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역사연구자)
21세기 힙합 음악의 최고 스타 중 한 명인 카니예 웨스트는 여러 모로 기이한 인물이다. 최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발언들로 동료들의 눈총을 받고 있는 그는 “노예제는 선택”이라는 발언, 인종주의적 이미지를 가진 남부연합기가 부착된 의상 착용 등 이미 여러 차례 미국 사회에서 논란을 일으켜 왔다. 다른 한편 급진적 흑인운동 조직인 블랙팬서당 출신 아버지를 둔 그는 텔레비전 생방송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입은 흑인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돌발 발언을 하는가 하면, 오랫동안 야신 베이, 탈립 콸리, 커먼, 루페 피아스코, 데드 프레즈 같은 의식 있는 래퍼들과 작업하며 그들의 급진적인 주장들을 빛내기도 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웨스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트럼프의 구호가 적힌 모자를 쓰고, 2016년 잇따른 경찰에 의한 흑인 사망 사건에 항의해 국가 연주 때 기립하기를 거부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미식축구 선수 콜린 캐퍼닉을 지지하는 문구가 적힌 상의를 입고 나왔다. 캐퍼닉은 웨스트가 자신에게 트럼프를 직접 만나 볼 것을 권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웨스트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별난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모순적인 행동들은 미국인과 흑인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해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모순적인 의식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캐퍼닉 역시 웨스트와 같은 고민을 마주해 스포츠라는 자신의 영역에서 결론을 표현한 인물이었는데, 캐퍼닉이 스포츠계에서 이런 문제로 고민한 첫 선수는 아니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들의 상대는 경기장 안에만 있지 않았다. 1908년 복서 잭 존슨은 백인 선수를 꺾고 최초의 흑인 헤비급 챔피언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10년 그가 백인의 희망을 담고 도전한 제임스 제프리스를 물리치자 미국 전역에서 백인들이 폭력사태를 일으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12년 그는 훗날 그의 부인이 될 백인 여성과 주 경계를 넘었다는 이유로 백인 배심원들에게 유죄를 선고받았고, 수년간의 국외 도피 후 귀국해 1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15년 소속 대학 미식축구부의 유일한 흑인 선수가 된 폴 로브슨은 두 차례나 전미 대학 올스타로 선발될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지만, 상대 팀 백인 선수들이 그와 경기하기를 거부하자 벤치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육상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따낸 제시 오언스는 나치 독일의 수도에서 백인 선수들과 같은 호텔을 이용했지만, 귀국 후에는 자신을 위한 축하 행사가 열리는 호텔에서조차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백인 사회가 원하는 흑인 선수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전설적인 헤비급 복서 조 루이스는 챔피언이 되기 위해 복싱 기술뿐 아니라 식사예절, 백인 여성과 단 둘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사항까지 익혀야 했다. 그는 1937년 미국 민주주의를 대표해 나치 독일의 막스 슈멜링을 2분 만에 쓰러뜨렸고, 전쟁이 터지자 육군에 입대해 세계를 돌며 시범 경기를 가졌다. 그는 백인 엘리트와 흑인 공산당원에게 모두 사랑받았지만 훗날 빈털터리가 돼 조롱받았다. 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가 된 재키 로빈슨에게 미국은 야구 실력 이외의 것도 요구했다. 매카시즘이 도래한 1949년 그는 하원비미국적활동위원회(HUAC)의 요청에 따라 당시 세계적인 가수 겸 배우였던 폴 로브슨을 비난했다. 위원회는 공산당원임을 인정하라며 끊임없이 로브슨을 추궁하고 있었고, 로빈슨은 로브슨에게 흑인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며 반공주의적 공격을 가해 미국 사회의 찬사를 받았다. 십수 년 후 맬컴 엑스는 이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내 백인의 도구로 행동한 로빈슨을 비난했고, 로빈슨은 죽기 전 이 일을 후회한다고 회고했다.
▲ 경찰에 의한 흑인 사망에 항의하는 의미로 국가가 연주될 때 기립하는 대신 무릎을 꿇은 콜린 캐퍼닉(가운데)과 동료들 [출처: fortu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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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사회가 원하는 흑인이 되기를 거부한 선수들의 대가는 컸다. 로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캐시어스 클레이는 1964년 헤비급 복싱 챔피언에 오른 다음날 자신이 흑인 민족주의적 종교 조직인 이슬람민족(NOI)의 일원임을 밝히며 미국, 기독교, 백인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모든 미국인들이 경악했고 선배 조 루이스마저 비난에 가담했지만 클레이는 개의치 않고 이름마저 이슬람식인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알리는 1967년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 징병을 거부한 결과 즉각 링에서 추방됐고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실제로 수감되지는 않았지만 3년 6개월 동안 링에 오르지 못했고, 연방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파기될 때까지 4년 동안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제 알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200미터 달리기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낸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시상대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치켜들었고, 이 장면은 전 세계에 방송됐다. 자신들이 미국인이기보다 흑인이라고 주장한 이 행동으로 이들은 선수촌에서 쫓겨났고 귀국 후 살해 위협에 시달렸으며, 육상 선수로서의 생명도 끝났다. 미국 올림픽 관계자들은 급히 헤비급 복싱에서 소련 선수를 꺾고 금메달을 딴 조지 포먼의 손에 성조기를 쥐어 주었다. 애국적인 흑인 역할을 수행한 포먼에게는 이후 FBI의 주선으로 상이 수여됐다. 콜린 캐퍼닉은 2017년 구단과의 계약이 만료된 이후 현재까지 뛸 팀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많은 래퍼들은 자신들의 가사에서 스포츠 스타들의 이름을 즐겨 언급한다. 위에서 거론된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복잡한 사연을 가진 잭 존슨이나 제시 오언스의 이름은 시대를 뛰어넘어 자연스럽게 랩 가사에 등장하고, 콜린 캐퍼닉의 사연은 켄드릭 라마와 에미넴을 포함해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래퍼들의 가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하마드 알리는 단순히 랩 가사에서만 기념되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 래퍼에 가까웠다. 그는 늘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며 거침없이 상대 선수와 미국 사회의 불의를 공격했는데, 이는 힙합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는 전형적인 래퍼의 모습이었다. 얼마 전 래퍼 커먼과 나스는 자신들의 SNS를 통해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의 항의 50주년을 기념했다. 커먼은 이들과 콜린 캐퍼닉의 이름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무대를 이용해 불의에 항의하고 목소리 없는 사람들을 대변한 운동선수들의 용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을 밝혔다.
▲ 존 카를로스(좌)와 콜린 캐퍼닉(우) [출처: @kaepernic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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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사람의 이름은 더 있다. 스미스와 카를로스가 주먹을 들 때 은메달리스트였던 백인 선수 피터 노먼은 미국 흑인 선수들이 결성한 올림픽인권프로젝트(OPHR)의 배지를 달아 두 사람의 시위에 동참했다. 그는 남반구의 인종주의 국가인 호주 대표였고, 이후 철저히 외면 받아 다시는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다. 2006년 그가 사망하자 스미스와 카를로스가 관을 들었다. 2012년에야 호주 의회는 노먼에게 사과했고, 올해에는 호주올림픽위원회가 그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노먼이 멕시코시티 올림픽 200미터 달리기에서 달성한 20초06은 지금도 호주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다.[워커스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