 숨어 있다. 남자인 내가 트랜스젠더 여성(성별이분법과 이성애의 보편성을 굳건히 믿는 그들에게는 결국, 남성)에게 끌릴 리가 없다는 믿음이, 남자인 내가 여자보다 못할 리가 없다는 믿음이, 그들의 패닉 뒤에는 숨어 있다. 누군가를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믿음이, 그들의 패닉 뒤에는 숨어 있다.
그렇다면 패닉 방어 논리는 기껏해야 길에서 갑자기 호랑이를 만나 놀란 사람이 소리를 질렀을 때나 들 수 있는 논리다. 놀라움의 전제, 패닉한 이가 갖고 있는 전제가 정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그 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결코 될 수 없다. 놀라기 전에, 그리고 누군가의 놀람에 섣불리 공감하기 전에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그 믿음이 과연 정당한지 ― 그러니까 그 믿음을 갖고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겠는지 말이다.(워커스43호)
각주
1) 1990년 세계보건기구가 질병분류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국제 동성애혐오 반대의 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IDAHO)로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트랜스젠더혐오(Transphobia), 양성애혐오(Biphobia) 등을 명시하는 IDAHOT, IDAHOTB/IDAHOBiT 등의 명칭이 주로 사용된다. 마지막의 I를 대문자로 쓰는 IDAHOBIT은 간성차별(Intersexism)에 대한 반대를 명시한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