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교착상태는 트럼프 행정부의 도를 넘은 약속 위반이 본질적 원인이다. 6.12 북미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비핵화라는 큰 틀의 목표에 합의했으나 이후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예정된 방북 일정을 취소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미국은 종전선언조차 거부했으며 오히려 대북제재를 계속하고 있다. 종전선언은 전쟁 종식과 함께 상호 군사적 적대행위가 없을 것임을 선언하는 정치적 행위다. 미국 입장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당장 행동적 상응조치를 제공할 수 없기에 종전선언이라는 정치적 약속을 하는 것이다. 향후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북·미 양측 모두 쉽게 판을 깨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비핵화 조치는 단계적으로 밟아간다고 하더라도 되돌리기 힘들지만, 미국이 이에 반대급부로 제공할 체제안전 보장 조치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불안과 의구심을 줄이기 위해 종전선언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종전선언은 북·미 양측이 만족할 만한 성과와 수준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다. 하지만 6.12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인 합의라는 인식에 동의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미 국내정치가 걸림돌이라면 트럼프 행정부가 스스로 돌파해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는 북미관계 개선을 자화자찬하다가 국내 정치의 덫에 걸려 자승자박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지속적인 대북제재는 북미 정상간 합의를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에 제공되는 정제유 규모가 이미 상한선을 넘어섰다고 압박했으며, 중국과 러시아가 계속 대북제재를 위반할 시 조치를 취하겠다면서 16개 태평양 도서 국가들과 대북제재 이행 방안으로 선박등록 역량강화를 지원하는 등 대북제재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의 2차 북미 정상회담 요청에 대해 백악관이 긍정적 입장을 밝히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한반도 비핵화가 트럼프 임기 내 가능할까
2차 정상회담 추진은 지난 9월 5일 문재인 정부의 대북특사 파견이 주효했다는 분석도 있다. 김정은이 정의용 특사단을 면담한 자리에서 6.12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신뢰 구축과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미국의 비핵화 시간표를 받을 테니 종전선언부터 평화협정까지 이어지는 체제 보장 시간표를 제시해 달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정의용 대북 특사단이 종전선언과 핵 신고를 동시에 실행하는 맞교환 방안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북미 양측의 입장차를 좁힐 수 있는 동시 이행을 제안했을 것이다. 이 가능성이 사실이라면 사전에 미국과 북한이 핵시설, 핵물질, 탄도미사일 현황에 대해 신고할 용의만 밝혀도 종전선언을 해주는 방안을 충분히 협의했다는 의미가 된다.
김정은이 언급한 시간표는 트럼프의 임기시한인 2020년을 의미한다. 트럼프의 임기가 종료되는 2021년 1월 이전에 북한 비핵화를 완료하면서 동시에 북미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그가 희망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렇게 시한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되면 향후 북한 비핵화와 대북 보상에 대한 협상이 본격화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문제는 비핵화의 범위와 내용에 따라 그 시한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지난 9월 6일자 북한 로동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이 남한 특사단을 만나 “조선반도에서 무력충돌위험과 전쟁의 공포를 완전히 들어내고 이 땅을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입장이며 자신의 의지라고 비핵화 의지를 거듭 확약”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김정은이 생각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기본적으로 핵무기와 핵위협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핵무기 운반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제거까지도 포함되는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약 한·미가 북한의 ICBM과 핵탄두의 해외 반출을 넘어서서 북한 핵시설의 완전한 해체와 은닉 시설의 존재 여부에 대한 철저한 검증까지를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로 설정한다면, 이 수준은 트럼프의 현 임기 내에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북한의 영변 핵 단지에만 390개 이상의 건물이 존재하고,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은 많게는 50개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같은 북한의 핵능력을 고려하면, 2021년 1월까지 모든 핵시설과 핵탄두, 핵물질 등을 폐기하고 혹시 은닉 중인 시설이 없는지 완벽하게 검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핵무기 7개에 핵시설은 하나뿐이었는데도 검증에 3년 이상이 소요된 경험을 고려하면 북한의 비핵화를 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검증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반면 한·미가 북한의 핵무기와 핵위협의 제거, 원자로와 재처리시설의 ‘영구 불능화’, 우라늄농축시설의 해체를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로 설정한다면, 이러한 목표는 트럼프 대통령의 현 임기 내에도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차 북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선 충족돼야 할 변수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입장에서는 가시적 성과가 보장돼야 할 것이다. 미국의 약속위반으로 협상이 중단된 핵심 쟁점인 종전선언과 핵신고서 제출 문제에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여부는 2차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결정짓는 바로미터다. 만약 재방북이 이뤄진다면 북·미 간 쟁점인 종전선언과 핵신고서 제출 문제에서 양측이 어느 정도의 타협점을 찾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결단이 요구된다
트럼프가 직접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나서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북한도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을 잘 알지만 전쟁보다는 평화가 더 낫다는 판단 하에 대화에 나서고 있다. 트럼프의 진정성을 확인해 보기 위한 행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자신의 대북제재 때문에 북한이 대화에 나서고 있다는 판단 하에 대화에 집중하기 보다는 제재에 더욱 큰 힘을 쏟고 있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면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는 어린아이 다루는 듯한 회유책은 북한을 무시한 처사다. 미국이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한 종전선언조차 해주지 않는 상태에서 모든 핵무기, 핵시설, ICBM을 신고하라는 것은 기본적인 전술전략도 모르는 소치다. 만일 북한이 미국에게 체제 안전을 보장받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핵관련 시설을 신고한다면 미국은 최첨단 스텔스폭격기를 동원하여 일순간에 북한의 핵시설을 초토화시켜 버릴 것이다. 수차례 속아본 북한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미국이 만약 제재를 강화해서 북한이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는 정말 국제정치의 기본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지금은 오히려 시간이 미국이 아니라 북한편이다. 곧 11월 중간선거가 다가온다. 이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트럼프는 탄핵위기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북·미 협상에서 유권자들이 납득할 만한 성과를 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미 국내경제가 호전된 상황에서 트럼프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북한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북한을 적으로 돌리면 트럼프의 재임은 물 건너갈 것 이다. 그리고 북미관계는 다시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건 전적으로 미 제국주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공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와 선의에 대해 신뢰를 갖고 결단하기 바란다.[워커스 47호]
* 연합뉴스, 2018년 9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