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필(국제민주연대)
올해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 중 하나는 바로 라오스 세피안-세남노이 댐 사고였다. 이 댐 건설 사업에는 SK건설과, 최근 발생한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건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서부발전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 사고가 특히 충격이었던 것은 한국 정부의 예산으로 개도국 개발을 위해 쓰이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났고, 막대한 인명피해가 났다는 사실이었다. 즉,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한 사업이 결과적으로 현지 주민의 생명을 빼앗는 비극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한국정부의 ODA사업이 현지 주민의 인권과 환경을 제대로 고려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라오스 댐 사업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의 할라우 강에서도 대규모 댐 건설 사업이 한국정부의 ODA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필리핀 할라우 강 유역을 개발하는 사업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할라우 강에 대규모 댐을 건설하려는 시도에 현지 주민들은 몇 십 년에 걸쳐 저항해왔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신들의 땅이, 댐 건설로 인해 파괴되고, 공동체가 이주해야 하는 상황은 그들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현지 주민들이 반대하는데도, 한국 정부는 필리핀 정부와 2012년 ODA 사업의 하나인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제공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댐 건설을 위한 사업에 나서면서 주민들에 대한 위협과 현지 주민조직에 대한 회유가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공동체는 심각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대외경제협력기금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수출입은행은 자신들이 마련한 세이프가드를 통해 사업 추진 과정에서 인권 및 환경기준을 준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업이 지닌 위험과 선주민들의 강제이주와 같은 인권침해 논란을 무시하면서까지 강행돼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2018년 4월 할라우 강 댐 사업의 문제점을 알리고자 한국을 방문해 언론 인터뷰 및 간담회를 진행한 필리핀 활동가들은 두테르테 정권에 의해 국익을 훼손했다며 비난 받고 있다. 필리핀 정권은 이들이 선주민의 권리를 위해 한국 정부와 기업에 사업 중단을 호소했다는 이유로 위협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 정부의 ODA사업은 라오스 댐 사고를 통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상실했다. 과연 한국수출입은행과 대우건설은 할라우 강 댐 사업에서 라오스 댐 사고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한국 시민사회는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묻지 않을 수 없다.
▲ 국제민주연대, 필리핀이주노동자연합 등 단체가 2015년 지구의 날을 맞아 한국수출입은행 앞에서 한국이 지원하는 필리핀 할라우강 댐사업에서의 인권침해를 규탄하는 국제공동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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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영향평가 실시하라는데 ‘연구’하겠다고만
UN과 OECD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최소한 정부가 시행하는 사업은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인권영향평가 실시를 비롯한 인권 보호대책을 수립하라고 권고한다. 2017년 10월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는 한국정부가 예산을 투입하는 사업에 대해 인권보호 조치를 취하라고 이미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올해 8월 발표된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ODA사업에 인권영향평가를 ‘도입하겠다’가 아닌, 도입하는 방안을 ‘연구’하겠다고만 밝히고 있다. 한국 정부의 또 다른 ODA사업에서 문제가 불거지고 인명이 희생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더 이상 한국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개도국 주민들의 고통을 강요하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그런 취지로 한국 시민사회와 필리핀 할라우 강을 위한 민중행동(JRPM)은 이미 지난 10월 수출입은행과 대우건설을 OECD가이드라인 위반으로 한국정부가 운영하는 OECD가이드라인 한국연락사무소(NCP)에 진정을 제출했다.
현재 이 사안은 한국NCP의 1차 평가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댐 공사가 시작되면, 공사에 반대하는 주민과 필리핀 현지 당국의 물리적 충돌이 예상된다. 더욱이, 두테르테 정권의 폭압적인 통치 스타일을 감안하면, 할라우 강 댐 공사에 반대하는 현지 주민에 대한 인권침해는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정부가 준수하겠다고 약속한 유엔과 OECD의 기준들에 비춰봤을 때, 한국 정부가 이 사업을 강행한다면 국제사회로부터 의심받는 결과만 불러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제공한 돈으로 한국 건설사가 시공을 하면서 발생하게 될 인권침해는, 필리핀 당국의 책임으로만 전가할 수 없다. 좋은 일을 한다면서 욕먹는 일을 사서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이라도 정부는 이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워커스 50호]